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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의 폐광 박물관을 견학한 희망제작소 호프메이커스 일행 40명은 고한의 중심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정암사로 향했다. 정암사는 동학혁명에 실패한 동학교도들이 이절에 들어와 부흥운동을 논의했던 곳이다.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의 정골사리, 치아, 불가사, 패엽경 등을 전수하여 귀국, 동왕 14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그 중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유물을 봉안 후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는 도지정문화재 자료 32호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범종각, 육화정사, 요사채, 삼성각, 자장각 등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이 있다. 정암사는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5대 적멸보궁에 속한다.

 

적멸(寂滅)이란 말은 불교에서 범어의 니르바나(Nirvana)를 의역한 말이다. 니르바나를 음역한 것이 열반(涅槃)이고, 의역한 것이 원적(圓寂)이며, 원적의 다른 말이 적멸인 것이다.

니르바나의 원뜻은 소멸 또는 불을 끈다는 것으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꺼 없애고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한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참배하기 위한 법당이다. 적멸보궁은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경지를 표현한 말을 전각으로 삼고 있는 전(殿), 각(閣), 당(堂)과는 구별된다. 여기서는 부처님이나 보살을 모신 건물의 경우 전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궁(宮)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부처님의 분신(진신사리)이 있기 때문에 궁이라고 높여 부른다.

 

수마노탑은 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보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서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7층 모전석탑으로 탑 전체가 길이 30~40cm, 두께 5~7cm 크기의 회색 마노석으로 정교하게 쌓아져 언뜻 보면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

 

마노(瑪瑙)는 원석(原石)이 말의 뇌수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광물 중 석영의 한 가지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이 광물은 매우 아름다운 빛을 갖고 광택이 나는데 홍.흑.백의 세 종류가 있다. 앞에 수(水)는 마노를 용왕(龍王)이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풍수지리학자는 수마노탑의 위치가 대단한 화기명당이라고 한다. 15명의 군왕이 배출될 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사찰 내 모든 건물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산중턱 수마노탑에 모셔져 있기에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주민들이 강원랜드를 이곳에 만들려고 했으나 스님들이 신성한 곳에 카지노를 둘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해 경건한 사찰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인간의 손때가 가장 더럽다고 하던가! 함백산 등걸은 광맥을 찾아 파낸 흔적으로 벌집을 쑤신듯하고 그 폐허가 곳곳에 남아있는데 이곳 정암사는 풍경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강산이다. 더구나 추운 날씨로 인해 관광객도 없어 더더구나 영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여름철에 왔으면 한기와 상서로움을 느꼈을 법한데 모든 게 얼어붙은 겨울철이라 아쉽다.

 

천연기념물 제 73호인 열목어는 담수어종에서는 대형종이어서 몸길이가 70~100㎝에 달한다. 입은 작고 머리 몸의 옆면 등지느러미, 가슴지느러미 등에는 눈동자보다 작은 자갈색 반점이 흩어져 있다.

 

물이 맑아 오염되지 않고 수온이 한 여름에도 20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성어가 숨을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심연부가 있어야 한다. 또한 물이 완만하게 흐르고 자갈이 깔려 있어서 산란장으로 이용될 수 있는 곳이고 수중 산소 함량이 10ppm 안팎이 되는 환경 조건을 갖춘 곳이 아니면 열목어는 살 수 없다. 정암사 계곡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함께 열목어 분포상 세계 최남단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람이 몹시 분다. 추녀끝 풍경소리가 요란하다. 마음속 번뇌가 요동쳐서일까? 정휴스님은 적멸의 즐거움이란 저서에서 말했다.

 

"누구나 삶에 집착하지 않을 때 풍요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자연자체가 되어야 나무들의 속삭임도 들을 수 있고, 흐르는 물소리가 악기가 되어 거문고 소리도 들릴 것이다" 

 

선승들이 흔히 말하는 '물아일여(物我一如)'라는 의미는 미혹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사유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물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로서의 내가 대립하는 둘이 아닌 하나로 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지향하는 절대평등이나 무아나 무심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내를 맡은 원기준 목사는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이란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한다. 우리의 종교는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만, 서로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헌데 그는 이미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를 뛰어 넘은 것 같다. 아예 주지스님께서도 원목사한테 안내를 맡기셨다니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세속인이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정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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