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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완도 금일)는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쉰다. 하나의 점으로 보이던 조그맣던 섬이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올 때면 내 가슴에는 알 수 없는 파도가 일렁인다. 파도의 물결이 스치고 지나간 걸까. 가슴이 젖어드는 기분이다. 뒤뚱거리는 배위에서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써본다. 어느새 바다는 카메라 렌즈 뚜껑을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오후가 되자 섬은 생기가 되살아난다. 햇살을 듬뿍 받은 바위섬은 환하게 빛을 발한다. 6일 오후 12시56분, 거대한 상선이 계속 따라온다. 바람의 느낌이 좋다. 배(제3은성호)는 순항하고 있다. 선장(56·조태원)은 축하전화 받기에 바쁘다. 새로 만든 배를 보려고 지인들이 여수 소호동의 홍합 작업장에 많이 찾아왔다고 한다.

 

심신의 균형이 깨지고 힘이 쏙 빠져나가다

 

시선을 돌리면 마주하는 건 섬이다. 다도해라지만 이리도 많은 섬을 만난 건 처음이다. 13시27분 갑자기 파도가 거세진다. 배는 두려움에 놀란 사슴처럼 날뛴다. 선체가 좌우로 기우뚱대자 허리에까지 충격이 전해져온다. 하루 종일 뱃전에 기대어 흔들리다보니 뱃속이 매스껍고 울렁거린다.

 

새로운 항해길이라 결코 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미지의 세계를 한걸음씩 나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가보다. 물론 오래 전 일이지만 다들 나름대로의 경험들이 있다고는 하나 이 항로의 대부분은 처음이나 매한가지로 낯설어 보였다. 어려움을 헤쳐 나갈수록 기쁨도 더해진다지만 예상치 못한 파도를 만날 때면 심신의 균형이 깨지고 힘이 쏙 빠져나갔다.

 

고흥의 나로도가 멀리 보인다. 한 선원(김종선)이 "처음 이런 배를 타보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여객선을 몇 차례 타보기는 했으나 이렇게 긴 여정의 항해는 처음이다.

 

배는 파도와 갯바람도 시를 쓴다는 시산도 앞바다를 지나고 있다. 시산도는 지형이 활모양으로 생겼으며 고흥군 도양읍 시산리에 딸린 섬이다.

 

"시산 바닥은 거칠어 사고가 많이 난데여~"

 

밀물이 밀려오는 가운데 역풍을 만났다. 이곳 지형에 익숙한 안경수씨가 선장으로부터 조타기를 건네받았다. 3~4m의 파도를 뚫고 배는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놀란 사슴이 이렇듯 발광을 했을까. 속이 울렁거린다. 파도와 정면으로 부딪힐 때면 그 울림이 쿵쿵~ 온몸을 후려친다. 창자가 꼬이고 정신이 아득하다. 이제야 배를 탄 느낌이 온몸에 전해져 온다.

 

"와따~ 여기가 신산 바다쪽인디 바람이 무지하게 불어부네."

 

또 다시 키잡이가 바뀌었다. 이제야 배가 안정감을 되찾기 시작한다. 파도는 여전하다. 고흥 앞바다는 김양식장이 꽉 메우고 있다. 항로를 쉬 찾기가 수월치 않았다. 어렵사리 항로를 찾아냈다. 양식장의 면적이 어마어마하다. 검은 김발이 바람에 넘실댄다.

 

정원에 가져다놓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다도해의 섬들

 

고흥앞바다에 접어든 14시20분경 바람이 잦아든다. 미역양식장과 톳 양식장이다. 선속 8.2노트(kn), 배는 약15km/h의 속도로 달린다. 이제 어려운 고비는 넘긴 듯하다.

 

햇살을 받은 주상절리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흰 구름도 내 마음인양 섬 위에 머문다. 고흥의 섬들은 아름답다. 김양식장의 김발이 물위에 떠있다. 궁금하던 차에 김종선씨가 "해태(김)는 엎었다 뒤집었다 해야 된데요, 그래야 파래 같은 것이 김발에 안 붙는다요"라며 궁금증을 풀어줬다. 김양식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멀리 고흥 나로도가 보인다.

 

"저 섬 예쁘죠? 뚝 떠서 시골집 마당에 옮겨다 놓으면 좋겠는데요."

"평수가 솔찬할건디..."

 

다도해의 섬들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정원에 가져다놓고 싶을 만큼, 아기자기하고 오묘했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경관이 아름다운 고흥 봉래면의 수락도 근처를 지나간다. 섬을 지나면서 보는 풍광은 시시각각 변한다. 이제 손을 길게 뻗으면 닿을 듯 고흥이 지척이다. 16시07분 고흥반도와 나로도를 연결하는 연륙교를 통과했다.

 

오른편 멀리에서 봇돌섬(형제섬)이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고흥 남열리 마을과 남열리 해수욕장이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제 잠시 후면 배는 낭도, 사도, 추도를 지나갈 것이다. 배는 사도를 안고 돈다. 사도는 모래가 아름답고 바다가 갈라지며 공룡 화석지가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명소다. 해변에는 성큼성큼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은 거대한 공룡 두 마리가 보인다.

 

섬에서는 섬을 볼 수가 없다

 

백야도 해상이다. 목적지가 가까워져온다. 지금 뭍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배(제3은성호)의 갑판을 가로질러 밧줄을 묶고 태극기와 색색의 깃발을 내걸었다. 깃발이 해풍에 펄럭인다. 음악소리도 높였다. 배는 서서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

 

섬에서는 섬을 볼 수가 없다. 섬 그 아름다운 자태를 제대로 보려면 바다에서 섬을 봐야 한다. 바다에서 바라본 섬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고혹적인 매력이 담뿍 담겨 있다. 낯선 항해 길에서 만난 이름 모르는 수없이 많은 섬들, 아침부터 어둠이 내리는 순간까지, 눈보라 속에서, 눈부신 햇살 속에서, 잿빛 구름 속에서도 섬은 곱디고운 모습으로 늘 그렇게 다가왔다.

 

도시의 불빛이 아름답다. 여수 소호동이다. 배는 선속 8.3노트(kn)의 속도로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6일 08시57분 해남의 어란 포구를 출발한 제3은성호는 18시29분에 여수 가막만 항도마을 선착장에 닻을 내렸다. 장장 9시간 32분의 대장정이었다. 삶의 애환과 정이 가득한 포구로 돌아온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항해, #해남 어란, #여수 가막만,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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