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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수요일(20일)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의 안개처럼,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와 안개비가 온종일 동네를 진 치고 물러나지 않았다. 안개비에 우산을 써도 아랫도리는 촉촉이 젖어 들었다.

 

아침 일찍 거래 은행을 찾았다. 일 년 동안 자투리 생활비를 몫돈으로 만들기 위해 적금을 들었었는데, 그것이 만기가 되었다고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한 푼이 아쉬운 사람이라 만기 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어련히 안 찾아갈까. 서비스가 만능인 시대다 보니 별걸 다 알려 주고, 자꾸 무엇을 하라고 잊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다.

 

은행에서 볼일을 마치니 조그만 상자를 사은품으로 준다. 받을 것을 예상하지 않은 사은품이라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받아 들었다. 은행을 나오면서 무엇인가 싶어 상자를 열어보니 두 개의 치약이 들어 있다. 유용한 소모품이라서 기분이 좋다.

 

조그만 손가방을 들고 나갔기에 넣을 데가 없어서 한쪽 옆구리에 끼고 두 블록을 걸어가야 하는 또 다른 은행에 갔다. 요즘은 모든 공과금을 은행에서 자동이체로 빠져나가게 해 놓아서 통장은 작은 가계부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통장 면이 빨리 꽉 찬다. 통장을 재발급 받아서 다시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니 알뜰시장이 섰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알뜰시장 아파트 단지 안에 일주일에 한 번씩 알뜰장이 선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대형마트가 있는데도 요일을 달리해서 몇 개의 알뜰시장이 열린다.  알뜰 시장의 장소대여료는 아파트 부녀회의 주요한 수익금이 된다. 주민들은 가끔 열리는 장에서 저렴한 가격에 싱싱한 물건도 사고 재래시장처럼 재량껏 깎아 보는 맛도 느끼니 좋고 부녀회는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 좋아 일석이조인 셈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주부가 거리에 펼쳐진 알뜰 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사지 않더라도 쭉 둘러보기라도 한다. 요즘은 시장이 상권을 형성해서 들어온다. 야채파트, 생선파트, 건어물 파트, 먹을거리 파트 등, 봄에는 화원까지 갖춰진다.

 

이렇게 벅적하게 마련되어 있어야 사람들도 붐비지 그중에 몇 파트가 들쭉날쭉해지면 상권은 금방 식어 버린다. 그래서 이 상권이 잘 운영이 되는 팀들은 번성하는데 그렇지 않은 팀은 파리를 날리다가 다른 상권으로 넘어가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제일 번성하는 시장이 들어서는 날이라서 시장이 되어 버린 도로는 금방 아파트 주민들로 북적거린다.

 

물건이 푸짐하게 진열되어 있는 오전 시간이었기에 '톳'이 유난히 싱싱해 보인다. 한 바구니는 삼천 원, 두 바구니를 사면 오천 원에 준단다. 양을 보니 한 바구니만 사야겠다. 하나만 달라고 하는데 누가 옆에서 팔꿈치를 꾹 누른다. 동네 아는 아줌마인가 싶어 쳐다보니 모르는 사람이다. 아줌마가 내게 뭐라고 하는 것 같다. 웅얼웅얼 귓속말이다.

 

"두 바구니 산다고 하세요. 그래서 나누어요"하는 들릴락말랑한 소리다.

 

같은 주부이다 보니 무슨 소리인지 눈치를 챘다. 얼른 정정해서 "두 바구니 주세요"하고 보니 이미 봉지에 한 바구니를 담아놓고 있다. '톳'을 파는 아줌마도 벌써 눈치를 채고 "어째 한꺼번에 담아줘요? 다른 봉지에 따로 담을 까요?" 뻔히 눈에 보이는 일이지만 인사차 묻는다. 우리는 눈치 백단 대한민국 아줌마들이다.

 

"나누어 담아주세요"해서 오천 원을 내고 천막 밖으로 나와 이천오백 원을 돌려받았다. 그 아줌마는 "미안해요, 안에서 돈을 주면 서로 민망하잖아요"라며 "그리고 한 바구니를 사면서 깎아 달라고 하면 안 깎아 주니까…"라고 내게 그런 청을 넣은 것이 걸리는지 아줌마가 자꾸 사족을 단다. 내게도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진심 담아 웃어 주었다.

 

그런 순발력과 용기를 낸 아줌마가 오히려 고마웠다.

 

오백 원의 행복, 내게 다시 돌아오다

 

톳 알뜰시장에서 산 싱싱한 톳

 

뜻하지 않은 오백 원에 행복을 느끼고 걸어오는데 이상하게 무언가 허전하다. 긴장하고 있어야 할 옆구리가 편하다. 은행에서 받은 치약 사은품이 없다. 오백 원의 행복이 날아가고 있었다. 어디에다 흘렸는지, 걸어온 길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통장 재발급을 받느라 은행창구 앞에 그냥 놓고 온 것 같다.

 

확실하지 않은 일로, 또 그 사이에 누군가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 되잡아 두 블록의 그 길을 가려니 아뜩하다. 먼 거리는 아니나 아파트 두 블럭을 지나야 하고 찻길도 건너야 하니 여기까지 온 시간과 거기까지 갈 시간 안에 이미 사은품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비록 내 돈 들여 산 것이 아닌 사은품이지만 일단 받은 것이니 내 물건이다. 아까운 생각에 집으로 발걸음이 잡혀 지지 않는다.

 

안개비에 우산은 갑자기 짐 같기만 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터덜거리고 은행으로 갔다. 문을 열고 그 창구를 보는 순간 낯익은 파란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오백 원의 행복이 다시 파랑새가 되어 내게로 날아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는 잠바 주머니에 사은품을 쑤셔 넣고 '톳' 봉지를 흔들며 집으로 왔다.

 

대한민국 서민 아줌마 이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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