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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 앞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
 13일 오후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 앞에서 만난 문정현 신부.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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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바라는 건 오만이고 과욕이야. 지가 뭔데 세상을 바꿔? 난 내가 혁명가라고도 못해. 그냥 하는 만큼 하다가 갈 데까지 가다가 도달 못하면, 거기까지 가는 거여. 성서에 보면 있잖아.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었어. 가나안에는 후손들이 들어갔지."

다른 용산 4구역 철거민과 범국민대책위 활동가들은 모두 "6개월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암담하다"고 하는데, 문정현 신부는 "언제까지인지 알면 이기지"라면서 "그래도 가나안 땅에 간다, 기필코 간다"고 말했다.

길 위의 신부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문 신부에게는 지는 것에 대한 내공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세가 그랬듯, 그는 광야에서 용산 '남일당성당'의 보좌신부로 생을 마칠 수도 있다. 끝내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갈 수 있을까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시작으로 '길 위의 신부'가 된 문정현 신부는 30년 동안 정부와 싸워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다. 특히 2년 전 대추리에서 입은 상처는 깊고 컸다. 그러나 그는 다시 용산에서 매일 촛불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벌써 넉 달째다.

그 사이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소속 이강서 신부가 용산으로 일주일 '피정'을 왔다가 교구 허가를 받고 용산에 눌러앉아 '남일당성당' 주임신부가 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용산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 앞에 농성장을 만들고 일주일간 단식도 했다. 신부들이 경찰과 주민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폭행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범대위 활동가들은 "문 신부님이 아니었다면 용산 사건이 묻혔을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철거민들은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문 신부는 "마침 다들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때 내가 온 거야, 뒤늦게 와서 미안하지"라고 말했다.

지난 6월 10일 저녁 '용산참사 140일 해결촉구 및 6·10항쟁 22주년 현장문화제'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추모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 문 신부가 보좌신부로 자리에 섰다.
 지난 6월 10일 저녁 '용산참사 140일 해결촉구 및 6·10항쟁 22주년 현장문화제'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추모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맨 오른쪽에 문 신부가 보좌신부로 자리에 섰다.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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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용산에 왔는가. 싸움꾼으로 인생을 보낸 문 신부지만 일부러 싸울 장소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은 제일 아픈 곳의 고통을 연민하도록 훈련받은 신앙인이고, 그리고 용산이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아픈 곳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그를 용산으로 불러낸 사람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 추기경 서거 소식에 밀려 용산에 대한 보도가 사라지자, 문 신부는 '이분이 용산을 안고 하늘로 가셨구나' 생각했고, 김 추기경 장례가 끝난 후인 3월 28일 꽃마차(내부를 개조한 문 신부의 차량)를 타고 용산으로 왔다.

그때가 마침 천주교의 사순절 기간이었다. 용산 유가족과 철거민의 모습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딱 겹쳐보였다. 애초 4월 부활대축일까지만 미사를 지낼 생각이었지만 그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농성장의 천막과 생활용품을 압수당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이 구타당하고 유족들이 체포되는 등 '용산 예수'들의 수난은 계속됐지만, 그럴수록 성당도 커졌다. 

문 신부는 "나는 자유인이야, 내가 있는 곳이 집이고 성당 같아"라고 했다. "남일당성당이 작은 곳이 아니여"라면서 자랑도 했다. 10여 명의 신부들이 상주하면서 매일 미사를 드리는데 적게는 50여 명, 많게는 300여 명의 신자가 모이는 그런 큰 성당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운동으로 평생을 보낸 그였지만 철거민 문제에 대해서는 이번에 새로 배우고 있다. "철거 문제가 어렵다는 것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던 그는 이제 "재개발 뒤 새로 지어지는 건물에는 15억~20억 원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지역에 남을 수 있는 주민은 10%밖에 안 되는데 나머지는 어디로 가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대도시마다 용산이 있고 서울에만 300군데가 넘는다"고 했다. 이번 싸움의 큰 목표는 한국 재개발 정책 전환이라는 것이다.

좀 더 작은, 그리고 최소한의 목표는 장례다. 하루빨리 유가족들을 삶의 터전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 않다. 검찰이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해 용산참사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용산 유가족, 제발 몸을 좀 아끼세요"

문정현 신부가 지난 2006년 7월 5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와 한미FTA 협상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을 시작하기 앞서 집회에 참석해있다.
 문정현 신부가 지난 2006년 7월 5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와 한미FTA 협상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을 시작하기 앞서 집회에 참석해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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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문정현 신부의 가장 큰 상처는 평택 대추리였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문 신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대추리 주민으로 살던 시절 그는 "살아서는 내 발로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2007년 4월 자기 발로 대추리를 나와야 했다.

2006년 군대까지 동원됐던 '여명의 황새울' 강제퇴거 작전 이후 주민들은 싸울 기운을 잃었다. 매일 자신을 찾아와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문 신부가 먼저 "견디기 힘들지?"라고 물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문 신부보다 먼저 지쳤고, 그는 주민들에게 차마 남자고 할 수 없었다.

당시 범대위에서는 주민들을 설득하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 신부는 "주민들이 지칠 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싸웠나?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자신도 괴로웠다. 매일 술을 마셨다. 그렇게 주민들의 마지막 이주까지 지켜보고 그는 마을의 들개 세 마리와 함께 대추리를 떠났다.

그래서 지금 용산에서도 그는 유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디 체력을 소모하지 말아라.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이건 당신들 투쟁이다. 당신들이 싸우는 만큼 나도 싸울 수 있다. 한번 넘어지면 몇 배는 힘들어진다. 제발 체력을 아껴라."

지난 6개월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더 긴 싸움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낙관적이었다. 간단하다.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엄혹한 유신 때도 싸웠지 않느냐"면서 지난 2007년 33년 만에 재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을 이야기했다.

"이번엔 5명이지만 그땐 8명이 죽었어. 사람이 납치되고 죽어나가도 어떻게 세상에 알릴 방법도 없었다고. 그때 고인들 시신 뺏기고 싸우다가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터미널에 내리니까 세상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워. 아무 일도 없는 거야. 못 이길 줄 알았어. 재심 때도 승소할 거라고 생각 못했어. 그래도 때가 되니까 그날이 오더라. 33년 만에."

그에게 물었다. "요즘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유신 때로 돌아갔다고 비판하잖아요. 아닌가요?" 문 신부는 "권력자의 마음은 그때로 돌아가 있지만 아직 유신 때만큼은 아니야, 계엄령도 선포할 수 있고 군대도 동원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암울한 듯했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힘이 예전과 다르잖아,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힘이 터져 나올 거야"라고 희망을 덧붙였다.

오히려 문 신부는 현재 상황을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보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도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고, 국가보안법 폐지도 실패하는 등 형식적 민주주의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후퇴를 계기로 그때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명박 정부의 시대는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그는 대추리를 나와서 마음을 잡으려고 몸을 혹사시켰다. 손에 익지 않은 목각도 하고 생전 안 해본 농사일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8년 1월 '작은자매의집' 원장직을 은퇴한 뒤 군산 미군기지 이전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군산은 그가 1997년 미군기지반대운동을 시작했던 곳이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보상금 5500만 원으로 집을 사서 기지모니터링도 하고 텃밭도 가꾸고 있다.

용산에 올라온 뒤로는 딱 세 번밖에 못 갔는데 다른 일은 전혀 못하고 먹고 자다가 돌아왔다고 했다. 이제 어지간한 강골인 문 신부도 체력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 경찰과 대치하다가 어깨를 다쳤는데 그게 영 낫지 않아서 팔을 들어올리기도 힘에 부친다.

올해 70세의 노(老) 신부는 용산참사의 유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순환식 공영개발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보고 갈 수 있을까. 그는 "할 때까지 하다가 가는 거지"라고 말했다. 용산의 싸움이 끝나면 군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 앞에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그의 집은 용산이다.


태그:#용산참사, #문정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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