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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씨에 탑골공원 삼일문도 떨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원을 찾은 몇몇의 어르신들이 건물을 비껴 찾아든 햇볕으로 해바라기를 하셨다. 여성문화유산연구회의 '여성의 눈으로 서울을 걷자' 답사일이다. 탑골공원으로 해서 인사동 근처를 돌았다. 주제는 '여성과 독립운동'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여성들의 발자취들이 기록물들로 남겨져 제법 눈에 들어온다.

어르신들은 아침 일찍 부터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와 서성이고 있었다.
▲ 탑골 공원 어르신들은 아침 일찍 부터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와 서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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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종로 2가에 있는 탑골공원은 일명 탑동공원, 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한다. 1992년에 파고다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이 되었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는 흥복사가 조선전기에는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 중종 이후 빈터로 남아 있던 것을 고종 때(1897년) 영국인이 설계하여 공원으로 꾸며졌다. 당시 고종은 백성들을 위한 장을 만들어 주자는 취지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도시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시청, 광화문 광장 같은 개념인데, 당시 파고다 공원에서 최초로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도 열렸다고 한다. 물론 정부의 탄압이 뒤따랐다. 시청, 광화문 광장도 개념만으로 시민광장임을 강조하지 말고 민중의 언로가 자유롭게 트이는 진정한 광장으로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공원 안에 있는 팔각정. 3.1독립운동 때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
▲ 탑골공원 팔각정 공원 안에 있는 팔각정. 3.1독립운동 때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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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의 팔각정은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곳이다. 시민의 광장이었기에 3·1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다. 원래 팔각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왕실과 관련된 건물에만 짓는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이곳의 현대식 단청은 나중에 남산 팔각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공원 안에는 국보(원각사지 10층 석탑)도 있고 보물(원각사비)도 있고, 문화재와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여러 기념탑들도 있고, 소리를 내고자 모여드는 사람도 있었다.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을 투척한 오물이 이곳 화장실에 있던 것이라고 누군가 얘기를 한다.

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삼일문 왼쪽에 육의전 터 표지석이 있다. 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 등 여섯 종류의 상품을 팔던 국가공인 상점 거리의 터라고 적혀있다.

팔각정 바로 뒤에 세워져 있다. 공원이 원각사 터이고, 세조 때 원각사 안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팔각정 바로 뒤에 세워져 있다. 공원이 원각사 터이고, 세조 때 원각사 안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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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옆길이 바로 인사동이다. 종로 2가 로터리에서 시작되는 인사동 길로 접어들자마자 왼쪽으로 조그만 공터가 길 안쪽으로 나있다. 그곳은 1922년에 세워진 조선극장이 있던 자리로 토월회의 창립공연 등 한국 영화 연극사에 큰 공헌을 하였던 곳인데 1936년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있다.

인사동길 입구 왼쪽에 조그만 공터가 있는 곳이다. 회원들이 표지석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다.
▲ 조선극장 터 인사동길 입구 왼쪽에 조그만 공터가 있는 곳이다. 회원들이 표지석 앞에서 해설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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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인사동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승동교회 안내판이 나온다. 승동교회는 조선시대의 교회 건물을 아직 간직하고 있고, 3·1운동 때는 이 교회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났으며, YWCA가 이 교회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교회 안에 3·1 독립운동 기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899년에 지었다는 승동교회당. 개보수를 거쳤지만 건물의 기본적인 형태나 구조는 변함이 없고 보존상태도 좋단다.
▲ 승동교회 1899년에 지었다는 승동교회당. 개보수를 거쳤지만 건물의 기본적인 형태나 구조는 변함이 없고 보존상태도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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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를 나와 다시 인사동 길을 걸어 오르다보면 인사동 4거리가 나온다. 오던 길에서 왼쪽 골목길로 쭉 걸어 들어가면 태화빌딩이 있다. 그곳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장소인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이 있던 자리다. 조선 전기에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이었던 적도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이완용의 소유였다가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인수해 태화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지금은 기독교 태화복지관 건물이 되었다. "이완용이 살던 곳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곳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해설사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려 본다.

지금은 기독교 태화복지관 건물이다. 중종반정 시기에 '태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단다.
▲ 태화관 터 지금은 기독교 태화복지관 건물이다. 중종반정 시기에 '태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자리이기도 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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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빠져 나오니 종로타워 뒤편 공터가 나온다. 그 앞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2층 한옥집이 보인다. 이문설렁탕집 간판이 걸려있다. 해설사가 '근우회터'였다고 알려준다. 현대식 건물들 뒤편에 이런 오래된 한옥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곳이 여성운동의 모태가 되는 근우회와 연관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추위에 떨던 우리들은 근우회 보다는 뜨끈해 보이는 설렁탕간판에 눈길이 더 머물렀다.

높이 솟아 있는 종로타워 뒤편에 있다. 지금은 '이문 설렁탕'집이다.
▲ 근우회 터 높이 솟아 있는 종로타워 뒤편에 있다. 지금은 '이문 설렁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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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이전에 이미 여성들의 지위향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다. 1898년 북촌의 양반집 부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찬양회다. 그들은 '남녀가 똑같이 태어났는데 왜 여성들이 남성에게 예속되어 있는가' 하면서 '여권통문'을 신문에 올렸다고 한다.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하고 전통사회에서 벗어나 남성들처럼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민립여학교인 순성여학교를 태동시켰다.

비록 주축은 양반계층의 부인들이었지만 참여자는 모든 신분계층의 여성들에게 열려 있었다한다. 일부 남자들은 여기에 동참을 했지만 그들은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즉 여성 개인의 발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엄마가 배워야 그 자식에게도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세대재생산자'로서의 엄마 역할을 강조했다고 한다. 가부장적 시대를 내재화하며 살아온 남자들의 각성이 쉽게 바뀔 수는 없었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또 1919년 2월경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만들어져서 '우리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자' 했다고 하는데 이 선언문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아직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수레바퀴는 혼자 달리지 않는다. 독립운동을 남성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여성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이런 각성들을 통해 힘을 모으면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하나로 뭉쳐 여성 항일구국운동 및 지위향상운동을 위한 단체를 1927년에 결성했는데 그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안에는 '터'들의 집합소였다.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인쇄소다.
▲ 보성사 터 조계사 뒤편 수송공원 안에는 '터'들의 집합소였다. 보성사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인쇄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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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터였다는 이문설렁탕 골목길을 빠져 나와 길을 건너 종로구청 쪽으로 방향을 잡고 찾아든 곳은 조계사 뒤편에 있는 수송공원이었다. 공원 안은 '터'들의 집합소 같았다. 보성사 터, 보성학교 터, 중동학교 터, 대한매일신보 터, 숙명여학교 터의 표지석들이 공원 안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었다.

보성사는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곳이란다. 당시는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는 보성사를 폐쇄시켰고 1919년 6월 28일에 불을 질러 버려서 터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수송 공원 안에 있다. 탑 아래 양각 되어 있는 곳을 보면 당시 보성 학교 안에 인쇄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나무 옆 지붕만 보이는 이층 건물이 보성사다.
▲ 보성사 기념탑 수송 공원 안에 있다. 탑 아래 양각 되어 있는 곳을 보면 당시 보성 학교 안에 인쇄소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나무 옆 지붕만 보이는 이층 건물이 보성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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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는 "3·1운동 당시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남성들 못지않았습니다. 아마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그렇게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퍼져 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역사 발전에 여자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 하겠지만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지위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사실 OECD 국가들 중에서 그 지위가 거의 최하위에 속해 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우리 여성들은 여러 방면에서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단다.

10회에 걸친 '여성의 눈으로 서울을 걷자'는 오늘로 막을 내렸다. 조계사 경내를 가로질러 길을 건너서 다시 인사동으로 들어왔다. 그동안의 시간들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해 음식점에 자리를 잡았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나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찮게 여겨져 사라지고 있는 여성들의 문화유산을 찾아 발품을 팔고, 여성의 입장에 서서 재해석해 다시 새기게 해준 여성문화유산연구회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태그:#탑골공원, #보성사 터, #근우회,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인사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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