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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태평성대가 거의 없었지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삶의 냄새가 풍기기 마련이다. 사람이 살면서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음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조선의 음식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맛도 훌륭했지만 역시 김치가 제일이니 가장 먼저 김치에 대한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의 김치 종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 가운데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고구려를 다룬 부분에 나타난다. 해당 문헌에 '고구려인은 술 빚기와 장 담그기, 젓갈 등의 음식을 매우 잘 한다'고 씌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발효식품을 생활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록에도 김치가 나타난다.

「의정부에 명하여 대간臺諫에서 상소한 것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사헌부司憲府의 상소는 이러하였다.
1. 침장고沈藏庫의 제거提擧와 별좌別坐, 향상向上, 별감別監은 맡은 바 임무가 실로 번극繁劇(힘들고 번잡함)하므로, 매양 세말歲末을 당할 때마다 모조리 거관(去官, 해당 직종에서 빼냄)시켜 그 노고에 대해 상을 주니, 진실로 선비를 권장하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그 직임이 다만 1년 내에만 있으니, 이 때문에 생각이 다음해의 임무에 미치지 못하여, 각색 채종(菜種, 채소)을 때맞추어 거두지 아니하고, 밭에 거름을 주거나 소를 키우는 일에도 주의하지 않습니다.」
󰡔태종실록󰡕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8월 20일

태종 초기에 처음 등재된 침장고는 김장을 담그는 일을 맡은 관아를 말한다. 궁궐에서 소비되는 김장의 양이 많고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보직을 해임하고 노고를 위로하는 것은 좋은데, 그로 인해 업무의 연속성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또한 김치를 중요한 국가의 제사에 올린 기록도 있다

「......그리고 산릉山陵의 원두(園頭, 참외 등을 심는 밭)의 역사役事는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제전祭奠 때에 쓰이는 것은 침채沈菜, 생채生菜, 진과(眞瓜, 참외), 서과(西瓜, 수박) 등 3, 4종류에 지나지 않는데, 백성의 밭 5결結의 땅에 분토(糞土, 거름흙)를 빙 돌아가며 벌여 놓은 역사가 여러 고을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며, 이를 바칠 때에는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실록󰡕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4일

이때는 김치를 침채沈菜라고 불렀으며 제사에 올린 김치는 백김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른 준비와 감독은 궁궐에서 사용되는 채소와 밭을 관리하던 사포서司圃署가 담당하였으며 침장고와도 직무상 관련이 밀접했을 것이다. 김치의 어원이 침채로서, 침채 -> 딤채 -> 딤치 -> 김치로 변형되었는데 본래의 김치는 글자 그대로 소금물에 담가 절인 것이었다.

맛과 형태의 모든 면에서 지금 먹는 김치보다는 짠지에 훨씬 가까웠을 것 같은 당시의 김치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고추 덕택이었다. 채소를 소금에 절인 단순한 식품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과거의 김치가 다른 나라의 그것들과 특별하게 구분될 수 없었던 데 비해, 고추가 사용된 이후 김치는 혁명적인 발전과 진화를 거듭했다.

김치가 지금의 김치의 맛과 모습을 갖추고 완벽한 건강식품으로 세계인의 극찬을 받을 수 있던 것은 고추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드시 김치 뿐 아니라 고추가 없는 식탁과 한국은 상상하기 어렵다.

각종 국과 찌개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식에 고추는 필수적이다. 김치를 먹지 않는 젊은 층들도 매콤한 떡볶이나 얼큰한 매운탕 같은 것을 즐겨 먹는 것을 보면 고추의 위력이 새삼스럽다. 고추가 없던 과거의 식탁을 생각해보면 소름까지 돋는다. 고추가 등장한 다음에야 우리의 식탁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며, 앞으로 고추처럼 혁명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식재료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고추는 고구마와 함께 일본에서 전래된 대표적인 식품이다. 고추의 유입경로에 대해 이런저런 유래가 많은데, 교역 같은 정상적인 방도에 의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고초와 고구마는 임진왜란 때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보급을 차단당해 혹심한 피해를 당했던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한 다음 자력갱생(?)에 경주했다. 그때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을 차단당하는 바람에 어찌나 굶주렸던지 적장 가운데 가장 용맹했던 것으로 알려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같은 자는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볶은 쌀과 말린 된장 등의 비상식량을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 겪었던 쓰라린 경험은 당연히 식량의 확보를 최우선과제로 여기게 만들었다. 조선 남부에 웅거한 일본군들은 포로로 잡은 조선인들을 부리거나 하여 식량을 자체 조달하려 노력하였으며, 특히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들어온 일본군들은 아예 곡식과 채소의 씨앗까지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그 씨앗 가운데 고추와 고구마가 포함되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다.

고추를 만난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김치와 조합했다. 고추는 채소에 버무려진 젓갈과 융합하여 오묘한 풍미를 생성했다. 고추와 결합한 김치는 비로소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거듭났다. 고추가 아니었다면 김치는 음식에서의 '절대반지'로 등극할 수 없었을 것이며, 우리의 식탁은 겨울의 사막처럼 황량하고 무미無味했을 것이다.

고추는 또한 '고추장'이라는 걸작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고추가 콩과 결합하여 탄생한 고추장은 고추 특유의 풍미가 더욱 진하고 달콤해졌으며 쓰임새가 무궁무진한데다, 오래도록 두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식품이다.

음식에 관한한 최선진국을 자부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고추를 소스로 하거나 샐러드로 먹을 뿐이다. 고추장 하나만 보아도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월등했음이 분명히 입증된다 하겠다.

고추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영조 16년(1740) 때까지로 거슬러간다. 당시 이표라는 사람이 저술한 <수문사설松聞事說>에 고추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놀랍게도 전라도 순창 지방의 고추장을 소개하고 있다. 순창은 지금도 고추장의 대명사가 아닌가. 이미 1740년의 기록에 순창 고추장이 나타난다면 적어도 1600년대 말에는 시제품試製品을 거쳐 상용화된 제품이 만들어졌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순창 고추장은 최소한 사백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식품이니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 42년(1766)에 발간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와 이후의 여러 저술에 고추장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특히 철종 12년(1861)에 발간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고추장을 담드는 시기까지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고추장은 그때 이미 모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국민음식'이 된 것이다. 비록 전쟁 탓이지만 고추가 들어온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김치는 그것에 버무려진 젓갈과 함께 발효하는 바람에 동물성인지 식물성인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런 음식은 세계에서 오직 김치가 유일하다고 한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채소와 과일이 재료가 될 수 있어 김치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달한다. 명태나 오징어를 넣기도 하며 심지어는 돼지고기나 사슴고기 등의 육류를 사용하기도 하니 그 독창성과 다양성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런데 김치에 관련한 기록을 문서를 보면 과거에는 배추김치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배추김치가 김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지금의 시각으로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과거에는 배추가 작고 질겨 별로 환영받지 못한 탓이었다. 통통하고 먹음직한 배추가 탄생한 이후부터 배추가 김치의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는데, 전적으로 우장춘(禹長春, 1898~1959)박사 덕분이다.

우장춘 박사는 오늘날의 유전자공학에 해당할 수 있는 육종학育種學의 세계적 권위자였다. 일본의 유수한 대학에서 연구에 매진하던 우장춘 박사는 해방이 되자 오직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제시한 좋은 대우를 뿌리치고 귀국한 우장춘 박사는 조국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다.

가장 시급한 것이 먹을 것의 확보라는 것을 절감한 우장춘 박사는 작고 볼품없던 배추와 무에 주목했다. 기르기 쉽고 많이 심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진 배추를 개량하여 크고 맛있게 개량하자 곧 전국으로 퍼졌으며, 머지않아 김치의 세계를 평정하게 되었다. 그때 배추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신세이던 무도 함께 개량의 수혜를 받았으며, 이후 배추와 함께 김치를 양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일본에 있었다면 노벨상을 수상하는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을 확률이 높았는데도 모든 영광과 명예를 뿌리치고 조국에 봉사한 우장춘 박사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태그:#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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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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