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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을 할 때에는 목 디스크에 주의할 것.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놓다 보면 고개가 제 자리로 돌아올 기회가 별로 없다.
▲ 인터라켄 가는 길 스위스 여행을 할 때에는 목 디스크에 주의할 것.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놓다 보면 고개가 제 자리로 돌아올 기회가 별로 없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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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을 향해 달리는 기차의 창문은 그대로 액자틀이 되어 버린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마을이나 호수, 푸른 초지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에.

'호수 사이'라는 뜻의 인터라켄(Interlaken)은 날개처럼 두 개의 호수를 끼고 있다. 기차는 브리엔츠 호수를 따라 달리다 인터라켄 오스트 역에 도착했다. 융프라우, 묀히, 아이거로 올라가는 입구인 인터라켄 오스트 역은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는데, 한국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았다.

스위스에서 최고로 인기 좋은 융프라우요흐와 실트호른, 알프스 등반을 위한 베이스캠프격인 인터라켄과 뮈렌, 벵겐, 라우터브루넨, 그린델발트 같은 마을 등 이 주변 일대를 '베르너 오버란트'라고 부른다.

우리 가족은 먼저 융프라우 등산열차 티켓을 샀다. 한국에서 구입해온 스위스 패스를 보여주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스위스 패스만 있으면 열차, 유람선, 버스, 트램,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른 둘이면 어린이는 무료다. 하여 스위스 패스의 몸값은 어마어마하다. 4일짜리 패스 한 장이 30만원 가까이 되니, (그것도 2등석!) 내 크로스백 속에서 스위스 패스는 가장 가치 있는 귀중품이 된다. 이걸 잃어버리면 발이 묶이는 거다.

묘지에 감동하다

라우터브루넨의 묘지
 라우터브루넨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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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96m의 마을 라우터브루넨에 도착하자마자 떨어지는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알프스 산자락에서 2박3일 묵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예약해 둔 호스텔에 짐을 맡겨 두고 우선 마을 산책에 나섰다. 한여름인데도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선선하고, 옹기종기 모인 예쁜 집들 사이로 장난감처럼 산악기차가 기어 올라가는 걸 보고 있자니 안구정화가 따로 없다.

폭포를 향해 걸어가다 맞닥뜨린 것은 작은 묘지였다. 마을 큰길가에, 경계가 되는 담이나 문도 없이, 묘지라니. 그러나 묘지라고 해서, 어둠이 내리는 순간 인광이 번쩍거린다거나 한 서린 시체의 관이 벌떡 일어날 것 같은 공동묘지를 상상하는 건 금물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스러운 화원(花園)처럼 눈길을 끌었다. 무덤들은 저마다 소박한 돌을 비석으로 삼았으며, 한 평이 채 안 되는 화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빨갛고 앙증맞은 베고니아와 작은 데이지 꽃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꽃병에 꽂혀 있는 게 아니라 흙 속에 심겨져 있다. 이것 참 좋은 방법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추석이 되어 성묘를 갈 때면, 묘원입구에서 파는 조화를 살 때마다 꺼림칙했다. 안 사자니 섭섭하고 생화도 아닌 조화를 매년 무덤 앞에 갈아 꽂자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명절이 되면 무덤 한 곳은 늘 버려진 조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죽어서까지 쓰레기를 더하는 일에 한몫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일본 교토의 공동묘지엔 무덤마다 생화들이 꽂혀 있었다. 조화보다 보기에 아름답긴 했지만, 생화도 금방 시들고 말테니 그것도 관리하기 쉽진 않을 듯싶다.

그렇다면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묘지야말로 그럴듯하다. 물론 화장이 이상적인 건 말할 것도 없지만, 굳이 묘지를 해야 한다면 말이다. 묘지의 꽃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공기 중에 사라지듯 향기를 뿜을 것이며,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때로는 햇살의 세례를 받으며 때로는 구름의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며, 피었다 지기를 저 혼자 대견하게 반복할 것이다.

더욱 부러운 것은, 무덤이 외진 곳에 팽개쳐진 것이 아니라 큰길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언제든지 지나는 길에 다가가 볼 수 있다는 것, 내 친구 내 가족이 죽었지만 바로 내 가까이에 있다는 것, 죽음은 그렇게 삶속에서 함께 한다는 것, 죽음은 멀리하고 피해야만 하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이며 삶의 일부라는 것. 죽음이 아름답구나, 죽음이 선선하구나…. 이 작은 묘지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사라진 여권을 찾아서

빙하로 파인 U자 협곡에 위치한 마을 라우터브루넨에는 많은 폭폭가 있다
 빙하로 파인 U자 협곡에 위치한 마을 라우터브루넨에는 많은 폭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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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려 퍼지는 샘'이라는 뜻의 라우터브루넨은 이름에 걸맞게 크고 작은 폭포들이 많다. 암벽에서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폭포도 구경하고 다시 오스트 역으로 내려가 유람선도 탔다. 유람선은 깡통따개로 딴 캔 뚜껑처럼 동선을 그리며 호숫가 마을들을 거쳐 갔다.

배위에서는, 윈드 자켓을 입었는데도 추위가 느껴질 정도다.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잔뜩 흐리고 비가 금방 그칠 것 같지 않다. 내일 융프라우요흐를 올라가 내려오는 길에 트래킹을 할 계획인데, 날씨가 걱정된다.

라우터브루넨의 호스텔로 돌아와 남편이 체크인을 하는 동안 나는 마당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솔솔 반가운 냄새가 풍겨온다. 1층 부엌에서 한국인 젊은이들이 부산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카레를 끓이고 라면을 끓인다. 라면에 말아 먹을 밥도 보인다! 한국에서부터 제법 먹을 것들을 준비해 온 눈치다. 알뜰한 것들. 여기가 머나먼 외국 땅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캠핑장처럼 아늑하고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라면은 호스텔에서도 파니 나도 사면 된다. 그런데 밥, 밥은 어쩌랴. 다섯 끼 내내 입에 맞게 먹어본 음식이 없는데, 라면에 밥 말아 먹을 수 있다면 남부러울 게 없겠다 싶다. 부엌의 불빛이 너무나 따사로워, 나는 창밖의 성냥팔이 소녀가 되어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여보, 여권!", 남편 목소리에 정신이 화르륵 돌아온다.

그동안 호텔 두 군데를 돌았지만 여권을 보여 달라는 곳이 없었는데 여기는 여권을 요구하나 보다. 크로스백을 열었다. 여권이 보이지 않는다. 여권은 항상 같은 자리에 넣어 두는데. 패스를 주로 쓰느라 여권을 슈트케이스에에 넣어 놨던가? 겉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어라, 여기도 없네? 순간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나는 우산을 내려놓았다. 슈트케이스 속 깊이 손을 넣어 뒤져본다. 없다.

우산이 나동그라졌다. 가방 지퍼를 끝까지 내리고 뚜껑을 살짝 열었다. 짐이 쏟아진다. 에라 모르겠다, 가방을 땅바닥에 벌러덩 눕히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여권이 없어지면 큰일인데,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가방의 내용물은 점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양말, 세면도구는 물론 마침내 속옷까지 다 뛰쳐나온 상태, 그러나 여권은 어디에도 없다! 빗줄기는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스위스 관광열차에는 4개 노선이 있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 가는 길은 '골든패스라인'에 해당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호숫가 마을
▲ 인터라켄 가는 길 스위스 관광열차에는 4개 노선이 있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 가는 길은 '골든패스라인'에 해당한다. 창 밖으로 보이는 호숫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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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스위스, #인터라켄, #라우터브루넨, #골든패스라인, #알프스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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