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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아저씨한테 끌려간 적이 있어요. 바지를 싹 내리더니 정말 이따만한 소시지를 덜렁 내놓는 거예요. 그러고는 '꼬마야 만져봐~'"

낯이 뜨거운가. 이것은 다큐멘터리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2009년작)에 나오는 성폭력 증언이다. 당신이 생각해왔던 성폭력 피해자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입을 열었을까.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성폭력 범죄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성폭력 범죄 예방과 사후 대책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랫동안 있어왔다. 한국은 성폭력 발생률 세계 3위의 불명예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분위기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통념을 깨고 당당하게 입을 연 이들이 있다.

당당한 성폭력 생존자들, NO 모자이크 NO 음성변조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 포스터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 포스터
ⓒ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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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음의 여성들이 끝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누가 보면 즐거운 수다라도 떠드는 줄 알겠지만 사실 이들은 성폭력 '생존자'다.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는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고 부른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를 드러내면서도 세상과 마주하길 주저하지 않는 이들은 타자화되고 대상화된 개념의 피해자가 아닌 '독립적 생존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는 성폭력 생존자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인데도 모자이크나 음성변조가 없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후 재판을 진행 중인 메이, 성폭력 예방 강사이지만 오히려 오랜 시간 피해자로서의 '흐릿한 기억'을 잊고 있던 한새,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또 연구자로 7년째 성폭력과 '연애 중'인 보짱. 이 세 명의 출연자는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소극적인 성폭력 피해자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장면이다.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던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과 변조된 음성 속에 숨어버린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었다.

<버라이어티 생존토크쇼> 조세영 감독이 이들을 만난 것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운영하는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의 모임 '작은 말하기'에서였다. 감독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피해 여성을 상상했지만 '이 사람들 정말 피해자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당당한 목소리를 듣게 됐다"고 한다.

조 감독은 성폭력 생존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당당하게 말하는 이 영화가 "사회의 케케묵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깰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성폭력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깨달음을, '나만의 아픔'이라고 생각해온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남성들에게는 자신들의 무지와 잘못된 성 지식을 깨닫는 반성과 갱생의 기회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살아있는 성교육 교과서를, 여자다움, 남자다움 따위의 고루한 통념에 갇혀있는 어른들에게는 바뀌어야 할 시각을 제시한다"고 전했다.

"피해경험을 말하는 것은 적극적 치유 방법"

제6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 참석한 관객들
 제6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에 참석한 관객들
ⓒ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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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이렇게 말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경험을 말하는 것이 당사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두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9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한국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가 순결을 잃고 상처를 입은 존재라고 낙인을 찍고 있다"며 "또 '밤늦게 다닌다, 야한 옷을 입는다'는 등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그들 스스로 가두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어 김 활동가는 "이러 사회 내에서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피해경험을 말하는 것은 자기의 시각으로 재구성해 스스로 의미화 할 수 있게 하는 적극적인 치유 방법 중의 하나"라며 "이는 피해자들을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또 "이를 통해 암묵적인 사회의 강요로 내면화 된 자신의 편견과 사회의 편견을 바꿀 수 있고, 숨어있는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이 세상 밖으로 한 발짝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매년 11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개최해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가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서 성폭력 경험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 분명 의미있는 과정이지만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인 만큼 모두에게 강요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김 활동가는 또 최근 성폭력 범죄가 연일 보도되는 것에 대해 "이럴 때마다 화학적 거세 등 처벌강화와 같은 가해자 중심의 일회성 예방대책이 난무한데, 그런 것보다 피해자 중심의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사각지대로 밀려나기 쉬운 피해자의 회복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가족과 같은 주변인들의 반응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우리 사회에서 약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묵인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폭력을 인식하는 시민의식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담임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기도 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옆 반 아이들이 다 알아버려 학교 다니기가 부끄럽다"고 했다. 연일 어린이 성폭력 범죄와 그 예방책 강화에 대한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물론 범죄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책도 중요하지만, 범죄 발생 후 피해자들이 끔찍한 상처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더욱 주목해야 할 필요성 또한 제기되는 시점이다.


태그:#성폭력, #버라이어티생존토크쇼,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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