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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맹문(孟問). 일단 스승 맹자와 제자 만장(萬章)이 나누는 대화 한 토막부터 읽어보기로 하자. 맹자(孟子) 진심(盡心) 하편이다.

 

孟子 盡心 下

만장: 공자께서는 왜 진(陳)나라에 계실 때 노(魯)나라의 광사(狂士)들을 생각하셨습니까?

맹자: 공자께서 중도(中道)를 걷는 사람을 원하였지만 그것이 불가능한지라 어쩔 수 없이

        차선(次善)으로 선택한 것이 광사(狂士)이고 견사(狷士)인 것이다.

만장: 어떤 사람들을 광사(狂士)라고 합니까?

맹자: 금장, 증석, 목피같은 자들이다.

 

여기 증자의 아버지 증석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그것도 광사(狂士)라는 이름으로. 뉘앙스에서 느껴지듯이 말이 크고 뜻이 큰 사람(志大言大)이니, 광사(狂士)란 단어는 나쁜 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말이라고 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맹자의 화법은 직설적이고 호전적이다. 그래서 간혹 다된 밥에 재를 뿌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에둘러 돌아가는 법은 없다. 이런 그의 화법은 공문(孔門)의 정통(正統)을 잇는 증자의 아버지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증자의 아버지 증석은 광사(狂士)에 불과하다'는 맹자의 발언은 맹자에게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난감한 문제적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주석가들은 이 대목에서 매우 당황스러웠을 터이고, 우리는 그때의 긴박함과 난감함을 주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금장(琴張)이란 공자의 주요한 제자 중에 한 명이었던 자장(子張)을 말하는데, 그가 친구 자상호(子桑戶)의 상(喪)에 가서 유가방식의 곡진한 예의를 표한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 역시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것.

 

누구의 죽음에 임해서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 이것 도가(道家) 계열의 기록들에서 흔히 보이는 레퍼토리, 말하자면 닮지만 아닌 것, 즉 사이비(似而非)인 것이다.

 

증자의 아버지, 증석 역시 아는 사람의 상(喪)에 가서 노래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석에 달아놓은 표현이 절묘해서 웃음을 금할 수 없다. 주석을 그대로 번역해보면 "자상호가 죽자, 금장(琴張)이 그 상(喪)에 임(臨)해서 노래하였다. 이 일은 장자(莊子)에 보이는데, 비록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해도 요컨대 반드시 비슷한 것이 있다. 증석은 전편에 보이는데(논어에서 보여주었던 고원한 경지를 우리 역시 기억한다) 계무자가 죽자 증석이 그 집 대문에 기대어 노래하였다. 이 일은 예기(禮記) 단궁(檀弓)편에 보인다(子桑戶死琴張臨其喪而歌事見莊子雖未必盡然,要必有近似者曾晳見前篇季武子死曾晳倚其門而歌事見檀弓)."

 

*子桑戶死琴張臨其喪而歌事見莊子雖未必盡然要必有近似者

曾晳見前篇季武子死曾晳倚其門而歌事見檀弓

동사로 쓰일 수 있는 단어를 찾아보자. 죽는다는 사(死), 그러므로 子桑戶死에서 일단 끊고, 금장은 자장의 이름이고, 어디에 임하다는 임(臨)자가 보인다. 그런데 임이라는 동사와 그리고 동사와 동사의 연결을 나타내는 단어인 이(而)를 사이에 두고 노래한다는 동사가 뒤따르고 있으니 붙여서 이해하기로 하자. 琴張臨其喪而歌. 일은 보인다, 어디에 장자에, 事見莊子. 비록 반드시 다 그러하지는 않지만, 雖未必盡然, 대강 생각해보면(요) 있다, 무엇이 근사(비슷)한 것이, 要必有近似者. 증석은 보인다, 어디에, 전편에서, 曾晳見前篇. 계무자는 사람이름, 죽었다가 나왔으므로 季武子死, 여기서도 말 이을 이(而)자가 동사 사이에 위치한다. 증석은 의지하다, 무엇에, 대문에, 그리고 무엇을 하였나? 노래하였다, 曾晳倚其門而歌, 일은 보인다, 어디에, 단궁이라는 책에, 事見檀弓.  정리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 子桑戶死, 琴張臨其喪而歌. 事見莊子. 雖未必盡然, 要必有近似者. 曾晳見前篇. 季武子死, 曾晳倚其門而歌, 事見檀弓.

 

공문(孔門)의 식구들인 자장과 증석이 저들이 아는 사람의 상갓집에 가서 애도한답시고 노래를 불러 제낀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유가계열의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비슷하지만 아닌 것'에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동네, 이건 중대한 사안이 된다. 뒷날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제기될 문제임이 분명한 것이다. 공문(孔門)의 후예(後裔)들은 이 부분에서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분명 증석은 유가의 가치에서 보자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맹자의 지적대로. 그러나 증석이 누군가? 그냥 적진(敵陣)에 버려둘 수는 없는 일. 이제 후대의 영민한 주석가들에 의해 드디어 '증석 일병 구하기'가 시작된다.

 

관전 포인트는 역시 맹자의 거침없는 논리와 후대 주석가들의 애처로운(^^) 변호. 먼저 맹자의 질타를 보고 다음 편에서 후인들의 변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맹자의 논변은 성격대로 거칠 것이 없다. 왜 증석이 광사(狂士)에 불과한가? 그의 평소의 행동거지를 보라. 말로는 거창하게 성인 혹은 경지 등을 운운하지만 그 말을 행동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其志嘐嘐然曰古之人古之人夷考其行而不掩焉者也). 따라서 그의 말은 공허하고 그는 한낮 광사(狂士)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평소에 감정이 많았던 사람을 다루듯,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다.

 

사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배웠다고 하지만 실제 어땠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인물이다. 말하자면 친자(親炙)하지 못한 인물이며, 비유하자면 외인(外人)이고 서자(庶子)인 셈이다. 공문(孔門)의 바깥사람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질 만도 한데 지금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지금 공문(孔門) 안쪽사람, 친자(親炙)한 적자(嫡子)이면서 정통의 아버지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드러나는 맹자의 엄격함은 많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먼저 입으로만, 말로만 거창하고 고원한 경지를 떠들어대는 부류들에 대한 경멸일 수 있을 것이며, 좀 넓게 본다면 전국(戰國)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외면하고 예의나 형식 따위로 도피하여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공문(孔門) 전체에 대한 비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맹자가 스스로 공문(孔門)의 적통(嫡統)을 이었다고 자임(自任)하는 정신의 원천이 아닐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자는 바다와 같이 넓었고 산처럼 높았다. 그러나 후인들은 그들의 좁은 그릇으로 스승의 바다와 산의 전부를 보지 못하고, 그 중 일부만을 골라잡고는 이것의 스승의 뜻이라고, 적통(嫡統)이라고 으스대는 것이 아닌가?

 

공자가 왜 비웃음을 사면서 천하를 떠돌았던가? 자로(子路)는 왜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갔는가? 맹자는 이런 분명해 보이는 사실을 외면하는 현재의 공문(孔門)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증석을 빌려 당시 공문(孔門)의 현실외면과 유약함을 질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시범케이스' 정도.


태그:#공자, #맹자, #증자, #장자, #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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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아들이며 누구들의 아빠. 학생이면서 가르치는 사람. 걷다가 생각하고 다시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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