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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국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중랑천의 자전거도로
 금계국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중랑천의 자전거도로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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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고, 뜨겁다. 지금이 6월초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예전에도 이때쯤 이렇게 더웠던가? 아니, 이렇게까지 뜨거웠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다. 두세 주일 전, 하루는 흐리고 하루는 비가 오던 날씨가 언제 적이었는지,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검은 아스팔트조차 멀리 은빛으로 이글거리고 있다. 이 모두, 구름 한 점 보기 힘든 투명한 하늘 때문이다. 그 하늘 어딘가에 붙박여 있는, 황금빛으로 불타고 있는 거대한 불꽃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관통해 중랑천까지 가는 동안, 마치 뜨거운 불판 위를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처음엔 날짜를 잘못 택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햇볕이 쨍쨍한 날 말고, 구름이 살짝 드리워져 조금은 덜 무더운 날이었을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오늘인가? 이대로 자전거를 되돌려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니어서 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설사 날짜를 바꾼다고 해도 요즘처럼 일기가 불순한 때, 내가 택한 날이 반드시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이라는 보장이 없다. 사실 날씨가 좋은 날을 택해 여행을 떠나겠다는 건 이미 반쯤은 여행을 포기하겠다는 말과도 같다.

의정부 들어서는 길목에 놓여 있는 대전차 장애물. 머리 조심!
 의정부 들어서는 길목에 놓여 있는 대전차 장애물. 머리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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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자는 날씨를 탓하지 않는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동안에 맛보는 가장 큰 묘미는 예측 불허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경험이다. 일상적인 일과는 거리가 있는, 낯선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맞닥뜨렸을 때, 여행을 떠난 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여행을 떠나는 날의 날씨 역시 무언가 새로운 사건을 예고하는 듯 유별난 상태였을 때, 평상시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날이 좋을 땐 좋은 대로, 날이 나쁠 때는 나쁜 대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또 자전거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다. 물론 자전거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모두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날씨를 가려 여행을 떠나려다 결국 여행을 포기하게 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청계천에서 중랑천으로 넘어가는 곳.
 청계천에서 중랑천으로 넘어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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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난해 겨울 눈 덮인 한강의 자전거도로를 달려 회사로 출근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영하 10도, 그야말로 살을 에는 추위였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그대로 살얼음이 되어 얼굴에 달라붙었다. 얼굴이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때는 어서 빨리 봄이 와서 날이 따뜻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몸서리쳐지는 한기가 그립다. 그러고 보면, 오늘 온몸을 달구는 이 무더위 또한 언젠가 다시 한번 더 맛보고 싶은 간절한 그리움으로 떠오를 게 분명하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청계천 고산자교에 도착했다. 고산자교 밑으로 내려가면 청계천 자전거도로가 나오고, 그 길을 쭉 따라 내려가면 왼쪽으로 중랑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과 만나게 되어 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오늘 여행은 끝까지 이 무더위와 함께 해야 한다.

자전거도로 곁 꽃밭. 밑에서 위로, 차례대로 마가렛, 금계국, 장미.
 자전거도로 곁 꽃밭. 밑에서 위로, 차례대로 마가렛, 금계국,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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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국, 노란꽃창포... 중랑천을 뒤덮은 꽃들

중랑천에는 나무 그늘이 많지 않다. 그 대신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이름을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다리 그늘이 생각 외로 서늘하다. 다리가 보일 때마다 그 밑에서 틈틈이 쉬어가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더위를 식히고 나면 새로운 기운이 솟는다. 다시 페달을 밟을 힘이 생긴다. 이렇게 무더운 날에는 평소보다 속도를 늦추는 게 좋다. 페달을 너무 힘주어 밟으면,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가 신체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

곧게 뻗은 중랑천 자전거도로, 나무 그늘이 흔치 않다.
 곧게 뻗은 중랑천 자전거도로, 나무 그늘이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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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은 지금 곳곳이 꽃밭이다.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부채붓꽃을 시작으로 노란꽃창포, 금계국 등이 가득 꽃을 피우고 있다. 하지만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인지 붓꽃과 창포꽃 대부분 꽃잎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바짝 오그라들어 있다.

길가에 금계국만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잡초처럼 무성하다. 황금빛 꽃잎이 마치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았다. 금계국은 이 무렵 가장 아름답게 피는 꽃 중에 하나다. 길가 화단에 줄맞춰 서 있는 붓꽃이나 꽃창포보다, 도로 주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금계국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게 꼭 태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랑천 둔치 동부간선도로 확장 공사 현장. 아파트 벽에 도로를 지상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중랑천 둔치 동부간선도로 확장 공사 현장. 아파트 벽에 도로를 지상화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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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한다. 창동과 이문동을 지나 청계천과 만나서는 그 물을 마저 끌어들인 다음 바로 한강과 합류한다. 한강 제1지류로, 서울 시내를 지나는 하천으로는 가장 긴 것으로 알려졌다.

제1지류답게, 하천 폭도 매우 넓은 편이다. 그 넓은 둔치 위로 이미 자전거도로를 비롯한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도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구간이 자주 눈에 띈다. 여기 저기 몇 년째 공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자전거를 위한 시설들이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

한강과 마찬가지로 중랑천에서도 지금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자전거를 타고 몇 개월마다 한 번씩 중랑천을 찾아가는데,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진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이렇게 자주 바뀌어서는 쉽게 적응하기 힘들다.

자전거도로 곳곳에 이정표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중랑천 같이 넓고 긴 하천에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많은데 이제는 그런 혼란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다리마다 자전거로 이동이 가능한 경사로를 설치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변화 중에 하나다. 지난해에만 해도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는 다리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은 거의 모든 다리에 경사로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로 인해 자전거도로를 이용해 강을 건너는 일이 점점 더 수월해지고 있다. 이 경사로는 자전거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거나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물들 중에 하나다.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다.

중랑천 자전거도로. 왼쪽에 방향과 거리 표시 이정표가 보인다.
 중랑천 자전거도로. 왼쪽에 방향과 거리 표시 이정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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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천 둔치 위에 새로 조성중인 자전거 교육장
 중랑천 둔치 위에 새로 조성중인 자전거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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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4대강사업이 시작된 이후로는 하천 둔치에 이런 시설물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게 결코 반갑지만은 않다. 4대강사업으로 인해 복지나 교육 같은 곳에 쓰여야 할 예산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지적이 있다. 하천을 치장하고, 자전거도로 시설물들을 보강하는 것이 복지나 교육과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4대강 사업과 맞물려, 하천을 개량하는 일이 무슨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중랑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금은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우이천이나 도봉천 같은 지천마저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충분히 아름다운 하천들이 인공미에 희생돼 하루가 다르게 자연미를 잃어가는 게 너무 안타깝다.

심지어 지난해 6월에는 서울시에서 중랑천 군자교까지 국제여객선이 드나드는 뱃길을 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여러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이 계획은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은 미래에 '옛날 하천'을 찾아내 특별히 보존해야 하는 일마저 생길지도 모른다.

중랑천 징검다리. 비가 올 때는 하천이 갑자기 범람할 수 있으므로 건너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중랑천 징검다리. 비가 올 때는 하천이 갑자기 범람할 수 있으므로 건너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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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이기적'인,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들

의정부까지 올라갔다 다시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중랑천의 이름도 없는 한 작은 다리 위에서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는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시멘트로 덮어놓은 강바닥 위로 온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물고기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애를 넘기 위해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고 있다.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바꾸어놓은 강바닥이 그들에게 터무니없는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하천의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대충 서둘러 만든 시설들이 그들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운명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

강물을 거슬러오르는 물고기들. 운명을 거스르는 일만큼이나 힘들어 보인다.
 강물을 거슬러오르는 물고기들. 운명을 거스르는 일만큼이나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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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중랑천 자전거도로가 끝나는 지점.
 의정부, 중랑천 자전거도로가 끝나는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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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이제는 태양이 많이 기운 시각이다 싶은데도 열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쬐는 햇볕보다 사선으로 내려쬐는 햇볕이 더 따갑다. 이 무렵에 예전에는 경험하기 못했던 고온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가로수 그늘 하나 변변치 않은 도시는 사막과 다를 게 없다. 오늘 그런 도시의 삭막한 도로 위를 헤집고 돌아다닌 내 꼴이, 중랑천 시멘트 강바닥을 필사적으로 거슬러 오르던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 도로 위의 내 운명 역시 그들 물고기만큼이나 위태롭다.

인간이 만든 '문명'이라는 이름의 덫에 인간이 걸려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꼴이다.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중랑천 개발 조감도(일부 구간). 2004년에 시작한 사업이 2010년 올해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중랑천 개발 조감도(일부 구간). 2004년에 시작한 사업이 2010년 올해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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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랑천, #의정부, #금계국, #자전거여행, #4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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