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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김아무개 교수는 요즘 연일 밤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고교생들이 배울 역사교과서 <한국사> 집필자다. 그를 비롯한 <한국사> 집필자들은 지난 5월 14일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황당한 요구 사항"을 전달받았다. 1개월 안에 <한국사> 수정·보완 작업을 마치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아무리 막나가는 이명박 정부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이라며 "어떻게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1개월 안에 뚝딱 만들 수 있느냐"며 반발했다.

이어 김 교수는 "4대강 사업 같은 토목 공사도 속도를 내며 강행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데, 굴삭기·삽이 아닌 사람이 쓰는 역사 교과서를 이렇게 졸속으로 개편해도 되느냐"며 "정부가 역사 과목은 물론이고 학생들 교육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것 같다"고 답답한 마음을 나타냈다.

김 교수가 지적한 대로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역사교과서 수정·개정 작업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학계는 "정부가 순식간에 역사교과서를 만들라고 강요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수정·개정 '속도전' 논란이 벌어지는 건 작년 12월 발표된 '2009 개정교육과정'에 따른 조치 때문이다.

"역사를 삽으로 쓰나, 어떻게 1개월 만에 교과서 만드나"

이전까지 김 교수 등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2007 개정교육과정'에 따라 고교 1학년생들이 필수로 배워야 하는 역사과목 교과서 <역사>를 집필했다. 당시 중국의 동북공정과 더불어 일본의 역사왜곡이 크게 문제가 됐었다. '2007 개정교육과정'은 주변국들의 역사왜곡에 맞서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취지가 담겼다.

<역사>는 세계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이른바 '통합 역사교과서'였다. 하지만 <역사>는 교육현장에서 한 번도 쓰이지 못하게 됐다. 2011년 3월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될 예정이었지만, '2009 개정교육과정'이 발표되면서 무산됐다.

2009년 12월에 발표된 '2009년 개정교육과정'에 따라 고교 역사과목은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에 따라 2011년 3월 일선학교에서 쓸 수 있도록 교과서도 바꿔야 했다. 하지만 1년여 만에 교과서를 새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전에 만들어 놓은 <역사>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 <한국사>를 만들기로 했다. 이때부터 역사학계와 일부 집필자들의 불만과 반발이 시작됐다. 갑작스런 교과서 내용과 이름 교체도 문제지만, 교과서 개정 작업 기간이 너무 짧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역사>의 내용을 일부 수정해 <한국사>로 바꾸라고 5월 14일 통보 받았는데, 그 결과물을 6월 15일까지 내놓으라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며 "교과부는 수정 내용이 많지 않아 크게 문제가 안 될 것이라 하지만 역사라는 건 한 번 손을 대면 여러 곳을 동시에 고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사학계 "엉터리 교과서 강요" - 교과부 "작년12월에 사전예고"

민족문제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전국역사교사모임, 한국근대사학회,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등 역사학계도 지난 5월 29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교육과정이 바뀌면 최소한 3년 정도 여유를 갖고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이 순리이자 상식이다"며 "그럼에도 무리하게 교육과정을 마구 바꿔놓고 개정 이전 교육과정에 의해 집필, 검정된 교과서를 수정 보완해 새 교육과정의 교과서로 바꾸어 쓰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불법, 탈법, 혹은 편법적인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어 이들 단체는 "교과부의 지시에 따르자면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종래의 <역사> 교과서 가운데 전근대사를 1개 영역에서 2개 영역으로 늘리고 근현대사를 8개 영역에서 7개 영역으로 줄여 전체 분량의 1/3을 재집필해야 한다"며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동안 집필자들이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을 한 달 안에 완전히 뜯어고치라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이자, 졸속으로 엉터리 교과서를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과부의 견해는 "특별히 문제될 게 없다"는 반응이다. 교과부 교과서기획과의 한 관계자는 "<역사>에서 전근대 부분을 추가하고, 마지막 현대사 부분을 약간 축소하기만 하면 된다"며 "그 외 다른 내용은 전혀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교과서 개정을 안내한 날짜는 올해 5월 14일이었지만, 이미 작년 12월 개정교육과정을 발표할 때 사전에 교과서 개정을 예고했다"며 "뿐만 아니라,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는 물론이고 역사학계와도 논의를 통해 결정한 사항"이라고 밝혔다.

어쨌든 역사교과서가 6개월 만에 개정이 완료되는 '속도전'이 벌어진 건 분명해 보인다.


태그:#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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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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