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강릉에 갈 때마다 잊지 않고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 갑니다. 아이들과 산책하기 좋은 소나무숲과 잘 가꿔진 생가와 전시관이 있습니다.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의 이야기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이나 설화처럼 들려주기에 좋은 공간입니다.

 

홍길동전 그림책을 끼고 사는 쿠하는 장성군에 있는 홍길동 테마파크에도 여러 차례 가보았는데, 허균 허난설헌 생가에 처음 갔을 때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었습니다.

 

"엄마, 홍길동은 장성에 사는데, 왜 허균은 강릉에 살아요?"

아이의 엉뚱하지만 그럴듯한 질문에 엄마는 서둘러 간단하고 짧게 답했습니다. 

"글쎄, 작가의 고향이랑 이야기의 배경이 다른 것 뿐이지 않을까? 왜 다른지는 기념관에 계시는 선생님한테 여쭤볼까?"

 

이곳이 쿠하에게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집이라면, 엄마에게는 세 아이의 엄마 허난설헌의 집으로 다가옵니다. 허균의 누나 이름은 초희, 호는 난설헌, 자는 경번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름과 자, 그리고 호까지 지니고 살았던 보기 드물게 정체성이 강한 여성입니다.

 

오빠인 허봉과 시를 주고 받으며 스승 이달로부터 시를 배웠는데, 여덟 살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기념관 곳곳에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난설헌의 한시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시는  '곡자(哭子)'입니다. 허난설헌이 두 아이를 잃은 뒤에 지은 시입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키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아이들마저 잃은 난설헌은 뱃속 아기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눈여겨 보지 않았을 시를 아이들이 빨리 가자고 보채는데도 끝까지 읽게 됩니다.

 

누나의 삶 못지 않게 남동생 허균의 삶도 눈길을 끕니다. 문학관 곳곳에 전시된 안내문과 영상물로 소개된 허균의 인생은 <허균 평전>(허경진 지음, 돌베개)을 찾아보게 합니다. 숭유억불 체제의 조선에서 불교과 유교를 넘나들며 사회 개혁을 꿈꾼 자유로운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포대는 사계절 어느 때 가도 좋지만, 엄마가 된 뒤로는 초여름과 초가을의 바닷가를 가장 좋아하게 됐습니다. 한여름에는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아이와 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초여름과 초가을은 모래놀이를 하기에 좋은 기간입니다.

 

딴지관광청 노매드(www.nomad21.com)에 연재되는 슈리슈바님의 '제주비안나이트 - 옥자네 집' 편에서 소개된 '거북이 알 찾기 놀이'를 우리도 했습니다. 서울에서 제주도 할머니 집에 온 손녀들을 위해 슈리슈바 할머니는 삶은 달걀을 바닷가 모래밭에 숨겨둡니다.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거북이 알을 찾아내고, 찾은 알을 간식으로 먹는 놀이입니다. 

 

삶은 달걀 다섯 개를 모래밭에 묻었습니다. 너무 넓은 지역에 묻어두면 어디다 두었는지 잊어버리기 때문에, 조개껍데기, 타다 남은 폭죽 한 자루, 볼펜 등을 달걀 근처에 꽂아두어야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남은 두 알은 폭죽과 볼펜 사이에 하나, 조개껍데기와 폭죽 사이에 하나씩 넣어두었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닷가에서 만난 준서오빠와 함께 찾았는데, 끝내 한 알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햇빛이 뜨거워서 거북이 알이 다 익어버렸겠다고 너스레를 떤 뒤에 물로 모래를 떨어내고 껍질을 까주었습니다.

 

장난감 삽으로 모래를 퍼 담은 덤프트럭이 굴러갑니다. 까이유의 걸음마 속도에 따라 빨리 가기도 하고, 느리게 가기도 합니다. 단순한 놀이가 질리지도 않는지 간식을 먹으러 오라고 불러도 아랑곳 않고 모래를 퍼 나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노는 아이들을 좀 쉬게 하려고 불러 모았습니다. 준비해 간 스케치북에 풀로 모래그림을 그렸습니다. 한글에 관심이 많은 쿠하는 제 이름을 써달라고 했고, '바다'라는 글자도 써달라고 했습니다.

 

문구용 물풀로 크게 '쿠하'와 '바다'를 쓴 다음, 모래를 뿌렸습니다. 까이유 눈에도 신기해 보였는지 저도 해보겠다고 나섰습니다. 두 아이가 하트도 그리고 나비도 그리고 형태를 알 수 없는 추상화도 그렸습니다. 30분 만에 새로 산 스케치북을 몇 장 남기고 모두 모래그림으로 채웠습니다.

 

 

우연히-우연이란 없고 복잡한 인과관계를 통해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만-만난 친구와 재미있게 놀던 아이들은 집에 가기 싫어했습니다. 목요일 오후에 다투지 않고 재미있게 지낸 준서와 쿠하를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해 주고 싶어서 금요일 저녁에나 서울에 올라갈 것이고, 금요일 오후 내내 경포바다 모래밭에서 놀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약속 아닌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죽헌에 들러 두 시간쯤 놀다가 바닷가에 들렀다 서울로 갈 생각이었는데, 오죽헌에서 나오기 전부터 까이유의 눈에 누런 점액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빨갛게 충열된 눈이 점점 부어올라서 30분쯤 지났을 때는 아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오죽헌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탓인지 차에 태우자마자 아픈 아이는 잠이 들었습니다. 잠든 아이를 데리고 모래밭에서 우연히 보면 좋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얼른 서울에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안약 두 방울을 떨어뜨리고, 보채는 아이를 재우고, 밀린 집안일들을 처리하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몇 명 만나고 나니 강릉에 다녀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혹시 아이들이 별로 없는 바닷가에서 금요일 오후 내내 우리를 기다리셨다면 미안합니다. 헤어질 때 쑥스러워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준서네 가족을 만나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태그:#강릉, #쿠하, #허균, #바다, #걷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