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가 미쳤나봐 자존심도 없는지, 너에게 돌아가 쳇바퀴 돌듯이.' - 2PM 노래 'Again & Again' 중.

10대 때 그만큼 했으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미쳤'는지, '쳇바퀴 돌듯이' 10년만에 아이돌 팬질을 시작한 20대 누나팬이 여기 있습니다. 나름대로 파란만장했던 '빠순이의 추억'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팬질 보고서'를 공개합니다. <기자 주>

"너 그러다 정말 망한다."

남자친구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미쳤네. 미쳤어." 

내 '과거'를 아는 친구들의 반응은 더 격하다. 어릴 때 그만큼 했으면 됐지 나이 먹어서까지 왜 그러느냐는 거다. "너 요즘 많이 힘드냐"며 측은해하기도 한다. 차마 엄마에게는 지금의 내 '상태'를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시도 때도 없이 '그들' 생각이 난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고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도 재미가 없다. 어서 집에 가서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싶은 생각뿐이다. 급기야 이런 글까지 쓰고 있다. 

정말이지, 이럴 줄은 몰랐다. 스물여섯 나이에 아이돌에 빠질 줄이야.

그 때, '오빠들'은 내 전부였다

기억나는가. 96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캔디>
 기억나는가. 96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캔디>
ⓒ SMTOWN

관련사진보기


그래, '전적(前績)'이 없었던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3년 내내 나는 '그냥 빠순이'였다. 머릿속에는 늘 '오빠들' 생각밖에 없었다. 팬미팅 한다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기억, 그리 '개고생'을 해서 올라가서는 정확히 손톱만한 크기로 보이는 '오빠들'을 보고 울었던 기억(그 넓디넓은 잠실운동장 3층에서 선수들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역시나 무대와는 너무도 멀었던 콘서트에서 3층 관객석에 앉아 목이 터져라 "강타 오빠, 사랑해요"를 외치던 기억.

혹시라도 부산에 공개방송을 오는 날이면 플래카드와 하얀색(H.O.T 팬클럽을 상징하는 색) 우비와 하얀색 풍선을 챙겨 아침부터 기다렸던 기억, 매일 같이 초록색(H.O.T 멤버 강타를 대표하는 색) 편지지에 일기를 쓰듯이 오빠에게 편지를 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방 한 가득 벽지처럼 붙어있던 브로마이드도. 참으로 오글거리지만 그 때 오빠들은 내 전부였고, 세상은 오빠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보라, 저 하얀풍선의 물결을. 저 속에 나도 있다(2000년 팬미팅 때).
 보라, 저 하얀풍선의 물결을. 저 속에 나도 있다(2000년 팬미팅 때).
ⓒ SMTOWN

관련사진보기


지금은 가수들이 예능활동도 꾸준히 하다 보니 음반 활동을 하든, 안하든 일 년 내내 볼 수 있지만 그 때는 일 년에 몇 달 정도 '공백기'라는 게 있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공백기는 말 그대로 '공백'이었다. 거의 활동을 안했다. 활동을 해도 그리 활발히 하지 않았다. 신인이면 몰라도 H.O.T 급(?)정도 되면 '신비주의'가 강했다. 방송에 잘 안 나왔다

그 때는 또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게 아니라(고1 때 처음으로 집에 인터넷을 달았다) 활동을 안하면 이건 뭐, 오빠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부산에 살았으니 더욱 그랬다. 가끔씩 서울에 있는 숙소에 갔다 오는 '열혈팬' 친구를 통해 안부를 듣는 정도? 그 친구가 서울에 갔다 오는 날에는 모두가 그 아이의 반으로 모였다.

오빠들은 자주 볼 수 없어도 팬질은 정말 열심히 했다. 아니, 어쩌면 신비로워서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더욱더 '우상화'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굴 한 번 보는 것, 목소리 한 번 듣는 게 소중했다.

'빠순이질'은 어릴 때나 하는 건 줄 알았다

'씨랜드 참사'에 대해 노래한 4집 <아이야!>. H.O.T는 매 앨범마다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곡을 타이틀로 했다.
 '씨랜드 참사'에 대해 노래한 4집 <아이야!>. H.O.T는 매 앨범마다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곡을 타이틀로 했다.
ⓒ SMTOWN

관련사진보기


영원할 것만 같았던 팬질도 고등학생이 되자 시들시들해졌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서울로 대학을 와서는 오빠들보다는 남자친구가 더 절실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빠순이질'은, 어릴 때나 하는 거니까.

"여자 친구 없다"고, "팬 여러분들이 우리 여자 친구"라고 하던 오빠들이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와 "완전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매력발산'을 해도, '우리는 오빠들을 믿는다'며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열애설이 '사실은' 사실이었다는 게 밝혀져도, 예능이라는 예능에 다 나와서 '저렴하게' 망가져도, 심지어 좋지 않은 소식으로 '사회'면에서 보게 돼도 이 모든 게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도 오빠들도 나이를 먹어갔다. 

그 후로도 연예인들에게 잠시 잠깐 빠져들기는 했지만 그 때만큼은 아니었다. 대학생활을 돌이켜보면 학교에, 아르바이트에, 어학연수에, 인턴에 늘 정신없이 바빴다. 그렇게 어린 시절 '빠순이의 추억'은 그저 '한 때'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영원히 그럴 줄 알았다. 빠순이질은 어릴 때나 하는 거니까. 불과 몇 달 전인 7월까지만 해도 그랬다. 

정녕 내게는 '빠순이 DNA'가 흐르는 걸까

누나 마음 설레게 하는 '짐승돌'의 등장. 아, 저 팔뚝을 보라.
 누나 마음 설레게 하는 '짐승돌'의 등장. 아, 저 팔뚝을 보라.
ⓒ 2PM 공식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아,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다고 했던가. 다른 누나들이 입을 모아 '짐승, 짐승' 찬양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들이, 내겐 그저 '듣보(듣도 보도 못한)'였던 그들이 언제부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멤버 이름과 얼굴도 매치가 안 되던 것이 보면 볼수록 멤버 한 명, 한 명의 매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티브이에서 그들이 고정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시간 맞춰 챙겨보고, 몇 년 동안 '유치하다'며 보지 않았던 음악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검색창에 그들의 이름을 입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지, 이 익숙한 기분은... 정녕 내게는 '빠순이 DNA'가 흐르는 걸까.

그들을 보고 있으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이돌은 이래야 한다'는 틀 안에 있는 정형화되고 표백된 아이돌과는 달랐다. 자유분방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었다. 망가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전의 '오빠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면 그들은 마치 내 동생 같은(그러고 보니 리더가 우리 동생이랑 동갑), 연예인 같지 않은 친근한 느낌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10년만의 팬질'로 인도해준 <와일드 바니>
 나를 '10년만의 팬질'로 인도해준 <와일드 바니>
ⓒ Mnet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어린애들 같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착한 누나들 나쁜 맘먹게 하는 '남자 스멜'은 또 어떻고. 정말이지(!) 남자의 몸이나 근육에는 관심 없던 나였거늘, '쟤, 또 벗어?' 하면서도 모니터 앞에 찰싹 달라붙어 그들의 '식스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란...(이렇게 '때묻은 누나'가 돼가는 건가요). 그들의 노래를 빌리자면 '이건 본적이 없는 그런' 아이돌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팬질을 시작했다. 데뷔 1년차밖에 안 됐는데 자료는 어찌나 많은지. 캐도 캐도 나올 것이 남은 '광산'처럼 봐도 봐도 자료가 넘쳤다. 그만큼 방송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팬들이 '생산'해낸 자료가 많았다. 예를 들어, 공개방송을 하면 방송영상 이외에도 팬들이 직접 찍은 리허설 영상, 공연 영상, 멤버별 영상(한 멤버만 중점적으로 찍는 것) 그리고 사진이 인터넷의 바다를 떠돌았다. 방송영상 하나로도 수많은 '움짤(영상을 캡쳐해 만든 움직이는 사진)들이 만들어졌다. 10년 전에는 오빠들 방송 녹화해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보고, 또 보는 게 다였던 걸 생각하면, 이제는 팬들이 일방적으로 자료를 수용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10년만의 팬질'의 필수요소, '일반인 코스프레'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한 <아이돌 군단의 떴다! 그녀> 시즌3
 더욱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한 <아이돌 군단의 떴다! 그녀> 시즌3
ⓒ MBC every1

관련사진보기


뭐, 그렇다고 해서 스물여섯 먹어서 하는 팬질을 열여섯 살 때처럼 당당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어릴 때야 오빠들 사진이 박혀있는 배지를 가방에 주렁 주렁 매달고 다니면서 '내가 바로 빠순이'라고 광고했지만, 지금 팬질을 하면서 꼭 필요한 건 바로 '일반인 코스프레' 즉, 아이돌 따위에는 관심없는 시크한 일반인인 척하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친구와 2PM 이야기를 할 때면 혹 누가 들을까 멤버 이름은 꼭 한 톤을 낮춰서 이야기한다. 당장 지금 내 핸드폰 배경화면만 해도 르누아르 그림이다. 멤버들 사진으로 해놨다가 괜히 누가 볼까 신경쓰여 바꿨다.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하기도 했고...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 배경화면이고, 벨소리, 컬러링 모두 다 '아이들'로 채우고 싶지만 꾹 참는다. 웬만해서는 닥저(사진이나 영상을 닥치고 저장하는 것)도 하지 않는다. 이런 '비겁한 팬질'이라니.      

그럴 거면 팬질을 안 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나도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지난 추석 때만 해도 그렇다. 부산 집에 내려가 있는 며칠 동안은 절대 인터넷 안 할 거라며, 영상 안 볼 거라며 큰소리 뻥뻥 쳤었다. 그럼 뭐해. 그 날 하루만 인터넷 안 하다가 밤 12시 땡 하자마자 못 봤던 영상 보기 시작해서 새벽에 아빠 출근한다고 할 때까지 봤는 걸(아빠, 미안). 하도 자료를 많이 봤더니 이제는 꿈에도 나온다.     

'2PM이 누나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래, 나도 안다

누나 인생은 누나들이 책임진다. 너희는 즐거움만 다오.
 누나 인생은 누나들이 책임진다. 너희는 즐거움만 다오.
ⓒ <무한도전> 캡쳐

관련사진보기


'그들로 인해 흔들릴 때 마음속으로 5번씩 외칩니다. 2PM이 누나 인생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문구다. 그래, 나도 안다. 중학교 시절 엄마가 늘 하던 말. 'H.O.T가 밥 먹여주냐. 네 인생 책임지냐'.

그런데 그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내 인생을 책임지지도 않고, 책임질 필요도 없다. 다만, 나름대로는 힘들었던 지난 몇 달간 그들은 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주었다. 그들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잠시라도 '지금'을 잊을 수 있었다. 그게 '현실 도피'라고 해도. 뭐,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어차피 엔터테이너(Entertainer)는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밥을 먹여주지도, 인생을 책임지지 않아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최근 여성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5.7%가 좋아하는 그룹가수로 2PM을 뽑았다고 한다. 나 같은 누나들이 많긴 많나 보다. 다들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겠지만 이거 왠지 위안이 된다.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었어. 그나저나 내 정신이 돌아오는 날은 언제일까.


태그:#빠순이, #누나팬, #아이돌 , #H.O.T, #2PM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