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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도 오후에는 두 시간 정도 걷기 운동을 한다. 걷기 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인 필수다. 묵주기도를 하기 위해서 귀찮음을 감내하며 걷기 운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냥 걷기 운동만 한다면 한갓 무미건조하고 덧없는 일일 터이다. 걷기 운동을 하며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실체를 내게 안겨주는 일이다. 아무튼 하루 두 시간 걷기 운동에 묵주기도 40단 '실적'을, 그 '기본'을 잘 이루어가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걷기 운동을 하며 묵주기도를 할 때마다 한숨을 쉬곤 한다. 얼마 전에 잃어버린 묵주 생각이 절로 나기 때문이다. 묵주 알이 유난히 옹글고 단단하게 생긴, 적당한 크기의 질감 좋은 묵주를 그만 잃어버린 아쉬움이 자꾸만 나를 한숨짓게 한다.

 

 지난 6일(월) 오후의 일이다. 그 날은 평지 걷기 운동을 하지 않고 백화산 등산을 했다. 개나리와 진달래 등 봄꽃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며 백화산 동편 줄기를 중간쯤 오른 다음 호구령(虎口嶺) 쪽으로 빠져서 냉천골로 내려왔다. 그리고 문예회관 주차장에다 놓았던 차를 가지고 마누라 퇴근 시간에 맞춰 인근 백화초교로 갔다. 그렇게 차 운전을 하면서도 내 한 손에는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마누라를 퇴근시켜 주면서 농협 동부지점에 들렀다. 작은 통장 가방을 들고 농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내 한 손에는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자동출납기 앞에서 묵주를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그냥 자동출납기의 머리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자동출납기의 판판한 머리가 잠시 동안 묵주를 올려놓기 좋게 생긴 탓이었다.

 

 나는 서울의 한 한의원에 신장약 한 달 분 값을 송금하고, 최근 전화 주문으로 구입한 차동엽 신부님의 신간 저서 <뿌리깊은 희망> 1권 값을 송금했다. 며칠 전 서울의 대학생 아이들에게 보내준 생활비와 용돈을 아이들이 어떻게 쓰고 있는지, '통장정리'로 확인하는 일도 했다. 예정했던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처리한 셈이었다.

 

 그리고 통장 가방을 잘 챙겨들고 농협을 나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내는 '대전주보'를 읽고 있었다. 나는 성큼 운전석에 올랐고, 아내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며 곧 차를 몰았다. 농협 자동출납기 머리 위에다 묵주를 놓은 채 그냥 나온 사실을 까맣게 몰랐고, 5분쯤 후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놓고 내릴 때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아내는 지금 즉시 다시 갔다 오라는 말을 했다. 아내 말대로 그랬어야 했다. 자동차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귀찮은 것을 느끼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묵주는 남이 욕심을 낼 그런 물건이 아니야. 거기에 그대로 있을 거야. 오늘은 화요일, 저녁에 성당에 가는 날이야. 저녁미사에도 참례해야 하고, 레지오 모임도 해야 하고…. 이따 성당 갈 때 들러가면 돼."

 

 "그때까지 묵주가 그대로 있을까요? 너무 무리한 기대일 것 같은데…."

 

 아내는 걱정스런 기색이었다. 나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미상불 나만의 기대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묘한 기대를 접고 싶지 않았다. 그 기대를 신뢰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7시쯤 동생이 왔다. 4년 전 상처(喪妻)를 한 이후로는 형 집에다 아이들을 맡겨놓고 형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가는 동생이다. 서둘러 식사를 하고, 학원에서 8시쯤에나 돌아오는 조카아이 규빈이의 저녁은 어머니께 맡기고, 우리 부부는 성당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예정대로 농협 동부지점을 들렀다. 차에서 내려 자동출납기들이 여러 대 있는 곳으로 들어서며 나는 바짝 긴장을 했다. 네 번째 자동출납기 위에 묵주가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상한 확신이기도 했다.

 

 그런데 네 번째 자동출납기 머리 위에 묵주는 없었다. 양옆의 좁은 틈서리에도 없었다. 나는 실망을 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덟 대의 자동출납기들을 모두 살펴보았고, 실내 구석구석은 물론이고 쓰레기통 안도 뒤적거려 보았다. 하지만 묵주는 없었다. 누가 가져간 게 분명했다.

 

 나는 맥없이 차에 올라 운전을 하면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주절거렸다.

 

 "자동출납기 위에서 묵주를 습득한 사람이 어쩌면 점포 안으로 갖고 들어가서 농협 직원들에게 맡겼을지도 몰라. 농협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시간에 묵주를 습득했다면 내일 가지고 와서 사무실에 맡길지도 몰라. 또 만일 천주교 신자가 습득을 했다면, 성당에 갖고 가서 사무실에 맡길지도 몰라."

 

 "꿈도 야무지시네요.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지만 나도 그런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으니, 내일 다시 들러보기로 해요."

 

 그 날 저녁미사 후에 가진 레지오 모임 때는 다른 묵주를 사용해야 했다. 다른 묵주로 묵주기도를 하면서 자꾸만 그 묵주 생각을 했다. 농협 자동출납기 머리 위에 놓여졌던 묵주가 무시로 눈에 밟혔고, 묵주가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자동출납기의 머리 형체가 계속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놓고 내릴 때 묵주 생각을 했으면서도 즉시 되돌아가지 않았던 실책이 자꾸만 나를 한숨짓게 했다.

 

 다음 날 나는 아내를 출근시켜 주고 돌아오면서 농협 동부지점을 들렀다. 막 출근해서 업무 준비를 하는 직원들에게 잔뜩 기대를 머금고 "어제 저녁 무렵에 묵주를 맡긴 사람이 없는가?" 물었다. 직원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도 한 명 있고, 모두들 묵주가 뭔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관하고 있는 묵주는 없었다.

 

 "혹 오늘 낮에,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그 묵주가 와서 맡겨질지도 모르니, 그런 일이 생기면 내게 즉시 연락 좀 해주세요."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기대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묵주는 농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농협 동부지점에 전화도 해보고 직접 들러보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묵주를 천주교 신자가 습득을 했다면 성당 사무실에 맡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무장에게도 얘기를 했고, 12일 '예수부활대축일'까지는 기다려봐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예수부활대축일과 전 날인 '성토요일'의 '성야 전례'에는 신자들이 가장 많이 오니, 혹 내 묵주도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기대는 모두 허사가 되었다. 묵주는 성당 사무실로도, 농협 동부지점으로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앞으로 언제 어느 날 그 묵주가 어디로든 돌아오는 놀라운 사건이 생겨날지도 모르긴 하지만, 현재까지는 감감 무소식이다.

 

 어제(21일/화) 저녁 성당에서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 건망증과 실수로 묵주를 잃어버린 지 보름이 지났지만, 언젠가는 그 묵주가 내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도 그 묵주 생각을 지우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농협 자동출납기 위에서 묵주를 습득한 어떤 사람이 그 묵주 때문에, 그게 무슨 물건일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하느님을 알게 되어 천주교 신자가 될지도 몰라. 그런 사건에 대한 기대가 가장 큰 이유야.

 

 또 하나는, 그 묵주가 어떤 광적인 개신교 신자의 손에 들어간 게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야. 일부 편협하고 광적인 개신교 신자의 눈에는 그 묵주가 '우상숭배'의 실체로 간주되어서 그만 불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경우는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야. 예수님의 형상이 모셔져 있는 천주교의 십자가 고상(苦像)을 우상숭배의 실체로 간주한 나머지 그걸 불 속에다 집어넣은 개신교 신자들도 있었거든. 불교 사찰의 불상에 손상을 가하는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테고…."

 

 언젠가 공주 친정에 갔을 때, 큰 길 바로 옆 담 너머에 있는 공주 교동성당 성모상이 개신교 신자들이 투척한 똥으로 더렵혀졌던 사실을 목격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아내는 내 얘기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농협 자동출납기 머리 위에다 올려놓은 묵주를 깜빡 잊은 내 건망증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그 사실을 안 순간 즉시 농협으로 달려가지 않은 내 실수가 얼마나 후회되는지 모른다. 정말로 내 죄가 크다.

 

 건망증이 점점 더 심해진다. 자동차 열쇠를 집에 놓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경우도 여러 번인데,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초면인 귀하신 이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 내가 모자를 쓰고 있는 사실을 모른 나머지 그냥 모자를 쓴 채로 인사를 하고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는 스스로 무안해한 적도 여러 번이다.

 

 건망증의 심화 속에서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비록 건망증의 심화 때문에 이제는 묵주까지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었지만, 매일같이 기도하는 일만은 잊지 말자. 지조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저 이름 있는 사람들의 노추(老醜)는 닮지 말자. 비록 건망증은 심화되더라도, 내 건망증이 저 노추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도록 하자.

 

 이 정신만큼은 잃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면, 내 건망증이 결코 부끄러운 것은 아닐 게다. 내 건망증은 오히려 저 노추들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일 터인즉…. 


태그:#건망증, #묵주기도, #노추,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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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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