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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 학생들이 '나의 겨울방학'을 주제로 영어작문을 하고 있다.
 서울 미아동 영훈초등학교 학생들이 '나의 겨울방학'을 주제로 영어작문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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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저출산 대책으로  만5세 입학을 들고 나왔다. 찬성하는 엄마들은 유치원비가 줄어들고, 대학교육을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마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엄마들은 방과 후 학원비가 늘어나고, 대학 입시나 취업 시기에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염려한다.

육아기간이 끝나 아이가 학생이 되면 재취업을 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거꾸로 사는 엄마도 있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오히려 직장을 그만두는데, 하루 종일 아이 주변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헬리콥터형 엄마'가 되기 십상이다.

나의 사촌언니도 딸아이가 학생이 되자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는데, 외국어와 특기 적성 교육을 공립학교보다 강화하는 편이라 학교 수업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엄마가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영유아기 때는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긴 뒤 맞벌이를 하고,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엄마가 직접 관리하겠다는 전략 하에 사촌언니는 재택근무로 일을 전환했다. 본격적으로 아이 교육에 공을 들여야 하는 시기에 직장에 다니게 되면 여러 모로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론이다.

만 5살짜리 아이가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다?

만5세 입학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의 결과물이다. 유치원 3년을 보내고 여덟 살에 입학한 아이도 엄마가 나서야 할 일이 많은 현실을 모르거나 모른 체하는 것이다. 출산을 장려하기는커녕 저출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할 수 있는 사교육비 문제를 우리 사회에 또 한 번 회자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을 뿐이다. 미래기획위원회의 주장은 초등학교 입학을 1년 당기면 보육비가 줄어들어 경제적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당장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누가 돌볼 것인가? 설마 만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알아서 숙제와 복습을 마치고, 시간 맞춰 학원에 갔다 오고, 스스로 간식을 챙겨 먹은 다음, 어른들이 퇴근할 때까지 얌전히 예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주장할 미래기획위원이 혹시 있을지 궁금하다.

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아이나 부모에게 본격적인 경쟁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초, 중, 고 교육은 대부분 대학 입시를 위한 기나긴 수험체제에 진입하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만 5세에 입학한다면, 그보다 2~3년 전부터 초등학교 입학 준비에 돌입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46개월인 내 딸아이는 지금이라도 한글과 간단한 산수 정도는 가르치기 시작해야 한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학교에 보냈다가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민폐 끼치는 학습부진아로 낙인찍히기 딱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치원과 학교는 가르치는 방식이나 내용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놀이와 경험 중심으로 배우는 유아교육을 받아야 될 시기의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앞당겨 실시하겠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적기교육을 받을 기회를 앗아가는 일이다. 아이들은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입증되지도 않은 경제효과를 이유로 입학 시기를 당기는 것은 성급하다. 요즘 아이들이 이전 아이들에 비해 발달이 빨라서 학습 능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조기입학을 고려하는 것이 유아교육 현장에서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면 모를까.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양육비를 절감하는 차원에서, 여성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서라면 나는 반대한다.

적어도 내 주위 사람들 가운데 다섯 살 아이를, 그것도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오후 내내 혼자 방치해 둘 부모는 없다.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아마도 어른들이 퇴근하기 전까지 이런 저런 학원이나 과외를 전전하며 오후 시간을 보내게 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비는 더 늘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정규직 일자리가 부족한 이 나라에는 과외비를 벌기 위기 위해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이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아이들도 나이로 서열 가린다

서울 노원구 태랑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엄지뉴스 휴대폰 전송사진 #5505>
 서울 노원구 태랑초등학교 입학식입니다. <엄지뉴스 휴대폰 전송사진 #5505>
ⓒ 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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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나는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반대한다. 딸아이는 네 살인데, '놀이터 나이는 다섯 살'이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난 다섯 살짜리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고 한 살 어린 아이는 끼워주지 않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할아버지가 꾀를 내셨다.

"쿠하야, 음력으로 너는 다섯 살이야. 앞으로 누가 몇 살이냐고 물어 보면 다섯 살이라고 해라."

그 뒤로 아이는 놀이터에서는 반드시 "음력으로 다섯 살"이라고 하고 언니들 틈에 섞여서 잘 논다.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 보면 알겠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서로 나이부터 확인한다. 한 살만 어려도 "까불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서열과 호칭을 정해 놓고 놀기 시작한다. 어제 친구 돌잔치 자리에서도 그랬다. 쿠하가 다섯 살이라고 소개하자, 한 아이가 바로 "나는 여섯 살이니까 언니한테 까불지마"라고 했다. 상황이 이런 데 교실에서 만나면 어떻게 될까?

나이 차이나는 아이가 동급생으로 어울려 노는 게 평탄할 것 같지 않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전쟁이 끝나고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서너 살 많은 형과 아우가 같이 입학했다고 한다. 1950년대 농촌이었고, 가난해서 사교육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 시절이니 학교가 파하면 다 같이 논두렁에서 뛰어 놀며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요즘처럼 한 살 터울도 서열을 가리는 분위기에서는 어림없는 옛날 얘기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만 5세 아이는 부모가 선택적으로 조기입학을 고민하면 될 것이고, 맞벌이 부모가 아이를 서둘러 무상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면 역시 고민해서 결정하도록 문을 열어두면 될 것이다.

학제를 개편하는 일은 한두 해 혼란스럽고 말 일이 아니다. 정책 입안자들은 단계적으로 숫자를 조정하여 큰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홍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당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학업을 시작하는 시기에 정서적으로 자신감을 잃거나 위축되면 두고두고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어른들은 최소한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하게 해서는 안 된다.


태그:#조기입학, #5살 입학, # 서열 , #방과 후 , #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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