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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줄 타는 거죠."

방송기자를 꿈꾸는 김지후(29·가명)씨는 요즘 유난히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햇수로 3년간 준비했던 꿈이 물거품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시험 준비가 덜 되어서 조바심이 나는 것이 아니다. 초조함의 이유는 올해 방송사 기자 공채가 없거나, 예년보다 크게 줄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다.

제아무리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그지만, 아예 채용 계획이 없다면 전혀 수가 없는 셈. "이틀에 한 번씩 방송국 홈페이지에서 채용 공고가 났는지 확인한다"는 김씨. 소문을 접한 김씨 주변의 몇몇 기자 지망생들 역시 이미 '패닉' 상태다.

6월에 공채 공고 내던 SBS, 왜 소식이 없니?

종로의 한 카페에서 스터디 그룹 모임을 갖고있는 방송사 지망생들
 종로의 한 카페에서 스터디 그룹 모임을 갖고있는 방송사 지망생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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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축된 경기 때문에 방송사가 어려워져서 신입 사원을 뽑네 안 뽑네' 하던 소문이 사실이 된 것은 올 6월. 지난 2008년엔 6월 초에 공채 공고를 냈던 SBS가 공채를 내지 않았고 결국 6월을 넘겼다. SBS 공채를 기다리고 있던 류정아(24)씨는 "막막하다"고 말을 꺼낸다.

"공중파 3사 중 하나가 시기를 넘겼으니 나머지 2개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다들 불안해하죠. 방송사 공채가 말 그대로 문이 좁고, '1년 농사'라서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실제로 SBS는 올해 채용이 완전 불투명한 상태. SBS 이홍근 인사팀장은 지난달 16일 <PD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상반기에는 채용 계획이 없고 2·3 분기 경영 상황을 지켜보고 뽑을 여력이 되면 하반기 늦게나 채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항상 8월 초에 공고가 뜨던 MBC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7월 1일, MBC 홍보팀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까지 공채 계획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혜영 MBC 인사부장은 <PD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보통 6월 정도에 채용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올해는 아직 채용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나마 지난해 48명을 선발한 KBS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인원을 뽑을 계획이라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KBS 관계자에 따르면, 7월까지 공채 규모를 정하고 8~9월 사이에 채용 공고를 낼 예정이다.

'지옥의 경쟁률' 2000명 지원에 한 명 뽑더니... 올해는?

방송국에 들어가는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사 전경.
 방송국에 들어가는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사 전경.
ⓒ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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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초조한 사람은 아나운서 지망생들이다. 작년 MBC 여자 아나운서 시험에 지원한 사람은 2000여 명. 그러나 최종 합격자는 1명에 불과했다. 타 방송사를 합쳐도 이른바 '공중파 서울권'에 속하는 여자 아나운서 합격자는 총 4명. 올해는 이보다도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지옥의 경쟁률'이다.

경쟁률도 경쟁률이지만 고가의 학원비, 의상비 등 시험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아나운서 준비 2년차인 조문주(25)씨는 "아나운서 준비생들은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나운서는 1차에서 카메라 테스트를 보니까 옷이나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죠. 혼자 하면 막막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학원에 다니는데 학원이 보통 석 달에 150~200만 원정도 해요. 비싼 데는 한도 끝도 없이 비싸고.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은데 이제 몇 명 안 뽑던 채용인원까지 더 줄어든다고 하니까 마음이 많이 불편하죠."

나이 많은 방송사 지망생들도 아나운서 지망생 못지않게 불안하다. 대부분의 방송사가 엄격한 기수제로 운영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는 '암묵적인' 나이 제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다니며 예능 PD를 준비 중인 유승렬(30·가명)씨는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더 고민이다.

"제가 알기로는 이 업계(예능 PD)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합격생이 31살이었거든요. 제 나이가 올해 서른이니까 간당간당 한 거죠. (뽑는) 사람도 적은데 올해 '올인'해보고 안 되면 공중파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장수생'은 안 돼"... 일과 공부 병행하는 고단한 삶

방송사 지망생들 사이에 돌고 있는 채용관련 소문. 마땅한 정보 창구가 없는 지망생들은 소문에 민감하다.
 방송사 지망생들 사이에 돌고 있는 채용관련 소문. 마땅한 정보 창구가 없는 지망생들은 소문에 민감하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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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좁아진 문 때문에 '장수생'이 되기 쉬운 방송사 지망생의 운명을 간파하고 미리부터 생활대책을 마련하는 경우도 많다.

드라마 PD 지망생인 김나희(26·가명)씨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케이블 방송국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해서 생업과 공중파 방송 준비를 병행하고 있다. 그는 "(방송국이) 워낙 들어가기 쉽지 않은데 점점 뽑는 사람도 줄어든다"며 "그래도 하고 싶으니까 우회로든 뭐든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와 같은 스터디 그룹에서 시사·교양 PD를 준비하고 있는 임재형(26·가명)씨도 마찬가지. 임씨는 "내년 졸업하면 과외교사나 관련업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3년은 꾸준히 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모든 방송사 지망생들이 '똥줄 타는' 것은 아니다. 아직 대학생이거나 나이가 적은 편인 방송사 지망생들은 그나마 '내년부터는 상황이 좋아질 수 있다'는 심적인 여력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방송사의 주 수입원인 광고 시장이 크게 위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저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터진 미국발 경제 위기의 여파로 올해 4월 KBS와 SBS의 광고 판매액은 각각 전년대비 약 20%가량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MBC는 전년 동기대비 광고 판매액 감소율이 41.9%라고 밝히며, 2015년까지 현재 인력의 20%를 줄이는 등 구조조정 실시를 골자로 한 비상경영체제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고시'가 아닌데도 들어가기가 너무 어려워 '언론고시'라고 부르는 방송사 시험. 갑작스러운 경제 위기로 한층 난이도가 향상된 언론고시의 좁은 출구는 당분간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태그:#방송사, #채용시장, #경쟁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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