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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두드려 맞았네
천장이 떨어져서 이 세상 이별했네/ 죽은 아 꺼내서 손발을 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름만 불러봤네/ 감독 놈은 몽두리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숯 담아내라 했네
- 조선인 탄광노동자의 구전 노래 중에서

아소 다로 일본 총리여.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집안이 경영했던 아소탄광에서 혹독하게 착취당했던 조선인들의 이 노래를. 죽어서도 고국을 잊지 못했던 우리 동포들이 석탄갱도에서 참혹한 심정으로 불렀던 이 노래를 아는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러면서 철저히 모른 척 할 것이다. 일제의 만행을 앞장서서 은폐하고자 하는 그대의 태도로 보아 그건 당연할 것이다. 허나 이것만은 기억하라. 그대가 일본 총리직에 오른 그 이면에는 1만 623명이나 되는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석탄박물관 전경
 석탄박물관 전경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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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묘지를 조문했던 방문단은 동포들이 실제 일했던 미쓰이타가와탄광으로 이동하였다. 후쿠오카현 타가와시 오아자 이타에 있는 이 탄광은 예전에 폐쇄되었는데, 현재는 석탄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후쿠오카에는 19세기부터 수많은 탄광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미쓰이타가와탄광도 그중의 하나이며 현 일본 총리인 아소다로 집안은 일본 내에서 9개의 탄광을 소유했던 석탄재벌이었다고 한다. 아소탄광은 수 만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갱도에 몰아넣은 집안이었다. 결국 아소 집안 곳곳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과 서러움이 켜켜이 묻어 있는 것이다. 방문단은 바로 그 역사적 현장을 찾아간 것이다.

방문단 모습
 방문단 모습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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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도착하니 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휴가묘지에서는 그토록 맑던 하늘이  어느새 가녀린 빗줄기를 뿌리고 있었다. 석탄박물관은 총 3개의 실내 전시실과 1개의 옥외 전시실, 그리고 별도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전시실에 석탄을 채굴하는 각종 장비와 채탄 장면 등이 실물 형태로 전시되어 있었다. 학예사로 보이는 일본인 직원이 일행을 인도하며 열심히 전시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나는 통역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탄광에서 강제로 일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직원은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겠지. 나는 씁쓸한 미소를 날리며 그의 곁을 지나쳤다.

1층 내부
 1층 내부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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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물관은 당시 발굴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방문단의 눈길을 끈 것은 남녀 마네킹이 석탄을 캐는 전시물이었다. 남자는 팬티 하나만을 입었고, 여자는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석탄을 캐고 있었다. 여자는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했던 이유는 굴속에 습기가 너무 많아 옷이 쉽게 젖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자는 주로 채탄작업을 했고 여자는 운반 작업을 맡았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부부관계나 모자관계가 많았는데, 위험한 작업을 하기 위해선 인간적인 친밀감이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도 일본의 최하층을 이루던 가난한 민중인 셈이었다. 

누워서 석탄 캐는 남자
 누워서 석탄 캐는 남자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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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반하는 여자
 운반하는 여자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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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들은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 전시실에는 당시 탄광촌의 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풍속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야마모토 사꾸메라는 일본인 광부가 52년간 근무하면서 기록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다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탄광생활을 일기와 그림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그의 관찰력에 놀랐던 것이다. 100년 전의 탄광촌 생활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라면서 일본인 직원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1층에서 봤던 사진보다 더 섬세하게 탄광노동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 저런 모습으로, 저런 심정으로 우리 동포들이 착취 받았다고 생각하니 그저 가슴이 먹먹할 밖에. 

갱도그림(실제론 무척 어두웠다)
 갱도그림(실제론 무척 어두웠다)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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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방문단은 제3전시실을 지나쳐서 바로 조선인 위령탑으로 가기로 했다. 1층 전시실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니 가랑비는 어느 새 굵은 빗방울로 변해 있었다. 탄광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된 목조주택의 처마에는 쉴 새 없이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주택. 그 벽에 달라붙은 회색 이끼에는 그 얼마나 많은 슬픔이 묻어 있었을까? 빗줄기 사이로 들려오는 수많은 아우성들. 십오세 소년의 시체를 옆에 두고 석탄을 캐야 했던 동포들의 비참함이 아우성치며 들려오고 있었다.
 
탄광노동자 숙소
 탄광노동자 숙소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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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전돌 바닥을 지나 조금 후미진 곳으로 들어서니, 저 멀리 약간 높은 곳에 일자형으로 만들어진 조선인 위령비가 보였다. 사각형의 화강석은 지난 세월의 물이끼를 품은 채 회색 구름 사이로 슬프게 서 있었다. 비문에는 '한국인 징용희생자 위령비'란 글자가 세로로 길게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조총련이 아닌 민단에서 세웠다고 한다. 누가 세웠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중요한 것은 이 머나먼 일본 땅에서 억울하게 숨져간 우리 동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한국에서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위령비를 마주한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작은 묵념을 올렸다. 비는 더 굵게 내렸고, 위령비에는 눈물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인 위령비
 한국인 위령비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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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가 설치된 곳은 탄광 내에서 가장 높은 위치라고 했다던가. 살아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가장 높은 곳에 살라는 의미로 이곳에 설치했다고 했지. 위령비 밑에 있는 11기의 무연고자 유골들은 과연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까?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심하게 겪었을 그님들은 과연 가장 높은 곳에서 한국과 일본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위령비를 뒤로 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선 곳에서 바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굴뚝 2개와 철제 수직 갱탑이었다. 아소 총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저 굴뚝과 갱탑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날렸겠지. 허나 너희들은 이걸 알아야 한다. 너희들의 명예와 부는 조선인과 일본 민중의 피바다 위에서 이룩한 것임을. 그 언젠가 일본과 한국, 세계의 역사는 너희들의 만행을 반드시 남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거대한 굴뚝
 거대한 굴뚝
ⓒ 김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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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로 가는 길에 그 일본인 직원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주장하고 싶었다. 아소탄광의 강제동원 실태와 희생자 유골 등에 관한 자료가 박물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만일 당신이 양심적인 학예사라면 그런 자료들을 박물관 1층에 전시해야 한다고. 아니면 최소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징용 사실만이라도 박물관 어딘가에 전시해야 한다고.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날렸다. 비는 더 거세게 내리고 있었고, 나의 씁쓸한 미소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잔잔히 부서져 갔다.

덧붙이는 글 | 국제신문에도 송고함



태그:#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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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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