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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카친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의 시신이 바르샤바 공항으로 운구되고 있다.
 레흐 카친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의 시신이 바르샤바 공항으로 운구되고 있다.
ⓒ Mariusz Michalak/wiadomosci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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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드라마는 현대사회에서 이전에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비극이다."

지난 주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의 목숨을 앗아간 비행기 사고를 접한 도날드 투스크 국무총리가 국민들에게 전한 위로의 말이다.

그가 굳이 그렇게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현재 폴란드인들이 겪고 있는 슬픔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하루 아침에 국가원수를 비롯한 정치·경제·국방의 지도자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는 일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바가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슬픔의 말을 전한 도날드 투스크 총리는 이미 폴란드 정치계에서 고 카친스키 대통령에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라이벌로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고 카친스키 대통령과 경합을 벌였으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던 전적이 있는 투스크 총리는, 그의 이름이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의 주인공 '도날드 덕'과 같고, 라이벌이었던 당시 카친스키 후보의 성 역시 폴란드어로 오리를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 때문에, 이 둘의 경합은 '오리들의 전쟁'이라 불리며 대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낳았었다.

2007년 전직 대통령의 쌍둥이 형인 야로스와브 카친스키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 뒤를 이어 폴란드의 국무총리가 되자 대통령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여러 가지 문제가 예상되기도 하였으나,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총리로서 카친스키 대통령의 동반자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그런 영원한 정치적 동반자이자 라이벌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보였다는 그의 심정은,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폴란드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두 명의 대통령이 임기 중에 목숨을 잃는 전적을 갖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폴란드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나루토비차가 1922년 12월 11일 대통령직에 오른 지 겨우 닷새 후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일 대통령 궁으로 향하는 영부인 마리아 카친스키의 운구 행렬에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13일 대통령 궁으로 향하는 영부인 마리아 카친스키의 운구 행렬에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 Mariusz Michalak/wiadomosci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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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굴곡의 역사, 그리고 메시아주의

우리가 아는 폴란드는 항상 강대국에 의해 지배 당하고 유럽인들이 겪지 못한 슬픈 역사를 많이 겪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폴란드의 역사를 한국과 자주 비교하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폴란드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슬프지만도 않다. 폴란드는 한때 중동부유럽을 호령하는 강대국을 건설한 역사도 가지고 있으며, 엄연히 유럽 주류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는 장본인으로 유럽 문화사를 장식해 왔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내정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주변 강대국이 분할 통치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1차대전이 끝나는 1920년대까지 폴란드는 유럽의 비극과 슬픔을 모두 어깨에 짊어진 희생양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폴란드의 문학사에는 '메시아주의'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문학사조까지 등장한다. 바로 폴란드의 현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져야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상황과 비교 묘사했던 문학사조로서, 인구의 대다수가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는 폴란드의 종교적 상황과 맞물려 폴란드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런 속죄양으로서의 폴란드는 음악, 미술, 문학, 영화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형상화되고 있다.

사실 유럽에 위치한 나라 중에서 폴란드만한 고통을 겪지 않은 나라도 없으며, 심지어 폴란드가 누렸던 과거의 영화를 단 한번도 누리지 못한 나라들도 주변에는 많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폴란드만이 유독 전쟁과 슬픈 역사의 피해자로 각인되어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세 번이나 비극이 반복되는 슬픔의 장소, 스몰렌스크

폴란드의 그런 비극적인 근대사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1941년 스몰렌스크 근처 한 숲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이다(그 학살장소 인근 도시인 카틴의 이름을 따서 흔히 '카틴 학살사건'이라고 불린다).

1941년 폴란드가 독립국으로서 일어서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러시아 비밀경찰이 장교, 지식인, 예술가 등 폴란드의 대표 엘리트 수 만명을 학살한 이 사건은, 1948년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폴란드의 역사를 좌지우지해왔던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게다가 사고가 있었던 스몰렌스크 지역은 폴란드가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졌던 1812년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러시아의 군사들과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 프랑스 군대에는 폴란드 출신의 군인들도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참전한 폴란드 군인들의 활약상은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도 기록되어있을만큼, 폴란드와 스몰렌스크와의 인연은 대단하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나폴레옹 전쟁과 카틴 학살로 인해서 목숨을 잃어야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와 비슷한 일이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과연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이번 폴란드 대통령의 죽음은, 단지 국가원수의 죽음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그런 역사 속에 묻혀있던 비극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나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준 사건이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이 겪는 충격은 더욱 크다.

게다가 세 가지 사건 모두 공교롭게 러시아와 연관되어 있다.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내외의 시신이 대통령궁 앞에 나란히 안치됐다.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내외의 시신이 대통령궁 앞에 나란히 안치됐다.
ⓒ Dariusz Bartosiak/wiadomosci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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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사건의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을까

이번 사고로 인해 폴란드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89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는 폴란드의 정치 경제를 이끌어가는 국가 엘리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국방부 수뇌들의 피해가 컸다.

모든 이들이 궁금해하는 대로, 이 비행기 추락사고의 원인규명에 폴란드 현지 언론들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할 확실한 정황은 파악된 것이 없다. 일단은 전반적으로 시계가 확보되지 않은 악조건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하고자 한 조종사의 과실로 보는 쪽이 많다. 현재 비행기에서 수거한 블랙박스를 통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더 정확한 결과가 조만간 발표되리라 예상되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 사고 배후에 러시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고 직후 러시아 대통령과 총리가 완벽하고 확실한 대처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러시아에 대한 불신은 다소 해소된 듯한 느낌이다.

문제가 되었던 점은, 사고 직후 스몰렌스크 공항 관제탑 관계자가 조종사의 미숙한 러시아어 실력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러시아 언론에 의하면 스몰렌스크 관제탑의 직원은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러시아어에 서툰 폴란드 조종사가 관제탑에서 일러주는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조사 결과 폴란드 조종사의 러시아어에는 문제가 없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행사 시간 한시간 전 쯤에 맞추어 공항에 착륙시간을 맞춘 데다가 바르샤바에서의 이륙도 상당히 지연되어 행사 시간에 맞추려고 억지로 착륙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관제탑에서 지시한대로 민스크나 모스크바 인근 공항으로 회항했다면 수 백km를 달려 행사장으로 와야했으므로 행사를 제 시간에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전용기 자체의 결함에도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에 제작된 러시아제 비행기인 이 전용기는 이미 이전부터 많은 문제점을 보이고 있었다. 1999년도 전 국회의장 알리치아 그제스코비악이 대통령 전용기를 이용해 중동을 방문했던 당시 사우디 아라비아 사막에 불시착한 일이 있었을 정도.

레셱 밀레르 전 국무총리는 이런 큰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대통령 전용기를 새로 구입할 것이냐며, 오래 전부터 대통령 전용기의 문제를 지적해 왔다. 그도 2003년 12월 관용 헬리콥터로 이동하던 도중 바르샤바 인근에 추락하여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죽음이 비극적이지만 그와 함께 국정을 책임지는 국가 책임자들이 무더기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들이 만약 다른 경로로 나누어 여행을 했더라면 이토록 안타까운 인명피해는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2일 밤 바르샤바의 학생들이 대통령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한 추모행진을 벌이고 있다.
 지난 12일 밤 바르샤바의 학생들이 대통령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한 추모행진을 벌이고 있다.
ⓒ Mariusz Michalak/wiadomosci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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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형의 목숨 살린 효심... 그리고 엇갈린 운명들

현재 폴란드는 국가 고위관리자들의 공동여행규정에 대한 명문화 규정이 없다. 물론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오긴 했지만, 2008년 12월 고 카친스키 대통령과 도날드 투스크 총리가 동시에 한 비행기를 타고 브뤼셀을 방문하는 등 이마저 엄격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고위관직자들의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간만의 차를 두고 일정이 변경되어 비행기에 오르지 않아 생명을 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속속 보도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대통령의 쌍둥이 형이자 전직 국무총리인 야로스와브 카친스키. 그도 역시 동생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행사에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하루 전 여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의 자리는 비행기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프세미스와브 고시엡스키 하원의원에게 돌아갔고 둘의 운명은 엇갈렸다.

야로스와브 카친스키는 추락 사고 직후 바로 현장으로 날아가 동생의 신원을 확인했으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날 바르샤바로 돌아와야했다. 바로 몸져 누운 팔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동생 카친스키 대통령 역시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서라면 일정을 취소할 정도로 지극한 효심을 보였던 아들이었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는 아직 아들의 사망 소식을 모른다.

그리고 천주교, 개신교, 러시아정교, 유대교 등 카틴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이 신봉했던 종교 지도자들 역시 대통령 전용기에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 폴란드 내 유대교 최고 랍비 마하일 슈드리흐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출국 날짜가 안식일에 맞춰져 있었던 것.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여행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영부인 마리아 카친스키의 시신 역시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장례를 기다리고 있다. 영부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손가락에 있던 결혼반지를 통해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언제나 축복 받은 부부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섰던 그들이기에, 폴란드 국민들이 느끼는 슬픔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직 대통령 내외, 역대 국왕들과 함께 바벨성에 잠들다

대통령 내외의 시신은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시내 바벨 성 내에 안치되어, 격변의 역사 속에 살다간 폴란드 역대 국왕들과 함께 잠들게 된다.

너무나 갑작스런 사고였고 너무나 안타까운 이별이었지만, 폴란드의 정국은 별다른 불안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있는만큼, 카친스키 전 대통령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어떤 것이었던 간에 정치인들은 모두 자기의 목소리를 낮추고 그 애도에 동참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폴란드는 사고 이후 일주일 기간을 공식적인 애도 기간으로 선포한 바 있다.


태그:#카친스키,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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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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