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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노동자들이 2009년 3월 26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국제 악기쇼 현장에 콜트콜텍 투쟁을 알리기 위해 원정투쟁을 떠났습니다. 이 길에는 한국의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도 함께 했습니다. 독일 원정 투쟁에 함께 한 콜텍악기 이인근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하얀 설원 저 산 깊은 곳 나뭇가지에 활짝 핀 눈꽃 속에 우리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묻어 버릴 수는 없을까? 세상의 모든 것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듯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우리들의 이 투쟁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그 끝이 있겠지만 아무리 걸어도 이 길의 끝은 보이질 않는다.

 

길거리에서 천막에서 철탑 위에서 헤매다보니 어느덧 또 한 번의 춥고 힘든 겨울이 지나가고 세상의 모든 식물과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은 왔지만, 자본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노동자의 가슴 속에는 세상의 봄도 비껴가는 듯 여전히 찬바람만이 맴돌 뿐이다.

 

2년의 투쟁 기간!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시간이었지만 콜트·콜텍의 자본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노동자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지난 시간 동안 노동자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죽는 것 말고는 해 볼 수 있는 투쟁은 모두 해 보았지만, 콜트·콜텍의 자본은 살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이 노동자들을 더욱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지난 2년의 투쟁으로 콜트, 콜텍의 노동자들은 모두 지쳐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일하고 싶다"는, 아니 반드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CORT' 기타에 울려 퍼지는 노동자들의 피울음소리를 아름답고 환상적인 선율로 바꾸겠다는 목표가 있기에 지친 몸뚱이를 다시 추슬러 세계적인 악기 쇼가 열리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팔자에 없는 독일 나들이를 떠나려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래 전 한 축구 선수로 인해 우리에게 친숙해진 나라와 도시 이름이다.

 

노동자로서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동지들과 문화예술인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준 노동자들의 피 같은 소중한 여비로, 콜트·콜텍 자본의 반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탄압을 세계인에게 알리기 위해 우리는 그 악기 쇼 행사장을 향해 팔자에 없는 독일 나들이를 떠난다.

 

10년! 20년!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혼을 심고, 그들의 피와 땀으로 만든 기타를 팔아 1200억원대의 갑부가 된 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을 전 세계의 음악인과 악기제조인, 그리고 악기 판매상에게 알리기 위해 비록 어렵고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우리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주는 많은 동지들의 뜨거운 가슴을 안고, 얼굴색도, 언어도 다른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간다.

 

십수 년 창문 하나 없고, 나무먼지로 뿌연 공장안에서 하루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화장실 한 번 맘 편히 가보지 못했던 그 곳의 노동자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들의 몸뚱이가 망가져 가고 있는 것조차도 모른 채 오로지 회사의 발전이 우리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던 그 시절. 이제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바보 같은 삶을 살았던 시절이었다.

 

이제 그 바보들이 독일로 간다. 그 바보들이 살아온 그 바보 같았던 삶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CORT' 기타의 그 소리는 바로 그 바보들의 울음소리임을 알리기 위해……. 이 바보들이 울음소리를 멈추고 아름답고 황홀한 선율로 노래할 수 있게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임을 호소하기 위해 나는 팔자에도 없는 독일 나들이를 떠난다.

 

이들은 왜 독일원정길에 올랐나

전 세계에 유통되는 기타의 1/3을 만들어 왔으면서도 기타 한 대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닫아놓은 공장 안에서 쉴 새 없이 알을 까내야 하는 양계장의 닭처럼 시름시름 병들어 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계톱에 손가락을 잘리고,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유기용제를 마시며 일하다 기관지염과 천식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쁜 자개 문양을 달고 전 세계로 나가는 기타들을 볼 때면 흐뭇해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여년 밤낮없이 기타만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의 노동을 통해 콜트콜텍 박영호 사장은 12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았습니다. 2006년 기준 한국부자 순위 120위입니다. 그러나 회사는 1993년 인도네시아 공장과 1999년에는 중국 공장을 설립하고는 천천히 한국 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습니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 했고, 2007년 7월에는 대전 계룡시에 있는 콜텍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 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구조조정에 항의해 2007년 12월 콜트악기 노동자 이동호 씨가 분신했지만, 아랑곳 않고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위장폐업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 잃은 이들은 문 닫힌 공장을 지키며 2년여에 걸쳐 싸우고 있습니다.

 

2006년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기 전까지는 아침 7시 30분까지 서로 경쟁하듯 나와 일하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2006년 노조가 만들어지고 12년 만에 가장 높게 임금인상이 되었는데 이 때 일당이 2006년 최저임금 시급보다 백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2008년에는 한 달여 동안 한강변에 있는 수십 미터 송전철탑에 올라 고공단식 농성도 해봤고, 본사점거농성을 들어갔다가 곧바로 출동한 경찰특공대들에게 진압당해 전원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부디 공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일하며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소망이 이 이번 원정투쟁을 통해 풀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송경동 시인 /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노동자들


태그:#콜트콜텍, #독일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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