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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그간 '범야권 정치예비세력'으로 숱하게 하마평에 올랐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로 내정되었단다. 서울시장 후보니 국회의원이니 말이 많았지만 본인이 한결같이 고사해왔다고 알고 있는데 참 의외다.

 

정권 차원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가 충청권을 감싸안고 나아가 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대선후보를 키우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명색뿐인 '친서민행보'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중도실용노선'을 끌고 나가기 위한 신선한 얼굴마담으로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한다. 더구나 그간 '범야권' 진영의 후보라 여겨졌던 만큼 정권의 포용성이랄까, 강부자/고소영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불식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고 말이다.

 

아마 정운찬은 기왕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에 빠지기 이전에 총리직을 맡는 것이 유리하면서도, 적당히 힘이 빠져 개인의 운신이 폭이 조금은 넓고 자신의 목소리를 투영하기 좋은 타이밍이라 판단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G-20도 있으니 국제 무대에서 나름의 비중있는 역할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본인이 충청권과 여차하면 호남, 수도권까지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걸까.

 

참 실망이다. 아무리 정권에 대한 분칠용으로, 본인의 정치욕구에 대한 해소용으로 잇속이 서로 맞았다고 해도,  정운찬이 그러는 건 실망이다. 나름 지난 대선에 범여권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고, 박원순 변호사니 누구니 재야 세력과 함께 고려되던 사람 아닌가. 서울대 법인화에도 반대 목소리를 명확히 냈던 걸로 기억하고 있고, 교육 정책 등에도 상당히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던 사람인데, 결과가 어떻게 되던 일단 실망이다. 게다가 똥물만 잔뜩 묻히고 쫓겨나오기 십상이지 싶다.

 

무서운 건 청와대다. 정운찬을 총리로 발탁하는 데 성공하다니, 이런 깜짝 카드를 구사할 만큼의 능력치로 레벨업했다. 집권 초나 얼마전까지의 어리버리함, 막무가내식의 땡깡이 아니라, 나름 머리를 쓰며 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노무현과 김대중의 연이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세력화는커녕 정체성조차 뚜렷치 않은 야권 세력, 그 비극 중에 묻혀 버린 진보 세력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 뿐이다.

 

물론 청와대는 그들과 이해를 함께 하는 언론과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고 있다. 당장 최장집 교수가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강연 중에서 했던 몇몇 대목을 끌어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이 곧 진보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메치기되어 되레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칼로 돌아오게 만든 조중동의 활약이 있지 않은가. 그분의 근본적인 문제의식 따위는 모조리 거세된 채 그저 선정적인 문구 하나만 발췌해서 써먹는 수법이라니.(<미디어오늘> '중앙일보·동아일보, 최장집 띄우기 왜?')

 

그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이명박의 통치술이 점점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정치력 따위 제로에 가깝고 그저 선불맞은 멧돼지마냥 앞으로만 직진하는 미친 불도저인 줄 알았더니,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나름 영악스럽게 정국을 장악해 나가는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태그:#정운찬, #총리, #내정, #진보, #최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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