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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넘실거리던 2월의 마지막 날, 자전거를 타고 성산대교에서 홍제천 물길을 거슬러 서울 서대문구 홍은3동 백련산에 자리한 백련사를 찾아갔습니다. 자연형 하천공사가 벌어지고 있던 홍제천은 예전과 달리 꽤 많은 물이 시원스레 흐르고 있었고, 그 물길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와 자전거도로에는 많은 시민들이 한낮의 여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육중한 내부순환도로 그늘아래 그 낯선 물길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 서대문구청쯤 이르러 모래내길에 자리한 서대문등기소에 이르렀습니다. 서대문등기소에서 홍연초등학교를 지나 백련사로 오르는 길과 마주했는데, 한 450m정도 되는 길이 한없이 하늘로 뻗어 있었습니다.

 

그 오르막을 버스도 아슬아슬하게 내려오고 있었는데 경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대단했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오른 오마이뉴스 기자는, 이 백련사길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가파른 길이라고 했습니다.

 

 

 

짧은 오르막인 줄 알고 기어를 바꾸지 않고 오르다가 그만 주저앉았다가 다시 기어를 가볍게 해서 오르막 마지막까지 오르는데 숨이 턱턱 막혀왔습니다. 북악산 산길은 저리가라 할 정도였습니다. 이 백련산 오르막길을 하루에 수 십 번만 오르내리기만 해도 저절로 득도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자전거로 오르막을 오르는 것은 그 자체가 구도자의 고행과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공들여 오르막에 올라서니 백련산 일대 그러니까 서대문구 홍은동과 응암동, 북-남가좌동, 연희동 일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은 작은 소형주택들로 빽빽한 북가좌동 일대는 응암동처럼 재개발이 된다고 하고, 이미 여기저기 치솟은 삭막한 아파트단지들도 눈에 띄였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한라봉을 까서 타는 목을 달래고는 다시 페달을 밟아 응암동으로 넘어가기 전에, 신라 경덕왕 6년(서기 747년)에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정토도량인 백련사를 찾아갔습니다.

 

백련사는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아미타경 말씀 중 "누구든 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말씀을 따라 진표율사가 부처님의 정토사상을 널리 펴기 위해 백련산에 사찰을 지었다고 합니다. 백련사의 원래 사명은 정토사로, 이곳이 바로 부처님이 계시는 엄정한 땅이라는 의미라 합니다.

 

조선 정종 원년 무학왕사의 지휘로 함허화상이 크게 중창하였고, 세조의 장녀인 의숙공주가 부마인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원찰로 정하면서 사명이 백련사(하얀 연꽃)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백련산이란 산이름도 사찰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백련사 경내에는 무량수전과 원통전, 약사전, 칠성각, 독성각, 극락전, 명부전, 북각, 종각 등이 산기슭에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무량수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찰에 따라서는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합니다.

 

원통전은 중생 구제를 위한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입니다. 약사전은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인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대개 왼손에 약병이나 약합, 약단지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삼계인을 짓고 있습니다. 독성각에는 나반존자라는 분이 모셔져 있으나 정확히 어떤 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고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고, 칠성각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칠성을 모시게 된 것으로 칠성광여래를 주존으로 모신다 합니다.   

 

주변의 안산과 인왕산과 어울린 백련산 속에 자리한 아담하고 평온한 백련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백련사, #백련산, #자전거, #오르막,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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