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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축물은 재난위험시설입니다. 구조체 내부 열화현상, 부식, 베란다 바닥 슬레브가 부분적으로 붕괴됐으며 철근이 노출돼 있고 콘크리트가 쪼가리가 떨어집니다. 이 건축물을 이용하시거나 통행·주차 하시는 주민여러분께서는 항상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한 건축물에 천안시장의 명의로 붙어있는 안내 표지판이다. 주위를 걷기도 겁날 정도로 섬뜩할 만한데 놀랍게도 이 건물에는 현재 사람이 살고 있고 심지어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90년대 삼풍백화점 등 각종 대형사고가 아직도 생생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화재 그 이후, 변한 게 없는 현장

 

천안시 성황동 86-29번지 일원. 1970, 1980년대 이곳은 천안시에서 가장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지역상권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곳은 점차 정체를 넘어 '고사'의 계절로 접어들었다. 건물 내·외부를 가득 채웠던 점포들은 하나둘씩 비워져 갔고 몇년 전에는 어물전 몇 곳과 낡은 옷가게들만이 이곳이 예전에 시장이 있던 곳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던 2007년 11월 26일 새벽 5시 47분경. 시장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화재로 3140여만 원 정도의 재산피해가 났고 6명이 연기를 흡입, 119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모두 52개 점포가 있었지만 대부분 빈 점포로, 입주 상인들이 많지 않아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 화재가 발생한 지 2년여. 다시 찾은 현장은 믿을 수 없게도 깨진 유리창, 그때 불에 탄 화재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주변 주민들은 붕괴의 위험은 물론, 여름에는 악취가 나고 벌레가 들끓는데다 범죄우려까지 있다며 민원을 토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 당사자인 건물 소유주들과 천안시청은 손 놓고 있고 지역 상인들은 재개발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약없는 재개발만이 해답, '언제까지 손 놓고 있어야 하나'

 

2년여 전 화마가 할퀴고 간 자유시장. 지난 2월초, 문성동 주민센터에는 성무용 시장과 '지역주민과의 대화' 소위 '연두순방'이 있었다.


구도심 특유의 고질적인 민원들이 수건 건의 되는 가운데 한 주민이 자유시장과 관련한 건의를 했다. "몇년 전에 그 건물에 불이 났는데 아직도 잔재를 치워놓질 않아서 보기도 흉한데다 냄새도 나고 벌레도 생기고, 범죄의 우려마저 있다"는 것이었다. 성 시장은 이내 현장을 찾아 확인하라고 당시 주위의 공무원들을 다그쳤다. 기자는 얼마 후 바로 그 현장을 찾아갔다.

 

재개발좀 서두르라고 해 줘, 응?
"하루종일 있어야 사람 몇 지나가도 안 해. 그저 나와 있는 거지 뭐."


화재가 발생했던 자유시장의 한 모퉁이에서 식품점을 운영하는 A씨. 수십 년 전부터 한 자리서 장사를 해 자녀들을 다 키워낸 그 자리가 A씨에게는 삶의 보루와도 같은 듯했다. 가게 내부에 있는 직접 짜 튼튼해 보이는 포마이카 책상, 80년대 나왔던 조미료의 판촉물, 2국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간판 등이 그동안의 세월을 묵묵히 대변해준다.


"불이 났을 때도 우리 가게는 처음 불붙은 곳하고 먼데다 마감이 튼튼해 화재 피해가 거의 없었지. 지금 이 건물에서 장사하는 곳은 나하고 가끔 나오는 저 건너 가게 뿐이야."


이제 자녀를 다 여읜 A씨에게 이 가게는 마치 퇴직금과도 같은 곳이다. 모두들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재개발을 통해 얼마만의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재개발 얘기가 나온지는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재개발은 잃어버린 지갑처럼 언제나 찾을 수 있을까 기약할 수가 없다.


"우리도 사실 불편하고 힘들고, 정말 기다리다 힘빠져 죽겄어. 기자 양반이 시에다가 재개발좀 빨리 해달라고 독촉 좀 해 줘. 응?"

가게를 나와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옛 건물. 천안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현장은 어떤 수용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낮에도 을씨년스런 분위기의 건물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건물에는 여기저기 철근이 튀어나와 있고 습한 날씨 탓이었는지 잿더미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깨지고 그을린 유리. 타다 남은 장작,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 누가 마신지 모를 술병 등은 폐허 그 자체였다. 해빙기를 맞아 날이 풀리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을 지날 때면 자연스레 목이 움츠러들었다.


불안불안해 하며 조심스레 계단을 오르는 도중 보이는 빨래걸이와 보일러 연통이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어서 대충 건물을 훑어본 후 주변을 지나는 이들에게 이곳의 사연을 물었다.


"날이 풀리면 더 불안하지. 아주 흉물스럽기 그지 없다니깐. 많은 사람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있으니 언제나 해결이 될지 말지야."
"재건축을 추진하던 사람이 사고가 나셨다던데…"
"아마 여기 2층에 한 가구, 3층에도 한 4~5가구가 살 거야. 불안하겠지만 형편이 그런 걸 어쩌겠어."
"천안시건 조합이건 정말 발 벗고 나서야 재개발을 할 텐데… 답은 그것밖에 없어. 재개발…"

 

해답은 철거 후 재건축뿐

 

천안시 재난안전과 유만준씨는 매월 한 번씩 소방서와 함께 자유시장을 순찰한다고 밝혔다. 유씨는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이 내려졌다면 위험성이 있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건물이라는 뜻이고 E등급이 내려져야 아주 위험해 철거가 필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조합관계자들에게는 늘 조심해 달라.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 달라고 주문한다"고 밝혔다.

재난안전팀은 기존 재개발 조합 관계자들에게 전년에 1번, 올해들어 1번 공문을 보내 필요한 보수를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현재 사는 사람들이, 또 건물주들이 충분한 보수를 하고 관리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지는 다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물론 사전에 주거인들에 대한 보호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지만 현재 자유시장의 특성상 건물의 보수나 리모델링이 어려운 상황에서 대형사고를 미연에 막는 것은 철거이후 재건축 뿐이라는 것이 주변 주민들과 이해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문제는 답이 재건축이라는 것은 알지만 도무지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사업자의 입장에서는 철거 이후 수익성을 내려면 싼 값에 건물을 매입해 부수고 만들고 수익을 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매입을 고민할 사업가는 없다. 조합원들 역시 다양한 지역에 살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지만 누구하나 손해는 볼 수 없다는 생각만큼은 매한가지다. 이런 위험한 상태의 주거와 방치가 상당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건물주들도 주인의식 가져야

 

우선 대형사고를 예방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면 책임은 일단 건물주들, 조합 측에 귀속된다. 자유시장은 천일시장이나 중앙시장처럼 법인시장의 범주에 속한다. 시장·군수가 재래시장지원관련법에 근거해 지원하는 남산중앙시장, 공설시장, 성정5단지시장, 병천시장 등은 인정시장으로 그나마 원활한 상행위를 위한 시의 행정력이 운용될 수 있는 폭이 있다.


하지만 법인시장은 사유재산이다 보니 시비가 투입되면 곧바로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자유시장의 안전점검 책임자로 지정돼 있는 박재현 지역경제과 유통지원팀장은 "자유시장은 현재 재난관리과에서 안전점검 D등급을 받은 위험상태다. 철거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E등급은 아닌 상황이어서 시정이 함부로 사유재산을 철거할 수는 없는 상황이며 행정법이 아닌 민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므로 시비투입이 곤란하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 안타깝다. 하지만 시는 장사가 잘 되고 상권이 살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 뿐, 리모델링이나 철거 같은 하드웨어적 지원은 하기 어렵다. 유일한 해결책은 재개발이 최대한 신속하게 되는 것이다. 상인들도 시에만 책임을 미루지 말고 사유재산인 만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안지역 정비사업구역 80여 곳, 첫 삽뜬 곳은 '전무'

무너질 듯 불안한 자유시장... 재개발은 다시 맨땅에서 시작해야

정비사업은 기본적으로 기본계획수립→정비계획수립및 정비구역지정 →조합설립추진위원회 승인 →조합설립인가 →사업시행인가 →분양신청 →관리처분계획수립 →관리처분계획인가 →착공 →준공 및 입주 → 이전고시/청산의 순으로 이뤄진다.


자유시장을 포함한 성황동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이 설립 인가를 받은 것은 지난 2002년 9월27일이었다. 당시 토지 등소유자 97명중 79명의 지지로 설립된 조합은 이 설립인가를 받은 것이 공식적인 행보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설립인가는 시공자가 설립되기 전 단계로 사실상 사업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주택재건축사업으로 신청됐던 자유시장은 천안시 2010도시기본계획의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전환하게 됐다. 기존 조합을 해산하고 다시 아무것도 없던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천안시청 도시과 재개발팀의 장세종씨는 "정비사업은 그 특성상 완료시기를 아무도 가늠할 수가 없다. 수많은 이권이 얽히고설키다 보니 법적문제로 비화되기도 하고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하기도 한다. 예를들어 천안 최고의 요지인 신부동 주공2단지의 경우도 96년 추진위가 설립됐었다. 이후 각종 지역에서 80개의 정비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금까지 첫 삽을 뜬 공사현장은 단 한 곳도 없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주거인들의 대형사고도 우려되고 주변 주민, 건물주 누구나 불편해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손쓰기가 힘든 난감한 상황. 매력 없어 보이는 자유시장의 재개발이 이처럼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자유시장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불안한 주거를 하고 불량한 환경을 감수하고 살아야 할까.

덧붙이는 글 | 이진희 기자는 천안아산지역신문인 충남시사신문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충남시사신문(www.chungnamsisa.com) 606호에도 게재됐습니다.


태그:#천안, #자유시장, #재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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