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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개화기를 배경으로 양반과 중인, 천민출신의 의사들의 활약상을 시대상황과 함께 담아 내고 있는 SBS 월화 드라마 <제중원>
 구한말 개화기를 배경으로 양반과 중인, 천민출신의 의사들의 활약상을 시대상황과 함께 담아 내고 있는 SBS 월화 드라마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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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의 시초가 중세의 이발사였다는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의사가 백정 출신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선 최초로 의사 면허를 취득한 외과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실존인물 박서양(朴瑞陽·1887~1940)의 일대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퓨전 의학역사극 <제중원>이 초반의 부진을 딛고 세간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의학드라마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하얀거탑>의 이기원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기대를 가졌던 시청자라면 의학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가 펼쳐졌던 초반부 극의 진행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하지만 <제중원>은 <하얀거탑>과는 달리 수술 장면이나 치료 장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의지'를 담고 싶다"며 "백정이 훌륭한 서양의가 되고, 중인 신분의 여성이 차별을 딛고 여의사가 되며, 개화기의 양반이 의사가 되는 과정을 그릴 것"이라는 홍창욱 PD의 말처럼 <제중원>은 의학이나 의술보다는 개화기를 살았던 세 계급(양반, 중인, 천민)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격변의 시대 속에서 의사가 되었으며 시대적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성 강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의사 황정. 그의 또다른 이름은 소근개(小斤介)다. 근 수가 적게 나가는 개. 다시 말해 개새끼(개의 새끼)다. 광대, 무당, 기생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 천민으로 불렸던 백정을 아버지로 둔 소근개(박용우 분)는 날 때부터 타고난 칼잡이요 바느질장이다(백정들 대부분이 가죽신을 만드는 갓바치 일을 함께 하고 있었으므로 바느질 솜씨도 뛰어 났다고 한다, 소근개가 밀도살에 연루되어 도피하던 중 남의 호패를 손에 넣게 되어 양반 황정이 되었다).

소근개가 타고난 칼잡이에 바느질 대가였기에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이것은 의사 황정의 천재적인 손기술(외과의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을 비유한 것일 뿐 그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오히려 다른데 있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먼저 치료하겠습니까?" (알렌)
"그야 더 아픈 사람이죠." (소근개)

가난 때문에,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 때문에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잃어야 했던 소근개는 의학이란, 무릇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 신분이나 인성에 의해 치료의 순서를 정할 수는 없다는 기본적 도리(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뼈저리게 경험한 터다.

황정과 숙명적 대결을 벌이게 되는 백도양(연정훈)이 그 많은 노력과 투자에도 불구하고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분 높은 사대부의 아들로 태어난 도양으로서는 채득하기 어려운 소양. 즉 의사가 지녀야 할 기본적 품성인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그는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의사 알렌과 함께 수술을 하고 있는 황정
 서양의사 알렌과 함께 수술을 하고 있는 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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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도가 무너지며 서양문물이 밀려들기 시작한 개화기의 조선은 한마디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혼란기라 할 수 있다. 반상의 구분이 사라지고 신분차별이 철폐되는 갑오개혁(1894)은 백정 소근개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같은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알렌이라는 운명적 스승을 만난 소근개는 이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중인에 속하는 통역관의 딸이었던 석란(한혜진)에게도 다르지 않게 적용된다. 구중심처에서 바느질이나 배우고 있어야 할 규수가 서양학문을 배우고 마침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기까지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일찍 실용적 서양문물과 서양학문에 눈을 뜨게 되어 서양의사를 꿈꾸어 왔던 백도양에게는 그리 반갑지 만은 않은 변화였다. 예전 같았으면 감히 말 섞기는커녕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을 법한 근본도 모르는 자(황정 즉, 소근개)와 동문수학하는 것을 수모(?)로 여기는 도양.

아직은 초반부에 지나지 않지만 드라마의 축을 이루고 있는 두 주인공 황정과 백도양의 대결구도는 흥미진진하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황정(박용우)과 천재성은 없지만 부단히 노력하며 황정의 천재성을 끊임없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백도양(연정훈). 그 둘은 마치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처럼 보는 사람에게조차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훗날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될 아름다운 신여성 석란(한혜진)의 사랑을 놓고 벌이는 두 남자의 대결구도 또한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한층 맛깔나게 하는 양념이 아닐 수 없다.

초반부 의학드라마냐, 역사드라마냐 말들이 많았던 <제중원>이 지난 1월 19일 방송된 6회에서 드디어 수술다운 수술 장면을 보여주었다. 소근개의 뒤를 쫒던 정포교가 머리를 크게 다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머리뼈를 뚫는 수술을 해야 했던 것이다.

잠행을 나온 고종마저도 얼어붙게 했던 긴박한 수술이었지만 전기충격기(Electricity)를 이용한 심폐소생술 장면에서는 '일렉트리시티'를 '일렐레...'라고 불렀던 황정의 순박한 모습이 오버랩되어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알렌과 황정의 수술 덕에 목숨을 구한 황포교. 그는 황정의 정체가 백정 소근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그쳐 묻는 백도양의 질문에 함구한 채 행방을 감추고 만다. 황정의 진심을 다한 치료에 육체적인 상처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치유되고 변화된 첫 번째 환자인 샘이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세상. 돈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의해 새로운 귀족 계급이 생겨나는 세상, 그런 귀족계급에 의해 의료서비스와 질이 차등 적용되는 세상, 인술보다는 돈벌이에 관심이 많은 의사들이 판치는 세상...

이런 불행한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백정 출신 의사와 기생 출신 간호사, 중인 출신의 여의사가 활약 했던 이 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격변기 속에 신분혁파와 함께 큰 꿈을 이루어낸 우리 선조들처럼 우리라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소 잡는 칼 대신 수술용 메스를 잡은 황정. 신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사의 길로 접어든 황정의 앞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할 듯하다. 의사로서 독립운동가로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황정과 그와 함께 역사의 회오리 속을 해쳐 나왔던 <제중원>사람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태그:#제중원, #백정, #박용우, #연정훈, #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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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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