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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주> 지방공무원 6급으로만 16년차인 통합공무원노동조합 부평구지부 박준복(52) 지부장이 33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고향 소청도(인천 옹진군 대청면 소청리)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여러 지방자치단체를 거치면서 한 때는 공직자에게 최고의 영예인 청백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는 공직사회 개혁을 위해 공무원노조를 결성하면서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해임을 당하기도 했다.

 

우여 곡절 끝에 복직한 후 2004년 공무원노조 총파업 이후 무너진 노조를 세우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들어갔다. 후배 공무원들이 사무관(=5급)으로 승진할 때도 그는 16년차 6급 공무원으로 남았다. 권력자의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던 그는 복직 후 6급 팀장임에도 불구, 동 주민센터 무보직으로 좌천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 그가 33년 동안 이어온 공직생활을 접기로 했다. 박준복 지부장은 퇴직 후에도 지방재정 건전성 문제를 연구하고 시민참여예산운동을 폭넓게 벌일 계획이다.

 

여전히 공직사회 개혁을 화두로 삼고 있는 그는 지방권력을 개편하지 않고서는 공직사회의 미래도, 지방자치의 미래도 없다고 했다. 33년 공직에 몸담았던 한 청백리의 이야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소리처럼 다가온다.

 

부정부패 척결과 공직사회 개혁

하지만 청백리는 구치소로 향하고

 

박준복 지부장이 겪게 되는 일 중 지금도 빠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 그 일화는 지방행정권력과 지방토호세력 간 음침한 카르텔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97년 박 지부장은 부평구 사회복지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아동수용시설인 '00육아원' 숙소 개보수 공사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시설장은 지금도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인천은 물론 국내 사회복지업계에서 유력 인사로 거론되고 있다.

 

당시 사건에 대해 박 지부장은 "예산도 없는데 공사를 먼저 시행하고 있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공사비가 2억 4000만원이었다. 자비를 들여서 공사하는 거라면 문제 삼을 게 없지만 어디 그런가? 다 세금으로 메우려고 하는 일"이라며 "그래서 그 공사는 문제가 있으니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시설장이 먼저 공사한 부분은 자기네가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결국 나중엔 2억 4000만원 고스란히 받아갔다. 그런 사람이 제2 건국위원장을 맡았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라고 당시를 들려줬다.

 

그런 뒤 그는 "지금도 지방권력집단의 검은 카르텔은 여전히 존재한다. 역사도 오래됐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지방권력을 재편하지 않는 이상 우리사회의 진보는 어렵다. 당시 사건 때 많은 외부압력을 받았다. 무섭기도 했지만 난 공직자로서 소신껏 일을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덧붙였다.

 

공직자로서 소신 있는 행동은 권력자에겐 늘 눈엣가시였다. 그러니 후배 공무원들이 승진을 할 때도 그는 늘 변방을 맴돌았고 여전히 16년차 6급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시대가 전혀 몰라준 것은 아니다. 공직자에게 최고의 영예인 청백리상을 받은 것.

 

그가 청백리상을 받았을 때 공직사회는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당연한 일이라고 축하했다. 심지어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단체장도 그의 행적을 인정해 직접 청백리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당일 돼서야 알았다고 했다.

 

청백리상은 20만명이 넘는 지방공무원 중 1년에 15명에게만 주는 공무원에게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이 상은 현 행정안전부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시상하는데, 상과 더불어 승진임용예정증서를 준다. 다음에 특진할 수 있는 증서다. 그러나 박 지부장은 상을 수상할 때나 퇴임을 앞둔 지금이나 똑같이 6급이다.

 

앞서 그는 김영삼 정부시절 당시 문민정부가 민원행정 쇄신을 위해 지금의 원스톱행정서비스와 같은 맥락인 '민원 1회 방문 처리제'를 시행할 때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주민이 민원 해결을 위해 관공서를 이용할 때 매번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시행한 제도를 전국에서 제일 잘했다고 하는 공무원에게 주어진 상이었다.

 

2001년에는 부평구 전체 공무원이 참여해 선정하는 '부평을 빛낸 공무원' 첫 회 수상자에 오르기도 했다. 청백리상이 국가가 선정해 주는 상이라면 이 상은 동료 공무원들이 직접 선정해 주는 특별한 상이었다.

 

이 상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이유인즉 그 상을 수상한 사람이 타 지역으로 좌천당하는 일이 발생해 상을 주는 근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동료 공무원들이 상을 줬는데 이상하게도 권력자들은 그런 사람이 싫었는지 타 지역으로 전출해버렸다. 씁쓸한 공직사회의 단편이 아닐 수 없다.

 

공무원노조, 드디어 닻을 올리다

공직사회 개혁, "여럿이 함께"

 

공무원노조 결성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좌천이 시작됐고, 공무원직장협의회가 공무원노조로 전환을 앞두고 있었다.

 

97년 공무원직장협의회법 제정 이후 부평구는 98년 가장 먼저 공무원직장협의회를 구성했다. 공무원직장협의회가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내걸고 공무원노조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2001년 박준복 지부장은 6급으로 사회복지팀장을 맡고 있었다. 6급이라 하더라도 지자체 국ㆍ실ㆍ과의 주무팀장은 공무원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다. 주로 인사ㆍ예산ㆍ감사ㆍ총무팀이 주무팀에 해당한다. 사회복지팀은 사회복지과의 주무팀이었다.

 

그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공무원노조 결성 배후세력으로 지목돼 남동구로 좌천됐다. 동시에 청백리상을 받은 또 다른 공무원도 서구로 좌천당하는 일이 부평에서 발생했다. 지금도 인천 공직사회에서 이 인사는 부당한 인사행정으로 꼽힌다.

 

부평구 주무팀장에서 남동구의 한 동사무소(=동 주민센터) 사무팀장으로 발령받은 그는 남동구에서 본격적으로 공무원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당시 남동구에 산재한 비리를 폭로하고 고발하면서 공무원노조의 필요성을 알려갔다.

 

박 지부장은 "혼자서는 절대로 공직사회를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공무원노조를 결성하기로 맘먹었다. 혼자서는 안 되지만 여럿이 함께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며 "당시 비리 보건소장 퇴출과 성상납 의혹을 받고 있던 지방의회 의장 퇴출이 화두였는데 공무원노조의 힘으로 이 사건을 매듭짓기도 했다"고 말했다.

 

좌천은 오히려 남동구의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밀알이 됐다. 박 지부장이 남동구로 갔을 때 남동구 공무원직장협의회는 거의 와해상태였다. 박 지부장은 와해된 직장협의회를 세워 2002년 3월 공무원노조를 결성했다. 부평구, 서구, 연수구 등 곳곳에서 공무원노조가 닻을 올렸다.

 

노조 설립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엄청난 외부압력이 작용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박 지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공개적으로 회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하에서 만나기도 하고 퇴근 후 한적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회의를 진행하고 뜻을 모았다. 고난도 했지만 공무원노조에 대한 공무원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구속과 해임에도 불구 운동 지평 넓혀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지방권력 개편

 

공무원노조 출범 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4년 11월 총파업이다. 당시 공무원노조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보장과 단체행동권과 단체교섭권이 없는 공무원노조 특별법 폐지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헌데 총파업을 앞두고 그해 9월 박 지부장은 돌연 해임당했다. 이에 대해 박 지부장은 "총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한 계산된 시나리오였다. 총파업의 성과 유무를 차치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탄압의 상징이었다"고 말했다.

 

2004년 해임 당하기 전 구청장실 점거농성을 빌미로 박 지부장은 2004년 1월 구속까지 당한 상태였다. 두 달 뒤 풀려나긴 했지만 청백리상을 받은 그가 감옥에서 감내해야했던 아픔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는 "2002년 공무원노조 결성 후 공무원노조는 지지를 많이 받았다. 공직사회 내부 개혁을 위한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그만큼 집회도 많았다. 그러던 중 내가 여기저기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경찰이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인천시가 나를 중징계(=파면 또는 해임)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2003년 12월 남동구청장실 점거농성을 했다. 그런데 점거농성 했다고 한 달 뒤 나를 구속했다. 그러고 나선 9월에는 해임됐다"고 말했다.

 

비록 해임을 당했지만 그는 복직투쟁을 전개하면서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힘을 준비했고, 지평을 공직사회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로 확장해갔다.

 

그의 활동은 인천시의 사회복지정책 비판과 대안 마련으로, 예산감시는 물론 시민참여예산운동으로까지 넓어졌다. 예산 분석을 배경으로 그는 지방재정 건전성 확보와 지자체 재정자립도 확보 방안에도 애쓰고 있다.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도 지방재정에 관심이 없던 시절 그는 누구보다 앞서 지방재정을 연구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이제 박준복 지부장은 33년 동안 몸담았던 공직사회를 떠난다. 2001년 부당한 인사로 좌천당해 부평구를 떠난 뒤 2005년 겨울 복직해 2008년 8월 부평구로 돌아오기까지 8년. 여전히 6급인 그는 부평구에 돌아온 지 18개월여 만에 공직을 떠난다. 그의 정년은 아직도 8년이나 남았다.

 

박 지부장은 "왜 고민이 없었겠는가? 당장 일자리를 놓는 것인데… 하지만 이제 내 후배들이 상급자인데 나도 불편하고 그 친구들도 불편해진다. 더 남아서 공직사회 개혁에 힘을 보태라고 하는데, 그 일은 그만두고서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33년을 정리하면서 예산과 지방재정 분야에서 시민운동을 하기로 맘먹은 박준복 지부장은 마지막으로 공직사회에 바라는 말을 남겼다.

 

"애석한 현실이긴 하지만 100대 1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인재들이 공직사회로 들어온다. 그런데 그 공직사회는 여전히 상명하달의 수직적인 관료제에 머물고 있다. 단체장이 국장의 고민을 도와주고, 국장이나 과장이 팀장(=계장)을 도와주고, 팀장이 직원을 도와줄 때, 그리하여 공무원이 주민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때 우리사회의 미래는 밝다. 그런데 공직사회는 국장이 단체장 눈치 살펴 줄을 잘서야 하고, 과장은 국장 눈치 살피고, 결국 팀장은 과장, 직원은 팀장 눈치 살핀다. 이래선 안 된다. 후배 공무원들이 줄 잘서는 공무원이 아닌 소신껏 일하는 '목민'으로 일해 주길 바란다. 그래서 공직사회 개혁을 위해 지방권력을 신진세력으로 개편하는 일을 더는 미룰수 없다. 지방권력의 검은 결탁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공직사회 개혁도 지방자치의 미래도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www.bpnews.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백리, #공무원노조, #공직사회, #인천시, #지방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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