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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복집 홀에 걸린 달력에는 참사 이후의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한 쪽에서는 고 이상림씨 손자 동원군이 컴퓨터로 인터넷에 뜬 신문기사들을 보고있다. 시사문제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아무래도 가장 재미있는 기사는 연예뉴스다.
 삼호복집 홀에 걸린 달력에는 참사 이후의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한 쪽에서는 고 이상림씨 손자 동원군이 컴퓨터로 인터넷에 뜬 신문기사들을 보고있다. 시사문제에도 관심이 생겼지만, 아무래도 가장 재미있는 기사는 연예뉴스다.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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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복집이 있는 근경빌딩 입구 유리문에 붙은 경고장 두 개. 건물에는 철거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적혀있었다.
 삼호복집이 있는 근경빌딩 입구 유리문에 붙은 경고장 두 개. 건물에는 철거라는 붉은 글씨가 여기저기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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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의 애통함에 대해서도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귀하들의 행위는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집단 건조물침입), 업무방해, 재물손괴죄에 해당하므로 형사상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조속한 시일 내에 퇴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부득이 민형사상 모든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 조합장 이춘우"

용산참사의 다섯 유가족이 새 집으로 이사온 지 보름이 됐다. 수배자들이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면서, 가족들도 영안실을 나와 지난 9일 용산4구역 근경빌딩 2층 삼호복집에 자리를 틀었다.

삼호복집은 고 양회성씨가 운영하던 가게다. 원래 있던 방 두 칸에, 좌식 마루에 칸막이 공사를 하고 만든 방 세 칸을 합쳐 다섯 가족이 따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군대 간 아들들과 친척집을 오가는 아이들을 빼면 12명이 이곳에서 함께 생활한다.

입식 테이블이 있던 홀은 은박 깔판으로 덮었다. 이 홀에서 이런저런 손님도 맞고 저녁마다 유가족들이 모여앉아 회의도 한다.

23일 찾아간 복집은 그럭저럭 가정집의 기본 형태를 갖춰놓은 상태였다. 한 구석에 샤워시설도 갖췄고 홀 한쪽에 컴퓨터도 놓았다. 식탁과 냉장고도 있다. 방에는 옷걸이와 책상 등 가구도 조금 들여놓았다. 다행히 별다른 취사시설은 필요하지 않다. 식사는 남일당 건물에서 철거민 이웃들이나 신부님들, 레아 활동가 등 용산식구들이 다함께 하기 때문이다.

새집 장만, 혹은 불법점거... 이미 월동준비 시작

그러나 유가족들의 새집 살이는, 이명박 정부가 좋아하는 '법과 원칙'으로만 보면 불법점거다. 빌딩 입구 유리창에는 지난 22일 재개발조합장 명의의 퇴거 요청 공문이 붙었다. '출입금지 경고문'과 '단전 단수 안내문'도 건물 벽 이곳저곳에 붙어 있다. "철거현장 주변을 무단으로 접근하여 발생한 안전사고의 책임은 사고자 본인에게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상업용 건물, 게다가 불법점거한 시설이 일반 가정집과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밖으로는 건물 잔해가 쌓인 공터나 허물어진 이웃집들이 보인다. 이런 살풍경한 분위기는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다. 더 현실적인 불편이 많다.

그동안 병원에서 다른 영안실의 곡소리에 깨곤 하던 유가족들은 이제 철거 현장을 오가는 덤프트럭 소리를 들으면서 깬다. 화장실은 계단에 있는 좌변기를 써야 한다. 에어컨을 돌릴 수 없어 대형 선풍기를 쓰는데, 그나마 날씨가 선선해진 것이 다행이지만 아직까지 모기가 극성이다. 홀에는 모기향, 모기약, 전기 파리채 등 다양한 방충용품이 즐비했다.

한참 제 방이 갖고 싶을 청소년들도 이곳에서 등하교를 하고 공부를 한다. 연대하러 왔다가 용산에서 목숨을 잃은 고 이성수씨네는 집이 경기도 수지인데, 아들 상필(18, 고3)군은 이번 이사로 학교가 너무 멀어져서 수원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등하교하는 일이 많다. 그래도 1시간은 걸린다. 여기서는 2시간이다. 엄마 권명숙씨는 고3 아들과 떨어져 있는 게 늘 '짠하다'.

고 이상림씨 손자인 동원(16, 중3)군은 "원래는 방학 동안은 종일 안 씻고 방도 안 치웠는데 다른 식구들이 같이 사니까 그럴 수 없다"고 불만을 말하기도 했다. 동원군은 지난 학기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할아버지로부터 마지막 들은 말이 "공부 열심히 해라"였다는데,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해 상필군과 함께 과외를 한다.

지난 여름방학 동안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하던 대학생이 선생님으로 나섰고, 최근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면서 사촌오빠에게 바통을 넘겼다. 수학과 과학이 약한 동원군은 "아직도 '피타고라스' 얘기 나오면 다른 나라 말 같고 알 듯 모를 듯하다"면서 "그래도 과외 안 받았으면 아예 수업시간 내내 '멍 때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가에는 전국철거민연합의 투쟁조끼들과 각종 책들이 쌓여있다. 용산참사의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지석준씨 인터뷰가 실린 인권재단 격월간지 <사람>이 눈에 띈다.
 창가에는 전국철거민연합의 투쟁조끼들과 각종 책들이 쌓여있다. 용산참사의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지석준씨 인터뷰가 실린 인권재단 격월간지 <사람>이 눈에 띈다.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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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나 조합측 용역업체 직원들을 마주치는 것도 큰 어려움이다. 특히 이 건물 4층에는 용역업체 사무실이 있어서 때때로 용역 직원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날 가족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잠시 집을 비우면서 기자에게 "같이 나가자, 혼자 두기가 좀 그렇다"고 말했다. 용역들이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원군은 "저녁에 친구들하고 놀고 싶은데 (위험해서) 밖에 못 나간다"고 했다.

이 건물 맞은편에는 경찰 2명이 서 있었다. 고 이상림씨 장남 상연씨는 "이 건물 주변으로 CCTV 2개가 새로 설치됐다"면서 "감시당하는 기분이긴 한데 거기(순천향병원)에서도 받았으니까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는 "용역업체 직원들도 다 예전에 동네 사람이거나 가게 손님이라서 얼굴을 안다, 싸울까봐 되도록 피한다"고 말했다.

"기자님 혼자 집에 두기가 좀 그렇습니다"

사실 애초에 유가족들도 이번 이사가 마음편한 결정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안전사고'나 '민형사상 조치'가 겁났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특히 고 양회성씨 부인 김영덕씨에게 이 집은 남편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김씨는 사고 이후 차마 이 건물 근처에도 오지 못하다가 이번에 가게를 다시 찾았다. 그는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서 왔는데, 이젠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병원에 있을 때는 매일 쌓여가는 장례식장 경비도 마음에 걸리고,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자기 지역 투쟁도 접고 수배자들을 지키기 위해 규찰을 서는 것도 미안했다.

병원 VIP실은 별도의 공간분리가 없었다. 8개월 동안 많게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가 테이블 사이사이에서 한뎃잠을 자야 했다. 옷 한 번 갈아입기도 만만치 않고, TV 채널 돌리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는 "병원보다는 여기가 행복하다"면서 "다른 식구들이 다함께 있으니까 누워있기도 어렵고 뭐 하나 (화장품을) 찍어바르기도 불편하다, 상중이라서 더 그랬다"고 전했다.

공동생활에서는 사소한 생활습관의 차이가 큰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그동안 유가족들은 늦게 자는 사람과 일찍 자는 사람, 코고는 사람과 그 소리에 유난히 잘 깨는 사람, 맵고 짠 반찬을 못 먹는 사람과 잘 먹는 사람이 함께 살았다. 가족들만의 공간을 만든 지금도 삼호복집 홀을 지날 때 깔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서로 신경 쓰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동안 별 분란은 없었다. 유가족들이 매일 저녁 회의를 하면서 하루 일과를 평가하고 이후 계획도 논의하는데, 투표 없이 자연스럽게 의견이 하나로 모인다고 한다. 이번 이사에서 가족들의 방을 배정한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일단 원래부터 방 구조를 갖춘 공간이 2곳. 큰 방은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고 강아지도 기르는 고 양회성씨네로 돌아갔고, 작은 방은 아들이 군대에 가서 부인 신숙자씨만 있는 고 한대성씨네가 쓰기로 했다. 그리고 마루에 칸막이를 쳐서 만든 공간이 3곳. 이 중 큰 방은 고 이상림씨네가 쓴다. 부인 전재숙씨와 상연씨, 동원군이 함께 살고, 때때로 며느리 정영신씨도 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 윤용헌씨네와 고 이성수씨네 가족에 남은 2방인데, 이 중 한 곳이 더 작고 가운데 턱까지 있어서 불편하다. 두 부인 사이에서 협상이 오갔다. 고 윤용헌씨 부인 유영숙씨는 "아들 상필이가 덩치가 크다"고 했고, 고 이성수씨 부인 권명숙씨는 "상필이가 크냐, 내 (덩치)가 크냐"고 맞받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권씨의 양보로 쉽게 풀렸고, 가족들은 사이좋게 방을 나눠가졌다.

삼호복집에 마련된 고 이상림씨네 가족방. 책상에는 참고서와 몇가지 책들, 생활용품들이 보인다.
 삼호복집에 마련된 고 이상림씨네 가족방. 책상에는 참고서와 몇가지 책들, 생활용품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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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족은 삼호복집의 방을 어떻게 배정했나

지난 8일 범대위는 "추석 전까지 장례를 치르겠다"면서 총력투쟁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서울시와 협상한 과정을 설명하고 이후 대정부 협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계획대로 지금도 전국 순회투쟁은 진행 중이다. 유가족 중 신숙자·유영숙·전재숙씨는 이 투쟁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협상은 깜깜 무소식이다. 송영길 민주당 의원과 한승수 총리가 논의했다는 '4자대화'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아직 진척사항이 없다.

길은 멀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희망의 근거를 말한다. 전날인 22일 정운찬 총리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섰던 권명숙씨는 "정치쇼인지는 몰라도, 정 후보자가 '총리 임명된다면 꼭 부르겠다'고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유감이지만 책임없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에서 철거민들에게 유리한 증언들이 나온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 17일 증인으로 나선 감식 전문가들은 "발화원인을 화염병으로 특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21일 재판부는 김석기 당시 경찰총장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남일당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는 기자에게 "앞으로 재판을 주목해봐라"고 당부했다.

유가족들이 생각하는 해결의 포인트는 선거였다. 정부가 지금의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참사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에서다. 이상연씨는 "이전 선거에선 뉴타운 공약이 먹혔을지 몰라도 참사 이후에 사람들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한나라당이 내년 10월 지방선거에서 이기려면 용산문제는 풀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대가족의 막내 동원군은 "2012년이나 2013년에 해결된다"는 '대예언'을 내놓았다. "정권이 교체될 무렵 이명박 대통령이 갉아먹은 국민세금이 쥐덫이 되어 콩밥 좀 드실 것이다, 그 때 용산참사에 대해서도 사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럴싸한가?

2010년 10월? 2012년?... 그런데 이번 추석은 어찌 지내나

어떤 방법으로 풀리든, 추석 전 장례는 어렵다. 추석은 이제 겨우 열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추석 이후와 그 뒤의 겨울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난 봄에 가져온 옷가지와 생활용품를 다시 겨울용으로 바꿀 생각이다. 이미 오리털 이불과 전기장판이 후원물품으로 들어왔다. 당장 추석을 어떻게 지내야할 지부터 논의해야 한다.

그동안 유가족들은 매일 오전 6시 영안실에서 상식(영정에 음식을 놓는 것)을 올렸지만 용산으로 이사온 며칠 뒤부터는 이를 중단했다. 매일 새벽 병원까지 가서 상식을 올리기가 너무 번거롭고 이를 챙겨주는 지역 식구들에게도 미안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식은 시신을 염한 뒤 하는 절차이기 때문에, 사실 장례예법과도 맞지는 않다.

용산 유가족들이 살고 있는 삼호복집 건물.
 용산 유가족들이 살고 있는 삼호복집 건물.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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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도 고민은 비슷하다. 장례도 치르지 않고 차례를 지내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고인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따뜻한 국이나 밥 정도만 올릴지, 추석답게 떡과 과일도 올릴지 정해야 한다.

유가족들은 늘 그렇듯 하루의 투쟁을 마친 뒤 삼호복집 홀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이 문제를 결정할 것이다.

그 홀의 벽면에는 '참복매운탕지리', '복수육', '은복탕' 등의 메뉴판이 붙어있다.

메뉴판과 겹쳐서 걸린 달력에는 날짜마다 빼곡이 참사가 발생한지 며칠이 됐는지 알려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기자가 삼호복집을 찾아간 23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247일 되는 날이었다.


태그:#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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