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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도자기인채 폼을 잡고 있는 요강.
 짐짓 도자기인채 폼을 잡고 있는 요강.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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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시절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척 겁이 많은 아이였다. 아마도 그것은 어린 조카를 놀리기 좋아했던 장난꾸러기 고모들의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빨강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내 다리 내놔~"

고모들이 들려준 '미스터리 호러 판타지' 이야기의 영향으로 나는 우리집 변소에 '달걀귀신', '처녀귀신', '몽달귀신' 등등 수도 없는 귀신이 살고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변소에서 한동안 일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요강이라는 기특한 물건이 없었다면 나는 매일 키를 뒤집어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녀야 했을지도 모른다.

요강에 밥 해먹기...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불과 30여 년 전인 80년대 초반까지도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집이 많지 않았기에 요강은 요긴하게 쓰였다. 때문에 요강을 비우고 닦는 일은 밥하는 일만큼이나 그 집안 며느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다.

놋요강을 사용하던 시절. 할머니는 며느리나 딸들에게 항상 이런 잔소리를 하셨다.

"급하면 밥을 지어 먹어도 될 정도로 정갈하게 간수하는 것이 요강이야. 가마솥은 무거워서 들고 피난을 갈 수 없으니까 가벼운 요강을 들고 가서 솥으로 쓰기도 한다는겨."
"우웩! 드러워라. 할머니. 말도 안 돼. 누가 드럽게 요강에 밥을 해먹어?"
"이누무 지지배가. 할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지. 너도 이담에 시집 가면 놋요강에 밥 담아 먹게끔 깨끗하게 살란 말여."
바닥에 놓으면 영락없이 요강이지만
 바닥에 놓으면 영락없이 요강이지만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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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이 얼마나 정갈하게 간수되고 있는지의 여부로 살림 잘하는 며느리를 판단하셨던 할머니. 요강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던지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일제 시대 일본군들에게 빼앗긴 놋요강 이야기를 하고 또 하셨다.

"그 나쁜 놈들이 탄피 만든다고 놋그릇, 놋숟가락은 말할 것도 없고 똥오줌 받아내던 시아버지 놋요강까지 죄다 뺏어갔잖여. 그런 도적놈덜이 어디 또 있어. 내가 그때 뺏긴 놋그릇이랑 놋요강 생각만 하면 분해 죽겠어." 

일제에 놋그릇을 뺏긴 이후 놋요강을 대신하던 백자 요강. 엄마 말로는 한 손으로는 들기도 무거워 비우고 닦다 깨뜨린 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지만 그런 와중에도 달랑 하나가 친정집 창고에 남아 있었다.

가볍고 깨지지 않는 스테인레스 요강이 보급되면서 사라진 무거운 백자 요강. 하지만 딸 있는 집 엄마들은 백자 요강의 쓰임을 잘 알기에 하나 정도는 버리지 않고 어느 구석에 잘 보관해 두었다.

"백자 요강이 좌욕에는 그만이야. 백자 요강에 쑥 삶은 물을 담아 좌욕하면 잘 식지도 않고, 엉덩이가 배기지도 않고. 니들 시집가서 애기 낳고 산후조리할 때 쓰려고 간수해 뒀다."

하지만 딸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게 되니 쪼그려 앉아야 하는 백자요강보다 훨씬 더 편한 의자식 좌훈기가 등장했다. 결국 백자 요강은 좌식 변기의 등장과 함께 먼 옛날이야기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번식력이 엄청난 구피들. 일부 새끼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번식력이 엄청난 구피들. 일부 새끼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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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후에는 또 어떤 신분 상승을 할까

그렇게 몇십 년은 족히 친정집 창고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백자 요강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이날 조카 녀석에게 선물한 관상어 구피들이 왕성한 번식활동 끝에 엄청난 수의 새끼를 낳아 버린 것이다. 열 마리 이하가 살기에 적당했던 작은 어항에 스무 마리가 넘는 구피들이 돌아다니다 보니 분양이 시급했다. 그때 문득 친정집 창고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백자 요강이 떠올랐다.

'그래 그거야. 거기다 키우면 될 것 같아.'

이미 수십 년 전 요강으로서의 기능을 마친 친정집 요강. 깨끗이 닦고 말린 요강 속에는 그 시절 만큼의 먼지만 잔뜩 담겨 있었다.

"엄마, 이거 어항으로 쓸 건데 괜찮겠지요? 혹시 그릇에 오줌기가 남아있는 건 아니겠지?"
"오줌기라니? 할머니 말처럼 먼지만 닦으면 밥 담아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해. 근데 요강에 뭔 물고기를 키운다니? 아주 별짓을 다하는구나." 

그날부터 할머니의 백자 '요강'은 우리집으로 와서 백자 '어항'이 되었다. 신분의 수직상승을 이룬 것이다.

"어머, 저건 뭐야? 백자 같은데. 이거 골동품 맞지? 이조 백잔가?"
"장 항아리야? 꿀 항아리야? 예전에 우리 시골집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데...?"
"뭐? 요강? 정말이야? 하하하. 웃겨 죽겠네. 비싼 백잔줄 알았잖아."
구피의 새집이 되어준 할머니의 요강. 한옥으로 이사한 구피들은 행복할까?
 구피의 새집이 되어준 할머니의 요강. 한옥으로 이사한 구피들은 행복할까?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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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온 사람들은 너나없이 백자 어항에 관심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 같으면 손님들 눈에 띌까 숨기고 감추었던 것을 떡 하니 사방탁자 위에 올려두고 신주단지처럼 귀한 척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저것이 설마 요강일거라 짐작조차 하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이 사물의 용도와 가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지금은 어항으로 사용되는 할머니의 백자 요강이 앞으로 한 백 년쯤 흐른 뒤 우리 후손 누군가의 장식장에서 대단한 유물 취급을 받으며 소중하게 대접받고 있을지. TV쇼 <진품명품>에 나가서 엄청난 가치를 인정 받을지 말이다.


태그:#백자요강, #어항, #구피, #요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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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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