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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에야 대전에서 옮겨온 포도나무가 새 삶을 위한 싹을 올렸다.
▲ 포도나무 새싹 5월 중순에야 대전에서 옮겨온 포도나무가 새 삶을 위한 싹을 올렸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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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와 인연

"오 박사! 포도주를 뭣하고 먹으면 제일 마싯당가?"

십칠팔 년 전 유치과학자로 우리연구실에 온 고향후배에게 물어본 질문이다. 선물 받은 포도주 한 병을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최근 미국에서 귀국한 오 박사에게 물어보면 될 것 같아 던져본 질문이었다.

"치즈"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면서 오 박사는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순간 나는 집사람이 운영하는 가전제품 매장 옆에 비어있는 조그만 코너에 포도주와 치즈를 판매하는 매장을 열어도 될 것 같은 가능성을 느꼈다. 포도주가 뭔지도 모르고 치즈는 더욱 모르는 시절이었다. 네덜란드에 사는 누이동생이 가끔 선물로 가져온 치즈 덩어리는 냉장고에서 뒹굴다가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그 때 우리가 살았던 곳은 3500여 세대 규모 연구단지 아파트였고 집사람 가게는 단지 내 복합상가였다. 주민의 20~30%는 외국에 유학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포도주 맛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오 박사가 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상당한 관심을 모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직원 한 명의 인건비와 상가 임대료 정도가 수입 전부였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우리 음식의 짜고 매운 맛이다. 김치와 된장국이 차지하고 있는 식탁엔 포도주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포도주는 우리 전통음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특별한 날 분위기 때문에 메뉴에 올라간다.

집사람 와인숍 덕분에 나는 포도주를 조금 알게 됐고 시음해 볼 기회도 많았다. 단맛 포도주를 졸업하고 시고 드라이한 포도주 깊은 맛에 눈을 뜨게 되었다. 최근 서울 한 백화점 주류코너 판매액 순위에서 포도주가 맥주를 추월했다는 기사를 읽고 신세대 음식문화 변화에 따른 격세지감을 느껴야 했다.

오 박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포도!' 소리를 들으면 입안에 침이 돌 것이다. 침이 소화에 도움이 된다면 포도 역시 소화촉진제다. 포도주를 어울리는 음식과 같이 먹으면 충분한 침 때문에 소화가 잘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전에 살았던 집터는 배수가 잘 안된 탓에 제대로 성장을 못했는지 포도나무와 같이 새터로 옮겨줬더니 살만 한지 잎도 활기차고 청초한 꽃도 다시 올렸다.
▲ 불루베리 꽃 전에 살았던 집터는 배수가 잘 안된 탓에 제대로 성장을 못했는지 포도나무와 같이 새터로 옮겨줬더니 살만 한지 잎도 활기차고 청초한 꽃도 다시 올렸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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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합병원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하는 일을 30여 년 동안 계속해 왔다. 요즈음에는 눈이 자꾸 말썽을 부린다. 가끔 '눈이 없다면?' 상상을 하게 됬다.

일전에 두 명의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눈에 대해 각각 다른 조언을 받았다. 한 친구는 학교 후배로 "형님! 눈이 건조해 까칠까칠하시면 눈 운동을 하세요"하면서 눈 운동 방법을 가르쳐 줬다. 또 한 친구는 학교 동창으로 "부흥아! 안구건조증으로 불편을 느끼면 너도 나 같이 한달 반 동안 입원하여 수술하고 6개월 동안 휴양하거라"하면서 수술경비와 병원이름과 전문의사를 소개해 줬다.

"알레르기입니다"하면서 인공눈물과 안연고를 처방해주는 동네 안과의사를 믿고 눈이 까칠해질 때마다 인공눈물을 즐겨 넣은 나를 본 의사 친구가 "인공눈물 너무 좋아하지마! 실명까지 갈 수도 있어"라는 말을 했다. 안과의사는 한번도 눈 운동을 권하지 않았다.

운전 중 신호대기에 걸리면 눈동자를 최대한 큰 폭으로 좌우상하로 움직이고, 굴리는 눈 운동을 선택했고 내 눈은 알아보게 활력을 되찾았다. 인공눈물은 불순물이 눈에 들어 갔을 때 눈을 비비지 않고 빠져 나오게 하는 목적 외에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몇 개월 전부터 무뎌진 심장 자각증상 때문에 대학병원 심장내과를 찾아갔다. 이 병원에 비치된 내 진료기록카드에는 내분비내과, 신경과, 안과, 심장내과, 치과의 주기적인 검진결과가 기록되어 있으며 주기적인 건강 검진 결과도 첨부되어 있다. 의사가 원하면 언제든지 참조할 수 있다.

의사는 내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심장이 악화된 주 원인을 알아내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인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킬 방법이 있다면 수술보다 그 방법을 선택하고 싶다.

가끔 멍멍해진 현상 때문에 수술한다? 다른 기본적인 검사가 정상인데도? 다른 자료를 믿을 수 없어 수술을 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검사를 하지? 등등 불편한 심기가 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현대 의학은 현재 상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불량 연료를 사용하여 자동차 연통이 막혔다면 연통을 갈거나 뚫어야겠지만 다음부터는 불완전 연소가 되지 않는 좋은 연료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범정 스님은 차, 책, 음악과 텃밭을 삶을 풍부하게 하는 요인으로 꼽았지만 나는 이것에 한 두 잔의 포도주나 막걸리를 보태고 싶다. 하지만 당뇨병과 고혈압 그리고 동맥경화 등 심장질환 때문에 당분간 멀리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포도는 혈전 생성을 억제하고 동맥경화증을 비롯한 심장병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단다. 항시 먹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불가하다면 포도즙으로 만들어 마실 생각이다.

구운 식빵에 치즈를 얹어 우유와 같이 먹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 때 포도주 한잔 곁들이면 치즈와 포도주의 잘 맞는 궁합을 확인할 수 있다. 오 박사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새롭다.

시랑헌 포도밭

10여 년 된 포도나무 50여 그루를 작년 초겨울에 수용된 포도밭에서 옮겨와 겨울을 나기 위해  굴착기로 깊게 파서 옆으로 모아 묻어 뒀다. 집사람이 나무를 눕혀서 심어놓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멀쩡한 나무 전부 죽였다고 다그친다.

올 봄 2월에 편백나무를 조림하기 위해 왔다가 더 늦어지면 고생하며 옮겨온 포도나무를 모두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 반신반의 상태에서 산마늘 밭으로 올라가는 길목 양지바른 곳에 터를 만들어 제대로 심었다.

4월이 다 지나가도 이식한 포도나무는 깨어날 줄 모른다. 5월 초 대전 집 데크공사 때문에 시랑헌을 잠깐 들려 데크공사를 위한 추가 장비를 챙겨 올라가면서 잠시 들러봤으나 새싹 소식이 없다. 집사람 말대로 포도나무를 눕혀 심어서 전부 죽었나 보다. 많이 섭섭하다.

5월 둘째 주말에 장아찌를 담기 위한 잎을 채취하러 산마늘 밭으로 올라가다 혹시나 싶어 포도나무 밭에 들렀다. 고목에서 올라온 붉은색을 띤 여리고 여린 새싹이 "안녕하세요"하면서 인사를 건네온다. 확인해보니 한 그루도 죽지 않고 모두 나름대로 새 터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있다.

평생 처음으로 정면으로 대한 포도나무 잎의 어린 순. 포도나무 새싹의 가장자리가 붉은 빛을 띤지도 처음 알았다.
▲ 늦잠에서 께어난 포도나무 새싹 평생 처음으로 정면으로 대한 포도나무 잎의 어린 순. 포도나무 새싹의 가장자리가 붉은 빛을 띤지도 처음 알았다.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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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도 내심 많이 기다린 모양이다. 연락을 받자마자 서둘러 포도밭으로 올라와 보고 무척 반가워한다. 새 생명의 경이로움을 세치의 혀나 26개 기호의 조합으로 표현하겠다는 발상이 우매한 짓일 것이다. 와서 직접보고 느끼는 것 외에 방법이 있겠는가?

시랑헌에 우거진 쑥대밭과 전쟁을 포함한 모든 일들이 '포도나무 돌보기' 뒤로 밀렸다. 남원을 두 차례 오가면서 재료를 사오고, 지지목을 박고, 줄을 매어 포도나무 순이 잡고 일어설 망을 엮어 줬다. 갈수록 포도나무 일이 많아지겠지만, 우선은 이보다 흐뭇할 수 없다. 

포도나무를 재배해 본 경험이 없는 지라 어떻게 보살펴야하는지 잘 모르지만, 넝쿨식물은 줄을 대줘야할 것 같아 지지대를 대주고 줄을 엮어 망을 만들어 줬다.
▲ 포도나무 줄 엮어주기 포도나무를 재배해 본 경험이 없는 지라 어떻게 보살펴야하는지 잘 모르지만, 넝쿨식물은 줄을 대줘야할 것 같아 지지대를 대주고 줄을 엮어 망을 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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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시를 읊자 집사람이 따라 한다. 곧, 시 낭송회가 되었다.


태그:#시랑헌, #포도밭, #포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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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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