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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하게 계속되는 장마만큼 일이 지리하게 늘어져 휴가는 저 멀리 밀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혼자 여행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라고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신은 토요일 공무가 있어 함께 놀아줄 수 없으니 어디든 다녀오라는 제안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겨우 이틀이지만 당연히 좋다마다다. 83년 대학 1학년 때 19일간 무전여행을 한 이후 2000년이 다가오던 어느날 10년만에 사표를 던지고 그 때도 아내 허락을 받아 4박5일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어라연과 아우라지를 돈 적이 있었다. 어디를 갈까 고심하다 불현듯 8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의 지리산이 떠 오른다. 

1983년 여름, 청량리역을 출발해 부산을 둘러보고 여수 개도를 거쳐 지리산 화엄사로 들어섰을 때는 야영장 여기저기서 밥짓는 냄새가 솔솔 피어나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다. 꼭 지리산을 가 보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어찌어찌 돌다보니 지리산 자락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산행을 위한 등산화도 배낭도 취사나 취침용 도구도 없었다. 청바지에 딸딸이(끈 달린 슬리퍼)를 끌고 가방 하나 달랑 둘러 맨 날라리 복장이다.

가게에서 초코파이 5개를 사서 가방에 넣고 화엄사를 휘 둘러본 후 노고단을 향해 출발했다. 산림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급히 비를 피해 계곡에 움푹 파인 바위 아래로 몸을 숨겼다. 빗발은 더욱 거세지고 계곡물이 순식간에 차 올라 바위틈에서조차 탈출을 해야 했다. 첫번째 도전은 비 맞은 강아지꼴이 되어 물러나야 했다.

민박촌으로 내려와 하룻밤 끼어 잘 집을 골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니 내 또래로 보이는 형제 팀이 코펠에 밥을 짓고 있다. 옆에 쪼그려 앉아 넉살좋게 민박비 반반씩 부담하고 같이 좀 자자고 제안을 했다. 형으로 보이는 친구는 좋다 하는데 동생쯤 되어 보이는 친구가 영 싫은 기색이다. 굳이 조를 입장도 그럴 필요도 없어 다시 산으로 올라 갔다. 노고단에 산장이 있다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어 거기라도 가서 하룻밤을 기거할 심산이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무모하기 그지 없다. 

다시 또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몰려 왔다. 달도 별도 개똥벌레의 희미한 똥구녕 불빛도 없는 칠흑같은 어둠이다. 지리산의 소나기와 어둠은 그 옛날 빨치산 유격대 전투하듯 그렇게 순식간에 몰려오는 모양이다. 되돌아 내려갈 수도 더 이상 올라갈 수도 없다. 무턱대고 걷다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는데 주위에서 사람들 말 소리가 들리며 손전등이 켜진다. 텐트줄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두 동의 텐트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한 팀은 부자간이고 또 다른 팀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연인간이다. 

나이든 아저씨가 손전등으로 내 아래위를 훝어 내리더니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물어 온다. 잠 자러 노고단 올라가는 길이라고 하니 혀를 찬다. 거의 미친놈 보는 눈이다. 아마도 자살하러 가는 사람쯤으로 보였으리라. 그러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자고 내일 날 밝으면 올라가라 한다. 얼마나 반가운 제안이란 말인가? 눌러 앉으니 여기저기 나무등걸을 주워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양주도 한병 꺼내 놓는다. 밤이 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되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는 여행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2009년 여름, 지리산에서의 그 아버지와 아들처럼 이제 훌쩍 자라오른 내 아들들과 함께 지리산을 종주하자 마음 먹었다. 큰 아들에게 1박 2일 지리산 종주을 제안했지만 고3 수험생이 동의할 리 만무다. 바로 퇴짜 맞았다. 중3 작은녀석에게 제안했다. 어디든 잘 따라 다니는 작은 녀석 얼씨구라 좋아라 한다. 같이 계획을 짰다. 인터넷을 뒤져 지도를 다운로드받아 성삼재에서부터 천왕봉을 거쳐 내려갈 곳을 체크하고 교통편을 알아 보았다. 지인에게 조언받은 금요일 수원역에서 출발하는 구례구행 11:30분 막차는 벌써 매진이다. 새벽 구례구에 내려 성삼재까지 택시로 이동 후 노고단으로 오르는것이 일반적인 종주 코스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승용차를 이용해 백무동까지 간 후 거기서 민박이나 야영을 한 다음 차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가기로 했다. 퇴근 후 장비를 챙겨 경기도 용인에서 7시쯤 출발해 백무동에 도착하니 11시가 다되어 간다. 미리 조사해 두었던 초가집이란 민박집에 찾아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가 초가집인지 처갓집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살갑게 반겨준다. 늦은 시간이지만 쌉싸름한 도토리묵까지 무쳐 주시니 출출하던 차에 여간 고마울 수가 없다. 동해안은 민박비가 수십만원 한다는데 여기까지는 서울 민박떼기 장삿꾼들이 침투를 안했는지 하룻밤에 3만원이다. 성삼재까지 태워다 줄 수 있는지 여쭈니 그것도 3만원이란다. 조사한 바로 택시요금은 백무동-성삼재간 40분 거리에 4만5천원이다. 

5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나오니 주인 아주머니가 아침밥을 차려 줄까 물으신다. 번거로울 것 같아 성삼재 휴계소에서 먹겠다며 사양하고 바깥 양반을 옆 자리에 태우고 성삼재로 출발했다. 뱀사골과 달궁 야영장을 지나 산비탈길을 돌고돌아 성삼재에 도착하니 비가 후득후득 떨어지는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기상정보상 각오한 일이지만 걱정이다. 휴게소에서 가락국수로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는 판초우의를 뒤집어 쓰고 보무도 당당하게 노고단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나중에 처절히 느낀 일이지만 산에 오를 때 아침밥만큼은 든든하게 챙겨먹어야 한다.

성삼재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관통도로가 생겨 종주를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도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관통도로야 어쩔 수 없다해도 거론되고 있는 케이블카만큼은 절대 반대하고 싶다. 만약에 화엄사에서 출발해 노고단을 거쳐 종주를 한다면 2박 3일은 넉넉히 잡아야 한다. 지금도 제대로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화엄사에서 출발한다.

노고단에 오르니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한 여름 태양빛이 따갑게 느껴진다. 바위 위에 올라 우리가 타고 넘을 산과 길을 조망해 본다. 어디가 끝인지 어디를 거쳐야 할지 아직은 아득하지만 기분만큼은 더 없이 상쾌하다. 노고단 아랫녁 산 사이에 구름이 가득 넘실대니 가히 운해라 불릴 만하다. 올라오면서 잠시 입었던 판초우의를 반듯하게 개어 넣고 본격적인 종주를 시작한다. 임걸령을 거처 삼도봉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니 아기자기한 하이킹 수준의 산길이다. 재잘재잘 아들과 정담을 나누며 걷는다.

임걸령 옹달샘의 물맛은 꿀맛을 넘어 하늘이 내려 산신령이 담아주는 천상의 맛이다. 배와 물병을 가득 채운 후 땀을 식히며 잠시 쉬어간다. 지나가는 길목의 반야봉도 올라갔다 가고 싶지만 갈길이 너무 멀고 시간이 빠듯해 지나친다. 드디어 날라리봉이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지금은 삼도봉이라 부른다지만 옛날의 날라리봉이 더 정겹다. 바위 봉우리가 낫의 날처럼 날카롭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다가 부르기 쉽게 변하여 날라리봉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이 저 바위 위에 앉아 있지만 26년전에는 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넉을 놓고 도(?)를 닦던 자리다. 철 없던 시절 화엄사에서 좋은 사람들과 하룻밤 인연을 나누고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노고단을 지나 초코파이를 씹으며 이곳까지 탈래탈래 걸어 왔었다. 날라리봉에 앉아 산 아래 밀려들고 빠져 나가는 운해가 저 산자락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살려내는 모습을 두어시간이나 보고 있자니 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고 산의 정점이 되어 하늘로 솓구쳐 오르는 엄청난 기를 느꼈었다. 그 무한한 지리산의 정기를 경험해 보길 권한다.

지리산은 아름답다. 산은 뽐냄이 없지만 인간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능선에 자라나는 나무와 들꽃들도 아름답기 그지 없다. 지나는 곳곳에 하늘말나리, 잔대꽃과 비슷한 모싯대, 두 종류의 꽃이 한 대에 피어난 것 같은 산수국, 분홍색 꽃잎이 예쁜 둥근이질풀등이 지천이다. 정겨운 새 소리, 시원하게 슥슥 훑어대는 바람소리, 하늘과 땅 사이의 낙원이 따로 없다.

산은 낙원이지만 이미 내 몸은 지옥이다. 벌써 염려했던 몹쓸 저질체력의 한계가 왔다. 경사는 가파르나 내 목은 꺾이고 숨이 턱을 처 올린다. 이외수선생님의 하악하악이 아니라 늙고 지친 개가 뿜어내는 핵핵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이 앞장을 섰다. 녀석의 체력은 한계가 없는 모양이다. 아직도 바위산을 통통 튀어 오르듯이 쌩쌩하다. 

직장 출근할 때 처럼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더니 연하천은 멀었는데 벌써 배가 고파온다. 육포를 씹고 물을 마셔 댔지만 허기를 면하는데는 코끼리 비스킷이다. 아직도 몇개나 남았을지 모를 바위산에 앉아 생라면을 뜯었다. 아들이 스프를 뜯어 '빠셔빠셔'를 해서 준다. 라면은 군대식이 최고라며 흐믈흐믈할 정도로 삶아 먹던 내가 생라면을 씹고 있다.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고 나니 이제 좀 살 만하다. 

다시 한참을 산 넘고 산 넘어 드디어 연하천에 도착하니 3시쯤이다. 많은 사람들이 점심밥을 지어 먹고 있다. 허겁지겁 물을 떠 오고 버너에 불을 피워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매트리스에 누워 한 잠 잤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은데 아들 녀석이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한다. 웬수 같지만 오늘 목적지인 세석대피소까지 가려면 다시 또 거의 10킬로미터는 족히 걸어야 한다. 

다시 또 강행군을 해 벽소령에 도착했다. 나무 기둥에 기대 반쯤 누워 사위를 둘러보니 나만 환자가 아니다. 한쪽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난다. 벽소령에서 자고 가고 싶지만 아들이 또 강행군을 재촉한다. 거의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 지금 출발하더라도 정상적인 걸음으로 밤 8시는 넘어야 세석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다. 계획상으로는 장터목에서 1박을 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보는것이 목표였다. 먼 산을 모르는것이야 당연하다 해도 바로 위에 붙은 머리가 내 몸을 이렇게 모를 줄이야. 


장터목은 진작에 포기했지만 오늘중으로 세석대피소까지는 가야 한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다. 손전등을 켜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기다시피 산을 오르고 내려가길 반복하다보니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두런두런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 해냈다는 기특함과 함께 세석대피소를 향해 마지막 발길을 터벅터벅 옮겨놓은다. 내려 가는 길목에 많은 사람들이 비닐속에 들어가 비박을 하고 있다.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니 시체처럼 보인다. 내 몸도 비록 걷고는 있지만 시체와 다름 없다. 마신 물 한 말에 땀이 두 말이다.

세석대피소에 도착하니 9시다. 대피소 처마자락 아래는 밥 해 먹는 사람들로 난리 북새통이다. 서둘러 자리를 잡고 아들은 쌀을 씻으러 가고 즉석카레를 꺼내 코펠에 넣고 덮혀 내놓았다. 아들 손에서 코펠을 건네받아 물을 넉넉히 잡고 버너에 불을 붙여 밥을 한다. 밥 익는 시간이 지루하다. 허겁지겁 먹는 카레라이스가 반찬은 없지만 그야말로 산중성찬이다. 맨 땅 바닥에 자리를 펴고 침낭을 끌러 잠자리를 만들고 위에 판초우의를 덮었다. 옆에서는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느라 시끌벅적하지만 아들은 금방 골아 떨어진다. 잠자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힘들기는 매한가지일텐데 단 한번 투덜거림도 없이 오히려 아빠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이내 곯아떨어져 정신없이 자다가 깼다. 달빛이 너무 밝아 아침인 줄 알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달빛이 어떻게 태양만큼이나 밝을 수 있을까?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수를 놓은 듯 매달려 찰랑대고 있다. 누군가 깨어있던 사람이 한 마디 한다. "북극성이 주먹만해!" 저 먼 우주로 치면 겨우 2킬로미터정도 다가갔을뿐인데 별과 달이 바로 코 앞에 잡히는 듯하다. 갑자기 드는 생각, '우와! 이 정도 날씨면 내일 일출은 잘하면 볼 수 있겠다' 곤히 자는 아들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일출 보려면 지금 출발해야 하는데 갈까?" 눈은 떴지만 대답이 없다. 힘든 기색이다. 좀 더 자게 하고 나도 다시 누웠다. 아들은 갈 수 있을지 몰라도 난 너무 무리야. 이러다 객사할 수도 있어. 119헬리콥터가 뜨고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면 어떡해. 별 생각이 다 든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데. 이번이 절호의 기회인데. 아무래도 안되겠지. 그래 이번에는 종주가 목표야. 다시 누워 잠을 청한다. 아들의 코고는 음률이 음악처럼 들린다.

달빛은 어느 새 달아나고 뜨거운 햇볕이 눈을 찔러 댄다. 쨍쨍한 날씨다. 서둘러 아침을 해 먹고 배낭을 챙겨 샘으로 내려가 얼굴에 물만 묻히고 또 출발이다. 어제 저녁에 비하면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가뿐히 촛대봉에 올라 갈 길과 온 길을 둘러 본다. 얼마나 왔는지는 알겠는데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까마득하다. 

천왕봉을 향 해 선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다. 연하봉 뒤에 자리한 천왕봉은 구름에 가려 살짝살짝 그 자태만 보여준다. 가까운것 같긴 하지만 약 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또 다시 행군이 시작 된다. 걷고 또 걷고 또 기면서 생각해 본다.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 길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누구일까? 지리산 유격대가 떠 오른다. 일본군에 쫓기던 빨치산이 행군을 하던 길. 해방 후엔 국방군에 쫓겨 달아나던 길. 그렇게 이 길이 만들어진 것일까? 만약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을지도 모를일이다. 이 험한 산길 만큼이나 험난했던 우리의 역사인데, 아직도 갈길은 먼데 오히려 뒤로 자빠뜨리고 있는 이 나라를 생각해 본다.  


장터목에서 잠시 쉰 후 드디어 마지막 코스인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 지친 몸이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 전의 길보다 경치가 더욱 좋아졌다. 웅장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기도 하다. 발바닥은 터질 것 같지만 한 걸음 한걸음에 힘이 실린다. 아! 드디어 천왕봉 정상이다. 장하다 우리 아들! 지리산 종주 종착지로서의 천왕봉이 아닌 네 인생의 앞으로의 출발지로서의 천왕봉이고자 한다.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품어 대한의 아들로서 멋진 네 인생을 개척해 나가길 바란다. 이번 지리산 종주는 이 아빠가 아들에게 만들어 주는 추억이자 선물이다. 

전란의 역사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살이 녹아 스며들고 남은 뼈를 담을 수 밖에 없었던 지리산. 총알이 날라들고 박격포탄이 터지며 화재로 산과 절이 불탈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냈던 지리산. 그 아픔의 역사를 뒤로 한채 말 없이 그 위용을 뽐내며 자신을 살찌우고 있는 지리산. 이 땅에 지리산이 있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 성삼재에서 천왕봉 그리고 다시 장터목으로 돌아와 백무동까지 37.5킬로미터의 1박 2일 종주 코스입니다.


태그:#지리산, #종주, #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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