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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 동역에서 BOB 등산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나 라우터브루넨까지 간 다음 WBA 열차로 클라이네 샤이데크까지 오른다. 마지막으로 JB 등산열차로 갈아타고 융프라우요흐에 이르게 된다. 
위 사진은 내려오는 길에 한 컷. 우연히도 기차가 서 있는데 또다른 기차가 달려내려오는 바람에 하나의 기차처럼 찍혔다.
▲ JB 등산열차 인터라켄 동역에서 BOB 등산열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나 라우터브루넨까지 간 다음 WBA 열차로 클라이네 샤이데크까지 오른다. 마지막으로 JB 등산열차로 갈아타고 융프라우요흐에 이르게 된다. 위 사진은 내려오는 길에 한 컷. 우연히도 기차가 서 있는데 또다른 기차가 달려내려오는 바람에 하나의 기차처럼 찍혔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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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세차게 내리던 비는 그쳤다. 구름이 걷히면서 눈 쌓인 능선은 푸른 하늘과 나란히 협곡 사이로 드러났다. 하지만 내 마음의 협곡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여 있다.

여권이 가방 어느 구석에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인터라켄 오스트 역에도 전화를 해보았다. 혹시 등산열차 티켓을 구입할 때 여권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맞다, 그랬던 것도 같다. 남편에게 여권을 주었는데 돌려받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슬그머니 화살이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여권을 잃어버린 장본인으로서 면목 없고, 찌그러져 있어야만 했던 나는 점점 기가 살아 남편에게 덮어씌우기 작전으로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대체 어떤 '바부탱이'들이 여행 다니면서 여권을 잃어버리나 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바부탱이들' 중 하나라니,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오스트 역에서는 여권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여권보다 중요한 것

호스텔의 다른 방 여행자들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산행 길에 일찌감치 올랐다. 남편은 핸드폰을 든 채  영사관이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만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여권이 사라진 걸 걱정하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 와서 융프라우요흐에 못 오를까봐, 벼르던 트래킹을 포기해야 할까봐, 그게 두려운 거다. 들꽃이 땅꼬마처럼 깔린 산자락을 하이디처럼 누벼보고 싶었는데 그걸 포기해야만 한다면, 침대에 엎어져 발길질 해대며 떼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다.

만일 영사관에 연락했다가 당장 베른으로 오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하다. 차라리 여권 잃어버린 걸 몰랐다면 아무 걱정 없이 융프라우를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여권분실 신고를 아예 나중에 하는 건 어떨지 남편에게 넌지시 귀띔해 본다.

우린 아직 여권을 잃어버린 게 아니다, 아직 모른다, 사실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지 않나, 오늘 일정을 무사히 모두 마친 후에 여권이 사라진 걸로 하자, 그때 우리가 발견한 셈 치자, 그러면 우리 일정은 전혀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융프라우도 오르고 피르스트 트래킹도 즐기고,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시 즐거울 수 있다, 차마 이 말까지는 양심상 하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꿀꺽 삼켜야 했다.

5초, 4초, 3, 2,1, 땡!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던 남편은 내 말엔 아랑곳 않고 정각 9시에 영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질문 없이 단순한 답변만 하다가 전화를 끊은 남편은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을 전했다. 나쁜 소식은, 짐작한 대로 베른까지 가야한다는 것. 좋은 소식은, 그게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야호! 융프라우는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 경찰서에 신고를 먼저 해야 한단다. 경찰서를 가려면 오스트 역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트래킹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감하게 경찰서 가는 것을 오후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신 피르스트 트래킹도 포기했다. 경찰서가 문을 닫기 전에 내려와야 하니까, 피르스트보다 시간이 좀 덜 걸리는 코스를 잡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다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내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산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불행 중 다행인가, 아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던가.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투덜거렸더니, 어느 기차역에서 내려야 할지 얼마나 산길을 누릴 수 있을지 아. 무. 것. 도 기약하지 못한 채 무작정 융프라우를 향해 올라가야만 한다. 게다가 내일은 계획에도 없던 베른을 들러야만 한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한국인이 융프라우요흐에 가면 꼭 해야 할 세 가지

융프라우를 향하는 등산열차는 아름다운 차창 밖 풍경을 안겨주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꽃처럼 다소곳한 마을 벵겐이 보이고, 방울을 딸랑거리며 가파른 언덕 위에서 풀을 뜯는 염소들이 지척에 있다. 기차 대신 두 다리를 믿기로 한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행복을 나누고 싶은 양 손을 흔들기도 했다. 우리도 내려갈 때 저렇게 산길을 걸어야지, 푸른 초지를 가로질러 들꽃 사이를 헤치고 노래 부르며 내려가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가슴이 마구 설렌다. 이곳의 산길은 험하지 않아 경사진 산책로에 가깝고, 나무가 우거지지 않아 초지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들이 한 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해발 2061m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서 등산열차를 갈아타고 다시 오른다. 융프라우는 베르너 오버란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이름이고, '요흐(joch)'는 '아래'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융프라우의 바로 아래까지만 가는 것이다.

융프라우요흐에 가까워질수록 절경이 나타난다
▲ 융프라우요흐 가는 길 융프라우요흐에 가까워질수록 절경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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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려 어둡고 습한 동굴을 지나 전망대로 가는 동안 너무나 추워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전망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눈이 부시다. 설원(雪原)이 펼쳐졌다. 새하얀 눈(雪)이 칼날처럼 햇살에 번쩍이는 걸 보니 선글라스를 끼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바깥의 햇살이 따사로워 한결 낫다.

저 아래로 강물처럼 굽이치는 빙하가 보인다. 유럽에서 제일 크고 길다는 알레치 빙하다. 그 길이만도 20km에 가깝고 가장 두꺼운 알레치 빙하의 두께는 900m에 이른다고 한다.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바로 가까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 크기 때문일 게다.

지금도 계속 이동 중인 이 빙하는 1년에 80~90m씩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빙하가 흐르고 흘러 닿은 먼 미래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인간들의 부질없는 기억들을 증언해 줄 수 있을까. 산에서 실종된 연인이 빙하를 타고 흐르다 몇 십 년 후에 젊은 모습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전설처럼.

고개를 돌려보니, 먼 곳까지 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하얀 눈밭에 점점이 줄을 지어 간다. 눈길 트래킹도 괜찮겠지만, 7부 바지를 입은 딸의 여름 운동화는 벌써 눈이 녹아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또 서둘러 돌아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강물처럼 흐르는 유럽 최대의 빙하
▲ 알레치 빙하 강물처럼 흐르는 유럽 최대의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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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융프라우요흐에 오르면 꼭 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알프스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융프라우 구경은 당연한 거고, 내려가는 길에 알프스 산자락을 두 발로 밟아보는 일, 그리고 또 한가지는 컵라면을 먹는 것이다, 그것도 공짜로!

실내 매점에는 우리나라 컵라면이 쌓여 있었다. 한국에서 쿠폰을 챙겨간 덕에 두 개는 무료였지만, 딸아이 것은 따로 돈을 지불해야 했다. 무려 컵라면 하나에 7.5CHF(약 8000원)이라니. 공짜라고 좋아했다가 세 개 값 다 치른 기분이다.  더 이상 스위스에서의 환율계산은 하지 말기로 하자. 그게 내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진즉 깨달았다. 머리카락 노란 서양 아이들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융프라우요흐에서 뜨거운 라면 국물을 추룹추룹 먹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가치를 두기로 한다. 또한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에 컵라면을 쳐들며 건배!

집 떠나와 3일 만에 처음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는 순간이다. 하긴 어제 저녁 뢰스티도 먹을 만 했다. 여권은 잃어버렸지만, 먹고 기운내자는 의미에서 호스텔 부근 식당에 자리를 잡았고, 스위스 왔으니 스위스 음식 한번 먹어보자고 여행 기분 추스르며 뢰스티를 주문했었다. 찐 감자를 잘게 썰어 빈대떡처럼 구운 요리, 뢰스티는 제법 맛이 좋았다. 하지만 한국사람 라면에 댈 게 아니다. 더구나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알프스 산에서 마시는 시뻘건 라면 국물은 뽀빠이 시금치만큼이나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어 준다. 그러니 융프라우요흐에서 컵라면은 꼭 챙겨 드시길.

추위에 떨다 몸이 녹은 여행자들은 여기 저기 퍼질러 앉았다. 노곤하게 밀려드는 졸음을 굳이 떨쳐내지도 않는다. 주위 시선을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배낭을 베개 삼아 드러누운 사람들도 있다. 따뜻한 차 한 잔이 피돌기를 따라 흘러 관절이 마디마디 열리는 시간이다.

환한 빛의 기둥 속에서 빙글빙글 춤추는 먼지 부스러기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잔, 아무 곳에나 자리 잡고 몸을 웅크린 여행자들, 아무도 그걸 탓하지 않는 고요한 풍경. 알프스 산모롱이를 걸어 내려가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것만 같다는 유혹이 자꾸만 눈꺼풀에 무겁게 내려앉는 융프라우요흐에서의 나른한 오후.

눈길 트래킹은 고사하고 조금 걸어보기라도 하고 싶건만 이미 딸의 운동화는 젖어 버렸다
▲ 지금은 여름 눈길 트래킹은 고사하고 조금 걸어보기라도 하고 싶건만 이미 딸의 운동화는 젖어 버렸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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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환율도 그 당시 기준입니다.



태그:#스위스, #융프라우요흐, #알레치 빙하, #베르너오버란트, #인터라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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