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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주택 마당에 있던 동자복이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우뚝 서 있다.
▲ 새단장한 동자복 주변 비좁은 주택 마당에 있던 동자복이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우뚝 서 있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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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쯤 전에 찾았던 제주 건입동 동자복을 지난 17일,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내뱉은 말은 "아따, 시원허다!"였다. 아무리 다른 지역보다 따뜻한 제주도고, 날이 따뜻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겨울의 한 가운데인 때이거늘,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고 생각할 일이다.

동자복은 제주항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건입동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주변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제주읍성을 중심으로 제주시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성에 인접한 이곳도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주해 온 주택지임을 알 수 있다. 10년 전 이 동네는 그닥 크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고 삐뚤빼뚤한 골목들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언덕배기에서 제주항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큰 도로를 내기 시작하더니 거기에 바로 붙어 있는 집도 허물어졌다. 그 주인공이 바로 동자복을 좁디 좁은 마당 한 켠에 몰아세우고 있던 집이다.

그 좁은 공간에서 4m에 육박하는 거구의 석상을 한 화면에 담으려고 용을 쓰던 때를 생각하니 기쁘기 그지 없었고, "시원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생각해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이곳을 드나든 사람이 적지 않았을 텐데 이 집에 살던 사람도 그가 주인이었건, 세들어 살던 사람이었건 간에 꽤 편치 않았을 터. 그래서 혹시나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며 오래 있지 못하고 빠져나왔던 옛날 일이 떠오른다.

큰 덩치와 머리에 비해 작은 손이 앙증맞다.
▲ 정면에서 본 동자복 큰 덩치와 머리에 비해 작은 손이 앙증맞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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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훑어보며 10여년만의 조우를 동자복에게 알린다. 가장자리를 따라 타원으로 새겨놓아 수영선수의 물안경을 보는 듯 툭 튀어나온 두 눈, 길고도 큰 코와 귀, 그와 반대로 짧은 선으로 가볍게 처리한 슬며시 웃는 입까지. 앞서 말했듯 미륵불은 변함없고 덧없이 세월만 흐른 듯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면 나역시 미륵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마는데, 그것은 순전히 손 덕분이다. 옆면 뒤끝에서 시작된 어깨 선을 타고 내려오다 앞면에서부터 직각으로 접힌 팔의 끝에 달린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단정한 자세인데도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먼저는 손의 크기를 들어야겠다. 몸 전체에 견주어서도 작은 것이, 몸의 4분의 1이나 차지하는 큰 머리에 견주면 그야말로 아가 손이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오동통하게 살집이 붙은 둥근 손에 그어진 손가락의 선들까지 더해져 길창덕이나 윤승운이 그려낸 만화주인공의 손처럼 '명랑'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997년에 펴낸 <경남지방 장승 솟대신앙>의  설명에 따르면 "<동국여지승람>에 '만수사는 일명 동자복사로, 건입포 동안(동쪽언덕)에 있다'고 하였으며"라 하고 그밖에 몇몇 기록의 예를 더 들고 있는데, 이 글귀만으로도 원래 '만수사' 또는 '동자복사'라고 일컫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자복은 '재물(資)과 복(福)을 가져다주는 동쪽의 미륵불'이란 말인데, 그런 취지에서 본다면 이런 '명랑'한 이미지는 찾아와 비는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운 존재로 다가왔으리라.
하지만 '명랑'만으로 기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시력 좋아 뵈는 눈이 쏘는 강직한 에너지와 두 손 맞잡고 허리 굽힌 사람의 4배나 되는 키와 덩치는 이를 만회해 주는 듯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한없이 부드럽고, 멀리 나아가면 우뚝 서서 세상을 똑바로 이끄는 그런 존재가 늘 그리운 세상이다.

툭 튀어나온 눈이 인상적이다.
▲ 옆에서 올려다 본 동자복 툭 튀어나온 눈이 인상적이다.
ⓒ 이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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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입포 동쪽 언덕이라고 해서 건입포(현재 제주항)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자복이라는 이름의 미륵불이 또 있는데, 건입포와는 거리가 먼 동한두기라 부르는 용담동에 있다. 이 미륵불도 동자복과 마찬가지로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아 제주읍성의 바깥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돌하르방이 지닌 읍성 수호의 기능을 이미 이 두 미륵불이 지니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서자복의 곁에는 남자 성기 모양의 석상이 있어 자식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신앙처였음을 알게 한다. 현재는 '용화사'라는 이름의 절이 모시고 있으나 위에 언급한 책에 따르면 '해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불상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고려 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두 미륵불과 제주도의 또다른 석상인 돌하르방과 견주어보면, 벙거지모양의 모자(이는 후대인 조선 후기에 새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므로 논외로 함), 튀어나온 눈, 선으로 처리한 웃는 입, 길게 늘어선 귀의 생김새, 두 손을 들어올린 점, 다리를 생략한 점 등이 비슷하다.
특히, 대정읍의 경우에는 두 손이 맞붙어 있는 것이 2기 있다. 두 눈에 타원의 선을 두른 것은 모든 돌하르방에 해당한다.

제작된 시기와 도내에서 보기 드문 큰 규모의 석상이라는 점을 볼 때, 그보다 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따위의 다른 석상에 크건 작건 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모쪼록 그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석상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길을 되돌아 온다.


태그:#동자복, #서자복, #제주도여행, #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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