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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출판한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앞표지
 도서출판 민음사에서 출판한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앞표지
이남에 득실거리던 도둑고양이들은 씨가 말랐다. 이북 사내들이 그물과 덫으로 도둑고양이들을 잡아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라든가 동네 공터 등에서 껍질을 벗기고 구워서 술안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들이 그러고 있는 광경이 어느 가위 눌림보다 괴로웠기 때문이다.(…)다만 그 어른들의 면면과 취향이 다소 바뀐 것뿐인데 이남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난 자화상에 언제나 그랬듯 오리발을 내밀고는 역겨운 엄살들을 떨었다. (76-77쪽)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되었다. 혹은 남조선과 북조선이 통일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주체사상, 북한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허망함과 분노, 모멸감으로 가득한 북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을 증오하고 무시하는 남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챙기려 드는 사람들과 더 이상 생각이라는 걸 거부하게 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의해 흡수 통일된 한반도'라는 설정 아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이 그려내고 있는 통일 한반도, 통일 대한민국은 바로 디스토피아(dystopia)의 세계. 조지 오웰이 그려낸 <1984년>보다 잔인하고 끔찍하고 참담하며 헉슬리가 그려낸 <멋진 신세계>보다 차갑고 쓸쓸하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남다른 의미이자 여타의 디스토피아 소설과 차이를 둘 수 있는 것은 바로 통일 한반도라는 배경 아래 설정된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의 리얼함이다.

"함경도에서는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묻어 둡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그 삶은 계란을 남겨 주는 양을 보고 신랑이 신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하는 거죠. 신랑 집에서도 그래요. 신부 밥 속에 삶은 계란을 넣어 두고 신부가 식사를 마쳤을 때 그 계란의 남은 모양을 확인한 다음에야 신랑이 식사를 시작해요."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서로가 서로의 신랑과 신부가 됐더라면 이런 나라이진 않을 텐데.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만은 분단이 되지 않았을 텐데. (203-204쪽)

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며, 누군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문제는, 나라의 큰 어르신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 국민장을 치르고 있는 이 때에 한민족임을 자처하는 그들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보며 과연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처럼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회의 더불어 분노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그네들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서방과 우리나라의 경제 제재행태를 두고 비윤리적, 반인권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이토록 황망한 때에 동해 바다를 향해 미사일을 쏘아대는 그들 역시 비도덕적, 반사회적이라고 비난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삶은 계란을 남겨 주는 함경도의 신랑과 신부처럼. 너무나 난해하고 멀고도 험난한 문제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변화 그 자체였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존재가 강하고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작은 알이 거대한 물고기가 됐다가 또 거대한 새가 되는 변화. 거대한 새란 자기를 초월해 위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자다. (212쪽)

혁명, 폭동, 전쟁…. 저자 이응준은 주인공 '리강'의 입을 빌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해악한 것이며 부질없는지를 설명한다.

폭동의 본질은 동기가 아니라 증오의 폭발 그 자쳅니다.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쟁도 그래요. 전쟁 전에는 명분을 들먹이지만 전쟁이 진행되다 보면 명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냥 작동되는 겁니다. 폭력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다. 폭동이나 전쟁이 아닌 사소하고 작은 것으로부터의 변화.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다급하게 재촉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러한 때에 자중해 줄 수 있는 그들의 변화를 바란다.

다섯 살 아이가 밝힌 촛불을 범법 행위로 몰아붙이고 스스로 끄게 만드는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이 아닌 그 아이를 목마 태웠던 부모에게 길을 열어주는 따뜻하고 넓은 마음으로의 변화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은 2009년 4월 10일에 발간됐습니다.



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민음사(2009)


태그:#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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