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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참외는 노란 참외지만 그때는 개구리 참외였지요
 요즘 참외는 노란 참외지만 그때는 개구리 참외였지요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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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야기다. 그때가 아마 1959년인가 1960년이었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이었으니까. 그해 여름도 무척 무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는 용산구 동부이촌동에 살고 있어서 날마다 한강에 나가 살았다.

그 시절의 한강은 지금의 모습하고는 매우 달랐다. 한강 상류에 댐들이 거의 없었고 동부이촌동 앞의 한강 모습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었다. 한강대교 노들섬 위쪽으로부터 서부 이촌동에 이르는 북쪽지역은 어느 해수욕장을 능가하는 넓고 아름답게 펼쳐진 백사장이었다. 북쪽강가에는 키가 훌쩍 큰 포플러 나무와 땅콩밭도 있었다.

추억 속의 옛날 한강과 주변 풍경

당시 한강의 모습은 변화무쌍했다. 한강 상류지방에 비가 많이 내릴 때면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바다처럼 넓은 강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뭄이 심할 때면 물이 흐르는 강폭은 매우 좁아지고 백사장은 한없이 넓어졌다.

이촌동 쪽에서 강 건너 바라보이는 풍경은 여느 시골모습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노량진 쪽으로 흑석동과 중앙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동네가 바라보이고, 지금의 사당동 쪽으로는 동작동 국립묘지 너머 산자락에 자리 잡은 남성동이 제법 큰 마을을 이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반포 쪽에서 잠실에 이르는 지역은 논밭과 모래벌이 황량한 모습이었다. 이웃집 할머니는 잠실에서 작은 전마선으로 실어온 모시로 길쌈을 하기도 했고, 말죽거리 쪽에서 역시 작은 배로 실어온 참외와 수박이 리어카에 실려 마을 마당에서 팔리곤 했다. 참외는 요즘처럼 노란 참외가 아니라 녹색 바탕에 흰줄이 있는 개구리참외가 대부분이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우리 악동들 몇 명이 작당을 했다. 저녁을 먹고 역시 한강에 나와 물놀이를 하다가 누군가 갑자기 강 건너 참외밭에 참외서리를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한강에서 개헤엄에 익숙한 터라 강을 건너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동들 참외서리 작당을 하다

아무도 싫다는 친구가 없었다. 우리 악동들 다섯 명은 금방 모의하여 뭉쳤고 곧 실행에 옮겼다. 입고 있는 옷이래야 허술한 반바지에 러닝샤쓰 차림이었으니 그대로 입은 채 강을 건너기로 한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어렵지 않게 모두 강을 건넌 우리들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참외나 수박밭을 탐색했다. "저 앞쪽에 원두막 같은 게 보이는데 그리로 가보자?" 친구 하나가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모두들 허리를 굽혀 숙이고 조심스럽게 원두막이 있는 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쪽이야, 여기 참외밭이야."

맨 앞장을 섰던 친구가 작은 소리로 우리들을 불렀다 우리들은 됐구나 싶어 그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때였다.

번쩍! 머리 위로 불빛이 지나갔다. 모두들 깜짝 놀라 납작 엎드렸다. 불빛은 원두막에서 손전등으로 비추는 불빛이었다. 불빛은 참외밭을 한쪽에서부터 훑어 내리며 비쳐졌다. 그런데 전등불빛이 우리들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잘못하면 불빛에 노출될 염려가 있었다. 그때 바로 가까운 곳에 조금 움푹 들어간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숨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얘들아 저쪽이야" 내가 친구들을 이끌며 잽싸게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두들 기겁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장서 뛰어든 나와 친구가 흙바닥이 아닌 걸쭉한 액체 속으로 쑤욱 빠져 든 것이다. 순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우와! 똥통이다. 얘들아 나살려!" 정말 똥통이었다. 아니 똥웅덩이었다. 밭두렁 가에 웅덩이를 파놓고 똥을 모아놓았다가 삭혀 농작물의 거름으로 쓰는 똥이었다. 우리들의 낮은 비명 소리를 듣고 뒤따르던 세 명의 친구는 용케 빠져들지 않았다.

그래도 똥웅덩이가 그리 깊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들은 가슴까지 똥웅덩이 속에 잠기고 말았지만 더 깊었더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미터만 더 깊었더라면 똥웅덩이에 빠져죽는 참사가 발생할 뻔 했던 것이다.

참외 밭두렁 똥웅덩이에 빠지다

지독한 냄새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후각을 자극했다. 똥웅덩이의 겉면은 뜨거운 햇볕에 흙처럼 말라 있었지만 그 아래쪽은 썩어가는 똥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터뜨린 겉면과 우리 몸을 타고 오른 지독한 냄새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것이다.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똥웅덩이 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년들을

"아이쿠! 냄새!"

다행이 똥통에 빠지지 않은 친구들이 손을 잡아주어 밖으로 나왔다. 원두막의 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참외서리는 할 수 없었다. 참외고 수박이고 우선 지독한 냄새와 온몸에 뒤집어 쓴 똥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야! 냄새 지독하다, 빨리 집으로 가자!"

우리들은 똥냄새를 풍기며 다시 강가로 나와 강물에 뛰어들었다. 똥웅덩이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 세 사람도 손과 옷에 똥물이 튀어 냄새가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강물에 몸을 담그고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다시 강을 건너 동부이촌동으로 돌아온 우리들 중 한 친구가 집으로 달려가 비누를 가져다가 몸을 씻고 옷을 빨았다.

그런데 몸과 옷에 밴 똥냄새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팬티 하나씩만 걸치고 반바지와 러닝샤쓰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참외서리 하려다 아까운 러닝샤쓰와 반바지 한 개씩만 버린 셈이었다.

"야! 냄새난다, 가까이 오지마! 하하하"

그날 함께 참외서리 갔다가 운 좋게 똥웅덩이에 빠지지 않은 친구들은 그해 여름 내내 똥웅덩이에 빠진 우리 두 사람을 그렇게 놀려댔다. 그런데 그 지독한 똥냄새는 정말 며칠이 지나도 코끝에서 솔솔 풍기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래된 어린 시절 일이지만 내 일생에 그렇게 지독한 냄새 경험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냄새 나는 글, 응모글'입니다



태그:#소년 시절, #참외서리 , #이승철, #악동들, #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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