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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가 33개월 때부터 36개월까지, 그러니까 지난 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쿠하와 저는 아기 돼지 삼형제 놀이를 했습니다. <아기 돼지 삼형제> 인형극을 보고 돌아온 후, 세 돌이 되던 때까지 쿠하가 막내돼지 역할을 도맡았고, 저는 첫째돼지나 둘째돼지가 되어야 했지요.

낮에는 주로 아기 돼지 삼형제들 흉내내는 집 짓는 놀이를 하고 놀았고, 밤에는 잠들기 전까지 반복해서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들려주며 토닥토닥 두드려주어야 잠들었습니다. 매일 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은근히 지겨웠습니다. 하는 사람도 지겹지만 듣는 아이도 지겨웠나 봅니다.

게다가 인형극에서 가장 크고 무섭게 묘사된 늑대가 무서웠던지 "엄마는 늑대가 나오지 않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로 해줘"라고 졸랐습니다. 쿠하가 원하는 돼지의 직업, 사건 등은 몇 개월 동안 조금씩 변해 갔습니다.

역할 변화와 해피엔딩이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

'복스러운 꼬리를 가진 귀여운 아기 늑대 세 마리', 늑대에 대한 편견을 깨주는 설명입니다.
 '복스러운 꼬리를 가진 귀여운 아기 늑대 세 마리', 늑대에 대한 편견을 깨주는 설명입니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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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꾸며낸 '늑대가 나오지 않는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는 별로 재미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쿠하는 좋아했습니다. 몇 번의 직업 변천을 거치다가 첫째 돼지가 시인으로, 둘째 돼지가 바이올린 연주자로, 막내가 목수 역할을 하는 이야기에 와서 가장 만족했습니다.

그런 요구가 있다보니 서점에 진열된 아기 돼지 삼형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진 동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몇 권의 대안동화를 사서 읽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늑대와 돼지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뒤바꿔주는 책입니다. 늑대가 못되고, 잔인하고, 무서운 동물이라는 전형화된 이미지는 동화를 만든 사람들이 지어낸 것일 뿐이지요. 

아기 늑대들은 엄마 곁을 떠나 세 형제가 살 집을 지으러 갑니다. 길에서 만난 캥거루가 벽돌을 나누어 줍니다. 아기 늑대 세 마리는 벽돌집을 지어 놓고 마당에서 놉니다. 지나가던 크고 못된 돼지가 늑대들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지요.

아기 늑대들은 문을 걸어 잠급니다. 화가 난 돼지는 "훅~" 불어버지만, 벽돌집은 세게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동화책에서 읽은 세 살 쿠하도 알고 있던 내용이지요. 그림책을 한 장 넘기자, 아이가 처음 본 도구가 등장합니다. 못된 돼지가 쇠망치를 가져와 있는 힘껏 집을 부수어버리는 장면이지요.

캥거루가 나누어준 벽돌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캥거루가 나누어준 벽돌로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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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쇠망치를 가져와 집을 무너뜨렸습니다.
 돼지는 쇠망치를 가져와 집을 무너뜨렸습니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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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늑대들은 더 튼튼한 집을 짓기로 합니다. 비버에게 도움을 받아 콘크리트로 집을 짓지만, 그 다음 장을 넘기면, 돼지는 구멍 뚫는 기계를 가져와 집을 부수어버립니다. 가까스로 살아난 아기 늑대들은 이번에는 더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짓기로 하지요. 콘크리트는 물론이고 철근과 강철판으로 짓고, 뾰족한 철사로 담장을 두릅니다. 하지만 예순일곱 개의 자물쇠와 인터폰까지 설치한 집을 돼지는 다이너마이트로 간단하게 날려버립니다.

그제서야 늑대들은 건축재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수레에 꽃을 가득 싣고 오는 홍학을 만납니다. 아기 늑대들은 홍학에게 부탁해 꽃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한쪽 벽은 금잔화로, 다른 쪽 벽은 수선화로, 바닥에는 데이지 양탄자를 깔았지요. 부서지기 쉽고 바람에 흔들거렸지만 아름다운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다음 날, 잊지 않고 못된 돼지가 찾아옵니다. 돼지는 꽃집을 불어버리려고 있는 힘껏 숨을 깊이 들이쉽니다. 그 때, 부드러운 꽃향기를 맡게 되지요.

꽃향기를 맡으며 돼지는 이제껏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꽃들이 못된 돼지의 심성을 착한 돼지로 바꿔주었지요. 영리한 아기 늑대들은 꽃향기에 취해 노래하고 춤추는 돼지를 보면서 혹시 돼지의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하지만, 정말로 돼지가 달라진 것을 알고 같이 놀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늑대와 돼지가 차를 나눠 마시는 모습입니다.

현실과 그림책을 비교하는 아이 "늑대네 동네도 왕십리 같다"

돼지가 쓰는 도구가 꽤 현실적인 그림책입니다.
 돼지가 쓰는 도구가 꽤 현실적인 그림책입니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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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도구들은 꽤 사실적입니다. 늑대들이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도, 돼지가 집을 부술 때 쓰는 것도 모두 실제로 사용하는 도구들이지요. 그림책을 보면서 아이에게 도구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우리집 근처에 새로 아파트를 지을 때도 쓰는 도구라고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 책을 일부러 읽어주지 않습니다. 쿠하는 집에서는 창 밖으로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 현장을 보고, 할머니네 갈 때는 철거 중인 재개발 현장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붉은 스프레이 캔으로 폭력적인 말들을 써 둔 벽이나, 반쯤 부수어 놓은 다가구 주택을 엄마 입장에서는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몇 달 전, 이 책을 읽어줄 때 돼지가 구멍 뚫는 기계로 콘크리트 집을 부수는 장면을 보면서 "늑대네 동네도 왕십리 같다"고 해서 제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어른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적인 풍경이 아이에게는 그림책에서 본 이미지와 겹쳐지나 봅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한 뒤로는 저도 이 책을 볼 때마다 재개발로 집을 잃은 사람들, 용산 참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림책 내용과 재개발은 아무 관계가 없지만, 집을 부수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고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빈민의 입장으로만 보면 피해의식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책에는 부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집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주는 대안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기 늑대들은 제 한 몸 잘 보살필 수 있는 좀 더 튼튼하고 안전한 재료를 찾아서 집을 짓는 동안, 안심할 수 있는 보안이 좋은 집을 지어나가는 동안, 초고층 아파트를 짓고, 입주하고, 방범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부자들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아파트들이 세워지기 전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

늑대가 집을 안전하게 짓는 실력이 느는만큼, 집을 부수는 돼지도 마찬가지로 실력이 발전합니다. 아무리 부자들이 좋은 집을 짓고 산다고 해도 결국에는 해결책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멋지게 우화적으로 보여줍니다. 짓고 부수는 소모적인 싸움이 끝나는 지점은 동화 속의 늑대나 현실 속의 부자들이 더 튼튼한 재료를 찾아낼 때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들 가운데 하나인 꽃으로 집을 지을 때 비로소 돼지와 늑대는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이웃과 차를 나누며 살고 싶은지, 콘트리트로 성을 짓고 싶은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먼저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쿠하네 할머니가 살던 동네 재개발 싸움판이 잘 끝나기 전까지, 이 책은 되도록 읽어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언젠가 할머니도, 우리도 꽃향기 나는 집으로 이사할 수 있다면, 그 때 다시 꺼내어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고 싶은 책입니다.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

헬린 옥슨버리 그림, 유진 트리비자스 글, 김경미 옮김, 시공주니어(2006)


태그:#쿠하, #그림책 , #재개발, #뉴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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