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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 전인 지난 1960년 4월 19일 광화문 경찰저지선. 시위대와 저지선의 간격은 불과 10미터였다. 이때 손에 든 권총을 휘두르며 경찰관들에게 시위대를 겨냥해 총을 발사하라며 미친 듯이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곽영주였다.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경무관 곽영주의 이 같은 지시로 경찰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무대의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시위대를 뒤쫓은 경찰은 사정없이 이들을 구타하면서 끌어갔다. 이날 경무대 앞의 시위 희생자는 사망 21명, 부상 172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피의 화요일'은 시작되었다.(4월 혁명 자료집-혁명재판)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경찰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경찰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 4.19혁명 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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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경무대 현역 경찰관 '곽영주'

4·19혁명과 관련된 곽영주의 전설적인 '권력횡포'는 잘 알려져 있다. 일제 때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헌병 하사관으로 해방을 맞이한 후 경찰에 투신, 자유당 말기 경무대 경호를 책임지는 경무관으로서 정치깡패를 교사하고 비호해 '피의 화요일'의 서막을 연 발포 명령자로서다.

곽영주와 관련된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적극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면서도 민주화의 발아기였던 1950년대에 끼친 해악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그 이후 군사정권 내내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검, 경, 그리고 국정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의 고질적 병폐인 '정치사찰'의 서막을 열었기 때문이다.

곽영주. 그는 1957년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로 장충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야당 집회의 정보를 빼내 자유당을 비롯한 요로에 알린 후, 이정재와 그의 부하 유지광을 동원해 이 집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방해한 바 있다.

5월 25일, 수만 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조병옥 박사의 연설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 4, 50명의 괴한들이 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괴한들의 난동이 이어졌지만 경호 경찰들은 팔짱만 낀 채 수수방관했다. 괴한들은 이정재가 거느린 '화랑동지회'의 회원들이었고, 동원한 사람은 다름 아닌 현역 경찰관 곽영주였다.

이 같은 곽영주의 정치개입은 점차 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 그는 1960년 4월 18일 오후. 시위를 마친 고려대 학생들이 돌아가던 도중 100여 명의 괴한들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학생들만 중경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이를 취재하던 기자 10여 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데모대를 습격한 깡패들은 곽영주 지도하에 있는 정치깡패들이었다.

곽영주의 이 같은 행위는 그 다음날 한층 더 심해진다. 마침내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4월 19일 학생 시위대가 경무대를 향하여 밀려오자 곽영주는 발포명령을 내렸다. 곽영주는 결국 이 같은 죗값을 그 자신이 교수대 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치러야만 했다. 1961년 12월 21일, 현역 경찰관 곽영주는 37살이었다.

2009년 6월 10일 서울광장에 되살아난 '곽영주'

지난 10일 밤, 49년 경무대 앞의 상황이 되살아났다. 이날, 서울광장 인근에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던 경찰이 뛰어가던 시민의 머리와 목을 방패로 가격하는 장면이 한 언론사에 의해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11일 <민중의소리>가 보도한 뉴스 동영상 속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방패를 맞은 시민들의 머리가 젖혀지고 거리에 나뒹굴었다. 여성들의 비명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폭행을 당한 시민들은 인도 쪽으로 뛰어가는 중이었고 손에 든 건 노란 풍선뿐이었다. 

또한 이들은 <칼라TV> 리포터와 카메라맨을 쇠파이프 모양의 30㎝ 길이 '삼단봉'을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이 같은 폭행 장면을 전하던 방송 리포터는 허벅지를 맞고 쓰러졌다.

4·19 자유당정권 정치깡패들의 손에는 도끼와 쇠사슬이 들려 있었던데 반해 2009년 진압복을 차려입은 이들의 손에는 다름 아닌 금속재질의 삼단 호신용 장비와 끝을 날카롭게 간 흉기와 다름없는 방패가 들려 있었다. 이들은 깡패는 아니지만, 하는 짓은 깡패나 다를 바 없었다.

<민중의소리> 홈페이지에 실린 폭행사진.
 <민중의소리> 홈페이지에 실린 폭행사진.
ⓒ 사이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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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정치깡패'와 '2009년 경찰 진압복 입은 이들'의 차이는?

1960년에 시위대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던 정치깡패들의 폭력행위와 2009년 현재 경찰복을 입은 채 경찰봉을 휘두르는 폭력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1960년,  경무대로 밀려들던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해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시위대를 폭행하면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까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바로 그 정치깡패와 2009년 현재 시위대를 촬영하는 기자들에게까지 진압봉을 휘두르는 자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를 게 없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을 보자. 동법 제10조에는 '경찰관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서 '경찰 장비를 임의로 개조하거나 통상의 용법과 달리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중범죄자나 무기사용이 있는 상황에서의 경찰의 무기사용의 경우를 적시하며 이를 최소화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찰장비관리규칙 제82조에는 '진압장비중 방패, 전자투명방패, 진압봉, 최루탄발사기, 최루탄, 근접분사기, 가스차, 살수차 등은 사람의 생명·신체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장비로 경찰관서장의 책임 하에 특별한 관리를 요한다'면서, 방패의 경우 '가장자리로 상대의 머리 등 중요부위를 찍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진압봉의 경우에는 '시위대의 머리·얼굴을 직접 가격하지 않도록 한다'고 각각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10일 경찰들이 이 같은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했던 49년 전 그 '정치깡패'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경무대에 앉아 시위대를 두들기라고 전화기에 외치던 1960년 4·19 당시 경무관 곽영주와, 6·10 행사를 치르던 시위대를 진압하라며 무전기에 외치는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의 무슨 차이가 있는 지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찰, #곽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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