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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인류화석인 우산원인. 싼샤는 고인류 활동의 무대였다.
 중국 최고의 인류화석인 우산원인. 싼샤는 고인류 활동의 무대였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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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원인이 발견된 롱구포 일대에서는 유인원, 판다, 말 등의 조각, 다듬은 듯한 석기가 다수 발굴됐다.
 우산원인이 발견된 롱구포 일대에서는 유인원, 판다, 말 등의 조각, 다듬은 듯한 석기가 다수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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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중국 최고(最古)의 인류화석이 발견되다

강은 인류 문명을 발육시킨 요람이다. 오랫동안 중국 문명은 황허(黃河) 유역에서 태동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속속 드러나는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이런 도그마는 깨지고 있다.

양쯔강(長江) 상류에서는 중국 최초의 구석기문화가 발견됐다. 내몽골 및 랴오닝(遼寧)성, 양쯔강 하류에서는 황허문명보다 수천 년 앞선 신석기문화가 서서히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발굴 성과는 중국의 황허문명설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양쯔강 상류 싼샤(三峽) 일대는 한족과 다른 이민족의 땅이었다. 오랫동안 이 지역은 황허유역과 다른 고인류가 태동한 곳으로 추측됐다. 1920~30년대 미국 자연사박물관 발굴단은 여러 차례에 걸쳐 싼샤를 탐험한 끝에 베이징원인과 유사한 고인류가 이 지역에서 활동했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한 인류화석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1963년 산시(陝西)성 란텐(藍田)현에서는 베이징원인보다 훨씬 앞선 화석인류가 발굴됐다. 바로 '란텐원인'(藍田原人)이다. 황허 중류에서 고인류 화석이 발굴된 사실은 중국인에게 황허 기원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해주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85년 10월 13일 충칭(重慶)시 우산(巫山)현 먀오위(廟宇)진의 한 협곡. 중국의 고고인류학자인 황완포(黃萬波) 중국과학원 교수는 갓 발굴된 유물들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류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달린 아래턱 화석과 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동물의 뼛조각. 이른바 '우산원인'(巫山原人, Home Erectus Wushanensis)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산원인은 탄소측정결과 기원전 200만 년 전으로, 중국 최고(最古)의 인류화석이었다.

황 교수가 이끄는 발굴단은 중국과학원과 충칭자연박물관으로 구성됐다. 발굴단은 롱구포(龍骨坡) 일대에서 유인원과 뚜렷이 구별되는 위턱 및 두개골 화석과 유인원·판다·말 등의 조각, 인공으로 다듬은 석기도 다수 발굴했다.

구석기 시기 싼샤 일대는 히말라야 조산운동에 따라 지질구조가 변화하여 인류가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우산원인은 직립 인류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데다 포유동물을 사냥해 생존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윈양(雲陽)에서는 다수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물에 발견됐다.
 윈양(雲陽)에서는 다수의 신석기 시대 유적과 유물에 발견됐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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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양 다시(大溪)진에서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다섯 일가족의 합장묘가 발굴됐다. 이를 싼샤박물관에 옮겨왔다.
 윈양 다시(大溪)진에서는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다섯 일가족의 합장묘가 발굴됐다. 이를 싼샤박물관에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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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샤 수몰지, 세계 최대 유적 발굴지로 변하다

1992년 4월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싼샤댐 건설안이 통과됐다. 세계 최대 댐 건설이 확정되자, 중국 국가문물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바로 일단의 전문가를 싼샤 수몰지에 급파해 기초적인 유적·유물 조사에 착수했다. 1994년 중국역사박물관과 문물연구소의 주도 아래 30여 개 기관과 대학 전문가 300여 명은 싼샤지역 22개 구현을 세부적으로 조사했다.

이를 토대로 1996년 중국 정부는 3000만㎡, 1282곳에서 유적·유물 발굴 및 이전 사업을 추진했다. 2003년 6월 <중국국가지리>는 한 고고학자의 말을 인용, "정석대로라면 50년에 걸쳐 발굴과 이전, 보호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며 "하지만 10년 내에 모든 작업을 완수해야 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싼샤댐 건설로 싼샤 수몰지는 세계 최대의 유적 발굴지로 변했다. 2000년 6월 최종 확정된 싼샤 수몰지의 중요 유적·유물은 모두 1087곳. 이 중 지하 유적은 723곳으로 총 면적이 1600만㎡에 달했다. 발굴을 위해 중국 내 69개 기관과 대학에서 선발된 5000여 명의 발굴단이 모여들었다. 물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싼샤 문물을 구하기 위해 중국 고고역사학계의 모든 역량이 집중된 것이었다.

중국정부가 싼샤 유적·유물의 발굴 및 이전 사업에 쏟은 예산은 10억 위안(한화 약 1800억원).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문물 보호 프로젝트였다. 발굴단 규모도 중국 고고역사학계 인력의 2/3 이상을 차지했다. 실제 발굴 작업을 통해 2005년 말까지 지하에서 발굴한 유물은 17만점에 달했다. 그 중 보물급의 진귀한 유물은 9000점이나 됐다.

중국정부는 싼샤 문물 보호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완수했다고 자평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2007년 1월 시사주간지 <남방주말>(南方周末)은 한 국가문물국 부국장의 발언을 인용, "싼샤 문물 보호 프로젝트는 응급처치식(搶救性) 발굴 작업이었다"며 "조사된 유적·유물 가운데 발굴로 구한 문물은 20%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중국 내 발굴 인력을 총동원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오궈셩(郝國勝) 국가문물국 싼샤문물보호팀 연구원은 "유물·유적의 발굴 및 보호 방향 자체가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고 손실을 최소화하자는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당시 양쯔강의 물을 황허로 돌리는 남수북조 프로젝트에 맞춘 발굴사업도 동시에 진행되어 애로점이 더욱 컸다.

싼샤에서는 나무배에 시체를 넣어 매장하는 독특한 풍습이 전해 내려왔다. 여기에는 수많은 토기도 함께 넣어졌다.
 싼샤에서는 나무배에 시체를 넣어 매장하는 독특한 풍습이 전해 내려왔다. 여기에는 수많은 토기도 함께 넣어졌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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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관에 전시된 바(巴)국의 병기류. 바국은 춘추전국시대 시기 싼샤를 무대로 번성했다.
 고대관에 전시된 바(巴)국의 병기류. 바국은 춘추전국시대 시기 싼샤를 무대로 번성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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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단원으로 가장한 도굴업자, 곳곳에서 횡행하다

싼샤 수몰지에서 벌어진 유적·유물 발굴 및 이전 작업은 예기치 않은 문제를 야기했다.

발굴단원으로 가장한 도굴업자들이 곳곳에서 횡행했다. 그들은 싼샤 유물을 파헤쳐 중국 전역에 내다팔고 해외로까지 유출시켰다. 도굴업자의 수법은 교묘했다. 기관과 대학 발굴단원으로 위장하거나 아예 가짜 발굴단을 구성해 유격전식 도굴을 감행했다.

현지 주민들의 도굴도 극심했다. 당시 싼샤 수몰지는 구도시 해체와 신도시 건설, 이주민의 대거 이주, 유적 이전 등으로 지역 전체가 공사장이었다. 들어오고 나가는 인구의 유동이 아주 높아 유물을 내다파는 유통과 소비가 손쉬웠다. 현지 지형에 익숙한 농민들은 무리를 지어 도굴에 나섰고, 국가가 지정한 유적지를 미리 도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현지에서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분묘를 파헤치고 유물을 팔면 3일 만에 벼락부자가 된다'는 민요가 떠돌 정도였다. 지방정부나 경찰당국에서 단속을 나섰지만 큰 성과를 볼 수 없었다. 인력이 제한적인데다 지역이 너무 광범위했기 때문이었다.

2004년 11월 <베이징신보><北京晨報>는 "지난 10년 동안 싼샤에서 흘러들어온 유물로 베이징 골동품시장에서 벼락부자가 된 상인이 50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베이징에서는 싼샤 유물의 거래가 활발했다. 싼샤 현지에서 도굴된 유물은 먼저 중개상인에 의해 300~500위안(약 5만4000원~9만 원)의 싼 값에 넘겨져 배를 통해 이창(宜昌)에 옮겨졌다. 이를 다시 기차로 베이징으로 올라와 대형 골동품상에게 팔렸다.

싼샤에서 유출된 유물은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간 집산지인 충칭이나 이창을 통해 상하이·광저우·선전 등지로도 팔려나갔다. 심지어 적지 않은 유물이 연해도시를 거쳐 홍콩·대만·한국·일본·미국·영국·캐나다로까지 유출됐다.

실제 2005년 8월 충칭세관은 보고서를 통해, "1995~2005년 사이에 192건에 달하는 싼샤 유물의 도굴 및 매매 사건을 적발했다"며 "그 중 국보급 유물이 관련된 사건만도 43건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나마 적발된 유물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싼샤 수몰지의 3000만㎡ 유적·유적 가운데 80% 이상이 방치되면서 생겨난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양쯔강 상류에 서식하던 어류는 앞으로 싼샤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양쯔강 상류에 서식하던 어류는 앞으로 싼샤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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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싼샤 일대에서 활동하던 첸푸는 싼샤댐 건설로 자취를 볼 수 없게 됐다.
 고대부터 싼샤 일대에서 활동하던 첸푸는 싼샤댐 건설로 자취를 볼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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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만 년 동안 서식한 민물 돌고래, 양쯔강에서 자취 감춰

싼샤댐 건설로 사라지는 것은 역사 문물만이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양쯔강 중상류와 싼샤 협곡에서 살아 온 수백 종의 어류와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

양쯔강의 허리를 끊은 싼샤댐은 물고기의 이동을 근원적으로 가로막았다. 여기에 저수지 일부 구간에서 수체(水體)의 부영양화가 진행되고 오염물질이 정체돼 물고기의 생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미 2500만 년 동안 서식했던 민물 돌고래는 양쯔강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양쯔강 돌고래는 인류에 의해 멸종된 첫 번째 고래종이 된 셈이다.

싼샤 수몰지의 3104종 식물 가운데 550종도 싼샤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중국국가지리>는 "싼샤댐 영향권에 있는 모든 식물이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야생종은 멸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도했다. 364종에 달하는 동물도 일부는 싼샤댐에 의해 서식지가 분절되거나 섬으로 고립됐다. 이에 인해 근친교배가 이뤄지면서 군집 종류가 줄어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싼샤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직업인 '첸푸'(繊夫)도 사라졌다. 수천 년 전부터 첸푸는 양쯔강 상류에서 노를 저을 수 없는 협곡의 급류에서 배를 밧줄로 끌어 상류로 옮겨왔다. 1990년대 초까지 벌거벗은 모습으로 미끄러지지 않게 고안된 짚신을 신고 선박을 이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첸푸는 주로 싼샤 일대에 사는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이나 유랑민의 후예였다. 6명이 한조로 15명이 탑승할 수 있는 배 한 척을 끈다. 한달 수입이 1000위안(약 18만 원) 밖에 안 되지만, 싼샤 일대 주민들의 평균소득이 월 400~500위안인 점을 고려하면 적지 않다.

싼샤는 험준한 산세로 인해서 육로를 이용해 상류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양쯔강도 물길이 얕고 물살이 거센 지류에서는 노를 젓거나 동력을 이용하기 힘들다. 이에 1980년대 말 첸푸의 숫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샤오싼샤(小三峽)를 비롯, 주요 양쯔강 지류가 물에 잠기고 선박 통행이 쉬워지면서 첸푸는 필요 없어졌다. 이제는 샤오싼샤 깊숙한 마두허(馬渡河)에서만 그들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사회주의 정권 건국 이후 충칭은 서남지역 수도였다. 건국 초기 사용되던 중국공산당 휘장은 충칭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회주의 정권 건국 이후 충칭은 서남지역 수도였다. 건국 초기 사용되던 중국공산당 휘장은 충칭관에 전시되어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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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샤박물관은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수많은 국보급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싼샤박물관은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수많은 국보급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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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샤댐 건설 이후 수많은 어류 멸종

중국싼샤박물관은 싼샤 수몰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이다. 2005년 6월에 개관하여 30만여 점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5층 높이에 총 건축면적만 4만2497㎥에 달하는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다. 베이징역사박물관 외에 이름에 '중국'이라는 명칭이 붙은 박물관으로는 유일하다.

본래 충칭에서 1951년 세워진 시박물관이 있었다. 하지만 규모는 작고 전시 유물은 볼품없었다. 싼샤 유적·유물의 발굴 및 이전 사업은 충칭에 국가대표급 박물관을 안겨주었다. 2002년 10월 시공하여 총 5억 위안(약 900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싼샤박물관은 크게 4개의 시대 전시관과 6개의 테마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 전시관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싼샤'(壯麗三峽), '아득한 고대의 충칭'(遠古巴渝), '충칭·도시화의 길'(重慶·城市之路), '전쟁의 시대'(抗戰歲月) 등으로 나뉘어졌다. 테마 전시관은 '역대서화' '역대도자기' '한대조각예술' '서남민족민속' '역대화폐' 등으로 구성됐다.

1층 싼샤관은 입구부터 수몰되기 전 채취한 취탕샤(瞿塘峽), 우샤(巫峽), 시링샤(西陵峽) 지역 암석들이 찾는 이를 맞는다. 싼샤는 이 세 협곡을 통칭해서 일컫는다. 지금은 수몰된 싼샤의 암석을 옮겨와 싼샤의 혼과 정신이 박물관 속에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싼샤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어류 전시부스와 첸푸 및 나무배 전시공간이다. 싼샤댐 건설 이후 수많은 어류가 멸종됐다. 특히 세계에서 단 두 종류 밖에 없는 민물 돌고래 중 하나인 양쯔강 돌고래는 여기 싼샤박물관에서 박제로만 볼 수 있게 됐다. 희귀종인 철갑상어도 양식용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첸푸도 싼샤에서는 모습을 감춘 채 박물관에 청동상으로만 남게 됐다.

2층 고대관은 황허문명에 버금가는 싼샤 고대문명을 상징하는 각종 유적과 유물을 정리했다. 여기에는 우산 롱구포에서 발견된 우산원인의 각종 유물과 황허 앙소문화보다 훨씬 빠른 기원전 5000년 전의 하모도(河姆渡)문화가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3층 충칭관은 격랑의 역사를 딛고 세계 최대 도시를 건설한 충칭인의 삶과 생활을 잘 표현했다.

충칭시의 상징물인 런민광장과 런민다리탕. 런민광장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놀이공간이기도 하다.
 충칭시의 상징물인 런민광장과 런민다리탕. 런민광장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놀이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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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민다리탕의 건축양식은 베이징의 톈탄을 모방하여 건설됐다.
 런민다리탕의 건축양식은 베이징의 톈탄을 모방하여 건설됐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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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샤박물관 바로 앞, 충칭시 상징물인 런민광장과 런민다리탕

싼샤박물관 바로 앞에는 충칭시의 상징물인 런민(人民)광장과 런민다리탕(人民大禮堂)이 있다. 런민광장 입구에는 '충칭런민다리탕'이라는 금색글자가 새겨진 현판으로 화려하게 멋을 꾸민 패방문(牌坊門)이 눈에 띈다. 이 패방문을 지나면 축구장 크기의 런민광장이 펼쳐져 있다.

중앙은 광장으로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런민다리탕으로 올라가는 경사 앞에는 분수가 배치되어 있다. 런민광장은 1997년 충칭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규모 보수공사를 거쳐 새로이 단장했다. 총면적이 3.3만㎥에 달하는 공원식 광장이다. 분수는 시간대마다 각기 다른 음악과 어울려 보는 이에게 청량감을 준다.

런민다리탕은 1954년 완공된 총 건물면적이 2.5만㎥에 달하는 충칭시의 대표 건축물이다. 베이징에 소재한 톈탄(天壇)을 모방하여 중국 고대 건축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중국정부에서 지정한 중국 10대 현대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런민광장에서 런민다리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모두 128개로 이뤄졌다. 광장과 런민다리탕 정상부문 높이가 65m에 달할 정도이다. 런민다리탕은 크게 5층의 원형방식 중앙홀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늘어진 건축물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런민다리탕 건축양식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런민다리탕 중앙홀은 높이가 46m나 된다. 주로 공연이나 회의로 이용되는데, 홀 중간에 기둥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공연 시에는 5000여명이 한꺼번에 입장하여 앉을 수 있다. 중앙홀 내부는 뛰어난 음향시설과 완벽한 공연무대를 갖추어 대형 공연이 자주 열린다.

런민다리탕의 중앙홀 주랑(柱廊)과 양쪽 건축의 날개는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탑의 꼬리부분도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균형 있게 짜여 있다. 건축물 전체를 뒤덮은 옥색 유리 기와와 금색으로 치장된 부속관, 난간 등은 중국 고대건물의 화려함을 뚜렷이 보여준다.

충칭은 산과 언덕이 많은 도시다. 모든 건축물은 산비탈에 기대어 건설되어 있다. 훙야둥에는 이런 충칭의 건축양식을 조각물로 상징하여 전시하고 있다.
 충칭은 산과 언덕이 많은 도시다. 모든 건축물은 산비탈에 기대어 건설되어 있다. 훙야둥에는 이런 충칭의 건축양식을 조각물로 상징하여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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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훙야둥대주점의 야경. 훙야둥대주점은 자링강 변에 산비탈에 기대어 충칭 전통 건축양식으로 세워졌다.
 화려한 훙야둥대주점의 야경. 훙야둥대주점은 자링강 변에 산비탈에 기대어 충칭 전통 건축양식으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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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 1

싼샤박물관은 충칭시 위중구(渝中區) 런민루 슈에톈완(學田灣)에 있다. 박물관의 개방시간은 9:00~17:00이다. 입장료는 무료다. 박물관은 규모가 상당히 커서 넉넉잡고 3시간을 잡아야 다 볼 수 있다.

박물관 내 한국어 가이드는 없지만, 한국어가 녹음된 휴대용 해설기가 있다. 해설기의 대여비는 10위안(약 1800원)이다. 먼저 보증금 100위안(약 1만8000원)을 내고 빌린 뒤, 박물관을 떠날 때 해설기를 돌려주고 보증금을 되돌려 받으면 된다.

런민광장의 개방시간은 6:00~22:00이고, 입장료는 없다. 런민다리탕의 개방시간은 8:00~18:00이고, 입장료는 5위안(약 900원)이다. 싼샤박물관과 런민광장으로 가는 버스는 시내 각지에서 출발하는 103, 104, 105, 111, 112, 122, 215번 등이 런민다리탕 정거장에서 정차한다. 시 중심가인 제팡베이(解放碑)에서 택시를 타고 갈 경우 8위안(약 1450원) 안팎이 든다.

# 여행Tip 2

충칭에서 묵을 만한 4,5성급 고급 호텔로는 훙야둥(洪崖洞)대주점을 추천한다. 호텔은 충칭 전통의 산비탈 건축물 테마파크인 훙야둥 내에 있다. 호텔로 향하는 대중교통은 조금 불편하지만, 제팡베이에서 도보로 5분 거리고 직원들이 친절하며 방도 좋다.

방값은 아침식사와 무료 인터넷을 포함해 더블 베드룸이 340위안(약 6만2000원)이다. 방 크기와 실내장식은 더블 베드룸과 똑같지만, 외경이 절벽 쪽이라 햇볕이 없는 싱글 베드룸은 290위안(약 5만3000원)이다. 훙야둥대주점의 위치는 창바이루(滄白路) 56호이고, 예약을 위한 전화번호는 (023)6399-2888이다.

훙야둥대주점이 위치한 훙야둥은 양쯔강의 가장 큰 지류인 자링(嘉陵)강 변에 있다. 특히 양쯔강과 자링강이 합수하는 곳과 멀지 않아 강 풍경이 아주 멋있다. 훙야둥 입구에는 치수에 성공한 우왕(禹王)의 석상이 있고, 그 위에 인공폭포가 있어 찾는 이에게 시원함을 만끽시켜 준다. 훙야둥 내에는 충칭 옛 저자거리가 복원되어 있다. 다양한 먹거리와 상점은 여가와 쇼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충칭, #중경, #양쯔강, #싼샤댐, #싼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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