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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서쪽, 즉 경복궁을 중심으로 볼 때 서쪽에 해당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문화유산을 돌아보기 위해, 4월이 시작되는 첫날, '여성문화유산연구회' 회원들은 지하철 경복궁역 1번 출구에 모였다. 봄 같지 않은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고 곧 비가 쏟아질 태세다. 오늘도 지난번 답사에 이어 밝은 느낌의 사진을 얻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출구에서 곧바로 300미터 쯤 직진하면 건널목이 나오고 건너면서 오른 쪽 직진하여 오르면 배화여자대학(배화여중고)이 나온다. 오늘 답사 일정 중에 첫 번째 들른 곳이다.
이 학교는 1898년에 미국인 여선교사 캠벨에 의해 설립된 캐롤라이나 학당이 시초가 되었다. 처음에는 2명의 여아와 3명의 남아로 시작된 초등교육부터였다고 한다. 1910년에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고, 1916년에 당시 종로구 고간동(현 내자동)에서 현재의 위치인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한다. 따라서 이곳에는 1926년에 지어졌던 학교의 본관, 그보다 앞선 연대로 추정되는 생활관, 과학관이 아름다운 붉은 벽돌 건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생활관은 선교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는데 건물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과 서양식 기둥이고 지붕은 한옥의 기와를 얹었다. 이 건물을 통하여 근대 서양의 주택기술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또한 서양의 주택문화와 우리의 전통 주택문화가 조화를 이룬 예로 남아 있다고 한다. 건물양식에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모나지 않으면서 단아한 모양이 주변하고 잘 어울려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배화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민족운동에 적극 가담한 학교로 알려져 있다.

배화여중고 교정 안에 있는 생활관.
 배화여중고 교정 안에 있는 생활관.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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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 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화유산이 학교 건물 뒤편에 담처럼 남아있는 곳이 있다. 배화여고가 사용하는 별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자연 그대로의 바위절벽에 '필운대'라고 하는 글씨가 각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조선 선조 때 재상인 백사 이항복의 집터다. 한 때 인왕산이 필운산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고 하며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이항복이 직접 쓴 것이다. 이항복은 이곳에 살면서 스스로 필운이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했단다.

당시 인왕산 밑에 있던 필운대의 주변은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필운대 앞은 학교 건물이 가려서 멀리 조망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필운대 바위 위쪽부근의 산에 오르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필운대 바위 옆에는 후일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은 한시도 새겨져 있다.

백사 이항복의 집터, 뒤에 보이는 <필운대>라는 글씨를 직접 썼다고 한다.
 백사 이항복의 집터, 뒤에 보이는 <필운대>라는 글씨를 직접 썼다고 한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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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찾아간 시간이 쉬는 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반긴다. 아이들 눈에는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백사 이항복은 우리에게도 아이들 못지않게 먼 선조에 드는 어른이지만, 직접 현장에 찾아와 해설을 들으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꽤나 즐겁다.

학교를 나와 오던 길로 돌아 나오면서 매동초등학교와 서울시 유아교육 진흥원 건물 주차장을 지나면 마을버스 길이다. 길을 건너면 바로 서울시립 어린이 도서관 건물로 들어가는 계단이 나온다. 오른 쪽에는 종로 도서관이 보이고,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도 종로도서관 앞이다. 어린이 도서관 마당을 가로질러 내려가면 앞에 보이는 곳이 사직단 북문이다.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곧바로 사직단 정문으로 가려면 배화여고로 가기 위해 건넜던 건널목에서 왼쪽으로 50미터 쯤 직진해 가면 대로변에 세워져 있는 사직단 정문을 볼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경복궁 동쪽에는 종묘,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한다. 종묘는 조상을 받들기 위한 곳이고,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 신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다. 농경시대의 백성에게는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었기에 사직에 제를 지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또한 나라가 존재하는 한 사직에 제를 지내야 하는 것이고 나라가 폐하면 사직 또한 폐하는 것이라 사직은 국가 그 자체였다. '종묘사직'이란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이다. 종묘는 한 나라에 한 곳에만 있으나 사직은 도성은 물론 각 지방의 행정단위마다 설치해서 왕을 대신해 지방 수령이 제를 지냈다고 한다.

사직단. 사직공원 위에서 본 모습. 두 개의 단이 나란히 보이는 중에 뒤 쪽이 사단(토지신 제단), 앞 쪽이 직단(곡식신 제단)이다.
 사직단. 사직공원 위에서 본 모습. 두 개의 단이 나란히 보이는 중에 뒤 쪽이 사단(토지신 제단), 앞 쪽이 직단(곡식신 제단)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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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사직단은 많이 축소되어 있단다. 원래 종로도서관 자리는 제를 지내기 위한 제기 보관소 및 수복방이 있던 자리라고 하고, 그 주변에 있는 건물들도 사직단 권역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민족의 맥을 끊기 위한 수단으로 사직단을 없애려 했으나 백성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대신 사직단을 폄하하고 훼손하는 방법으로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직단과 사직공원이 한 공간에 있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던 일하고 같은 맥락이다. 그 여파로 지금도 사람들은 사직단 보다는 사직공원을 먼저 떠올린다. 현재도 사직공원 안에 함께 있는 셈이다.

사직의 '사'는 토지신이고 '직'은 곡식신이란다. 사직단은 일반 사당과 달리 집이 아니라 사방이 트여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그 안에 네모반듯한 단이 두 개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위에 흙이 덮여 있다. 북문(시립 어린이 도서관 있는 쪽)에서 보면 왼쪽(동쪽)단이 '사단'이고 오른쪽(서쪽)단이 '직단'이란다. 지금은 개천절 때 제를 지낸다고 한다. 북문을 나와 종로도서관 쪽으로 오르면 사직공원이 나오고, 공원에서 보면 사직단이 더 잘 내려다보인다. 공원을 가로질러 반대편 기슭에 보이는 기와집이 단군성전이다.

단군성전. 뒤 쪽 산기슭에 황학정이 있다.
 단군성전. 뒤 쪽 산기슭에 황학정이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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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는 단군을 우리나라 한 민족의 시조며 고조선의 첫 임금으로 보고 있다. 어느 나라건 나라를 세운 시조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역사적 사실에 덧붙여 기이한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신의 아들이었다거나 알에서 나왔다던가 하는 식으로 미화하고 신격화 한다. 그런데 일제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를 뿌리 없는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단군신화조차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에서는 단군왕검을 종교적인 신으로 접근하려는 것보다는 민족의 시조로, 혹은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될 때 단군신화는 민족화합의 구심체가 될 수 있고, 민족의 상징으로 우리의 민족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원전 2333년에 한민족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올해는 단기 4343년이다.

황학정. 현재 활터로 활용되고 있다.
 황학정. 현재 활터로 활용되고 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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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성전을 나와 담을 끼고 뒤로 돌아들어 가는 오솔길로 접어드니 눈앞에 단청을 하지 않은 고색의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활터에 있는 정자로 황학정이다. 인왕산 품에 살포시 들어앉아 있는 모양새다. 이곳은 고종 때 창건된 황학정으로 원래는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또 일제다)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고 건물들을 일반인들에게 불하할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황학정은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이 노란 학이 춤추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황학정 뒤편 바위에는 '황학정 팔경'이라는 시문이 새겨져 있었다. 인왕산 일대 주변의 경치가 빼어났다는 것을 칭송하는 시라고 한다. 현재 활터로 활용되고 있다.

활 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조용조용 주위를 돌아본 뒤에 황학정이 면해 있는 넓은 바위 뒷산으로 올랐다. 황학정의 지붕이 한 눈에 다 잡힌다. 조망권이 좋아 보인다. 바위 위에는 조그만 공터가 나오고 체육시설과 조선의 마지막 택견 수련터라는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올라온 모습그대로 인왕산을 앞에 두었을 때 오른쪽이 필운대가 있는 곳이다. 왼쪽 오솔길로 내려오니 도로가 나오고 다시 인왕산 서울성곽으로 오르는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울성곽(인왕산). 성 밖에서 걷고 있다. 사직동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서울성곽(인왕산). 성 밖에서 걷고 있다. 사직동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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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답사 일정은 성곽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황학정을 끝으로 성곽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성 밖으로 보이는 동네가 홍제동이라고 했다. 성곽을 따라 20여분 걸으니 암문이 나왔다. 암문으로 해서 성곽 안으로 들어오니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서울에서 동서남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해서 낙산과 남산의 흐릿한 경계선만 보인다. 그래도 가까운 곳의 북악, 청와대, 경복궁, 사직단은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솟을 기와집 일대가 경복궁. 오른 쪽으로 사직단이 보이고, 오늘 돌아본 서촌 일대다. 부슬거리고 비가 내렸는데도 제법 잘 보였다.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솟을 기와집 일대가 경복궁. 오른 쪽으로 사직단이 보이고, 오늘 돌아본 서촌 일대다. 부슬거리고 비가 내렸는데도 제법 잘 보였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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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동네를 통틀어 서촌이라고도 했다는데, 서촌은 조선중기부터 르네상스를 이룬 위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고, 근 현대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위항문학이란 양반문학과 서민문학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중인 혹은 여항문학이라고 했다. 이들은 삼청동에서부터 사직동 사이에 모여 살면서 인왕산 등지에서 시회를 여는 등 활발한 문인활동을 하면서 동류의식을 다졌다고 한다.

산수유가 가로수처럼 피어있는 성곽 길 입구로 내려와 왼쪽으로 걸으면 다시 단군성전과 사직단과 배화여고 입구와 경복궁역 1번 출구를 만난다.  서촌기행은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으로 끝맺음 했다.


태그:#배화여고 생활관, #필운대, #사직단, #단군, #황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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