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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금) 오후 순례 때는 다른 참여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맨 뒤에서 순례를 했다.
▲ 또 한번의 오체투지 순례 참여 지난 23일(금) 오후 순례 때는 다른 참여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맨 뒤에서 순례를 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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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러 가지로 분별이 없는 세상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세상이다. 상식과 양식을 깔아뭉개고, 아집과 술수와 억지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다. 염치도 없고, 중구난방에다가 뭔가가 비비꼬이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살자니 덧없음과 허무함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다. 오랜 세월 땀 흘리고 피 흘리며 한 걸음씩 더디고도 어렵게 진척시키고 발전시켜 왔던,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존립케 하는 이런저런 가치들이 너무도 쉽게 허물어지고 뒷걸음질치는 현상에서 아연함과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허무감은 쉽게 자포자기에 빠지게도 하고, 패배감을 부르기도 한다. 슬픔과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라는 이방원의 시조 구절이나 읊조리면서 그럭저럭 살자는 체념적인 생각이 나를 무기력 속으로 끌어가기도 한다.

허무감과 체념과 무기력증 속에서 거의 매일 오체투지 순례를 떠올리곤 한다. 허무감과 체념과 무기력증을 의식하다보면 자연발생적으로 오체투지 순례 생각이 떠오른다. 절망 속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 '희망의 끈' 같은 것이 거기에 있음을 절감하고 확신하게 된다.

오체투지 순례는 절망 속에서 한사코 희망의 끈을 붙잡고 나아가는 몸부림이다.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험난한 길인가를 온몸으로 새기고 체현(體現)하는 일이다. 마구 무시되고 모멸되고 깔아뭉개지는 '사람·생명·평화의 길'을 세상에 존재케 하고 세상과 소통시키기 위한 순교자적인 희생과 헌신이다.

엎드려 있는 3,4초 동안 입속으로 하느님 소리를 수없이 뇌었다.
▲ 순례는 기도임을 명심하며 엎드려 있는 3,4초 동안 입속으로 하느님 소리를 수없이 뇌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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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순례를 생각하면 희망이 생기고 힘도 솟는다. 하루 1천여 번씩 온몸을 땅과 밀착시키며 서너 걸음씩 나아가는 그 고통스러운 체현 속에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조금씩 열리게 되고, 또는 그 길이 이 세상에 끝내 존재케 되리라는 생각으로 절로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오체투지 순례를 생각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불편해지는 현상을 감내하곤 한다. 지난해의 1차 순례(9월 4일 지리산 노고단∼10월 26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에 이어 올해 3월 28일부터 2차 순례를 시작하여 현재 도합 80여 일째 오체투지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문규현 전종훈 두 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을 생각하면, 이렇게 편안히 앉아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죄스러워지는 느낌이다.

몸 건강이 정상이 아닌 탓에 집에서 글 짓는 일을 하면서도 가끔씩 거실 소파에 눕곤 하는데, 사지의 편안함을 즐기다가도 문득 오체투지 순례를 떠올리면 죄스러운 느낌 때문에 얼른 몸을 일으키곤 한다.                    

<2>

마음 같아서는 자주 오체투지 순례 지점으로 달려가서 하루 한 나절만이라도 동참을 하고 싶다. 세 분의 순례를 조금이라도 거들어드리며, 그 엄청나고도 장엄한 기원의식(祈願儀式)에 잠깐씩이라도 참례를 하고 싶다. 세 분의 그 초인적인 고행을 내 눈으로 지켜보며 여러 번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소중한 '덕목(德目)'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해 1차 순례 때는 병상생활을 하고 난 뒤라 10월 25일 하루만 가족과 함께 참여했을 뿐이어서 아쉬운 마음 컸다. 올해 2차 순례 때는 최선을 다해 여러 번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단 한 번의 참여로 그치고 있다.

하루 천여 번씩 오채투지를 하시는 문규현 신부님이 내 건강 상태를 물으시며 웃으시는데, 검게 그을린 얼굴이 빛나 보였다.
▲ 문규현 신부님의 웃음 하루 천여 번씩 오채투지를 하시는 문규현 신부님이 내 건강 상태를 물으시며 웃으시는데, 검게 그을린 얼굴이 빛나 보였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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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25일에도 참여할 계획이었다.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고교 동창 친구의 자혼(子婚)이 있어서 온양엘 가게 되었는데, 점심식사를 마치는 대로 온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택으로 달려가 오후 한두 시간만이라도 참여를 하고 올 생각이었다.

병상생활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먼길 나들이를 할 때마다 부부동반을 하곤 하는데, 25일이 마침 '놀토'여서 어머니로부터 아내를 동반하는 것까지는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오체투지 순례도 하고 저녁 늦게 돌아오리라는 것에는 어머니가 허락을 하지 않으셨다.

별 수 없이 온양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노인네를 모시고 사는 일에서 덕을 보는 것도 많지만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음을 다시 의식해야 했다. 더구나 몇 년 전에 상처한 동생과, 데리고 사는 조카아이들의 뒷바라지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놀토' 같은 날에도 그 일을 노인네에게만 맡긴 채 부부 함께 먼길 출타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 속에서도 애써 기회를 잡아 오체투지 2차 순례에는 몇 번 참여할 생각이다. 순례 지점이 서울에 가까워지거나 서울을 지날 때는 마포구 합정동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아이들의 자취방을 이용하면서 이미 오체투지 순례 경험이 있는 아이들과 함께 순례를 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꼭 부부동반을 하지 않아도 될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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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쉬는 동안에 인천교구의 호인수 신부님이 문규현 신부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호인수 신부님의 격려 잠깐 쉬는 동안에 인천교구의 호인수 신부님이 문규현 신부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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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목)은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개교기념일이었다. 아내가 근무를 쉬는 날이어서 일찌감치 부부동반 오체투지 순례 참여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갈등이 없지 않았다. 23일은 안면도 국제꽃박람회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내게는 충청남도에서 보낸 두 장의 초대장이 와 있었다. 하나는 예총 지부장에게로 온 것이고, 또 하나는 내 개인에게로 온 것이었다.

초대장이 두 장이어서 아내와 함께 꽃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의 갈등도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과감히 오체투지 순례를 선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꽃박람회 개막식 행사보다 수십 명에서 많아야 백 명 정도 참여하는 조촐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이 지속되는 오체투지 순례 참여가 우리 부부에게는 더욱 값진 일이었다.

(나는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의 성공을 돕기 위해서 고엽제전우회의 '자원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고, 필요한 경우를 대비하여 입장권도 20장이나 예매로 확보해놓았다. 그런데 개막식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참석했던 이들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참석과 관련하여 꽃박람회장 안팎에서 여러 번 몸 검색을 당해야 했고, 심지어는 유모차 안의 아기 젖병까지 검색을 하는 상황 속에서 모두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전 날인 22일 오후 천안을 거쳐 밤에 일단 서울로 올라갔다. 모처럼 만에 아이들 자취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잠을 잤다. 그리고 23일 오전에 오체투지 순례 지점인 천안시 성환읍으로 내려갔는데, 아이들을 동행시키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두 아이 모두 시험 기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평일인데도 서울의 강변북로와 수원까지의 경부고속도로가 너무 막히는 통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며 고생을 해야 했다.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했는데, 오후 1시쯤 경부고속도로 기흥휴게소에 겨우 닿아 점심식사를 하고, 2시쯤 성환읍의 끄트머리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오후 순례에 참여했다.          

또 하루의 순례를 마친 다음 세 분 성직자와 참가자들이 함께 타원 형태로 둘러서서 마침의식을 거행했다. 모두 합장을 하고 명상을 할 때 나는 눈물이 났다.
▲ 23일 순례의 마침의식 모습 또 하루의 순례를 마친 다음 세 분 성직자와 참가자들이 함께 타원 형태로 둘러서서 마침의식을 거행했다. 모두 합장을 하고 명상을 할 때 나는 눈물이 났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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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는 아내는 처음부터 오체투지는 하지 못하고 뒤에서 허리를 굽히는 방식으로 순례에 참여했다. 나는 몸이 온전치 않은 상태지만, 세 분 성직자가 하루 1천여 번씩 오체투지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100번 정도는 오체투지를 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겨우 두 마당만 오체투지를 할 수 있었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헤아려 보니 한 마당에 서른 번 정도 엎드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고작 60번 정도 오체투지를 한 셈이었다. 불행히도 나는 통풍 환자였다. 요산의 준동을 막기 위해 음식 가리는 일에 철저히 신경을 쓰건만, 전날 저녁 천안에서 먹은 음식에서 요산이 발생했는지, 오른쪽 팔꿈치 부위에서 통풍발작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침과 점심 식사 후 약을 먹었는데도 약효는 오리무중이었다.      

힘이 드는 것보다도 오른쪽 팔꿈치 부위의 통증 때문에 오체투지를 지속할 수가 없었다. 두 마당, 60번 정도로 오체투지를 접고 뒤에서 허리를 굽히는 방식으로 순례에 참여하며 나는 눈물을 머금었다.

서울과 임진각을 거쳐 북한의 묘향산까지 갈 목표로 80여 일째 오체투지 순례를 계속하고 있는 두 분의 신부님과 한 분의 스님, 세 분의 성직자에 대해 갖는 무한한 감사와 존경심, 그 경이적이고도 초인적인 의지에 대한 경탄이 절로 눈물을 머금게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신병 때문에 마음껏 오체투지에 동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프고 한스러워서 더욱 눈물이 솟았다.

두 분 신부님은 나를 보시자 건강부터 묻고 무리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하루 1천여 번씩 오체투지를 하시는 분들이 내 건강을 염려하시니 죄송스럽고도 무안한 마음 한량없었다. 수경 스님은 고마워하시는 표정이면서도, 지난 2003년의 '삼보일배' 후 수술까지 한 무릎의 통증 때문인지 지난해보다 한결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26일의 순례는 충청남도와 경기도의 경계인 안성천의 긴 다리를 건넌 지점에서 종료되었다. 참가자 모두 타원형으로 둘러서서 마침 의식을 거행했다. 합장을 한 채로 다짐과 명상을 하고 서로에게 오체투지로 큰절을 한 다음 세 분의 성직자는 차례로 일행 사이를 돌면서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루 한 나절의 오체투지 순례를 마치고 떠나올 때 전종훈 신부님이 오히려 내 건강 걱정을 하며 격려를 해주셨다.
▲ 전종훈 신부님의 격려 하루 한 나절의 오체투지 순례를 마치고 떠나올 때 전종훈 신부님이 오히려 내 건강 걱정을 하며 격려를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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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 '평택연대'에서 제공한 화채로 목을 축인 다음 우리 부부는 내 승합차에 올라 태안으로 출발했다. 차를 몰면서 나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직까지는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한 태안 사람들은 우리 가족뿐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가족을 배태한 태안은 이미 명예를 얻고 있을지도 몰라."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일 테지만, 아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그:#오체투지,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 #수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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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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