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경련 발표를 듣고 전,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는 썰렁한 말장난을 하고선 쑥스러운 듯 크게 웃었다. 그러나 둘 다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job sharing). 말은 참 그럴듯하다. '나눈다'는 글자에서 느껴지는 훈훈함이 입에 착착 감긴다. 근데 내용을 들여다보니 참 허허롭다.

 

2월 초 공기업(정부)에서 시작한 신입·기존 직원의 임금 동결과 삭감을 통한 인턴채용 확대 등 일자리 나누기에 전경련 산하 30대 그룹들도 동참을 선언했다. 대졸 초임 연봉의 삭감을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고용유지 및 채용인원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더불어 26일에는 대기업 임원들의 임금을 깎아 그만큼의 인턴을 채용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를 두고 '생색내기용'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동참을 선언한 그룹과 소속 계열사가 각 업종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고려해보면, 이런 방식의 일자리 나누기는 다른 기업들로도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몇 몇 언론도 이번 전경련 발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각각 관련 기사에서 "사회 전방위로 이런 분위기가 확산될 때 경제위기 극복은 물론 새로운 노사관계 확립이라는 도약의 장이 마련될 것", "이번 합의를 통해 세계 경제 위기의 폭풍우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전경련 발표와 긍정적인 언론의 기사 어디를 뒤져보아도 정작 임금 동결과 삭감이 어떻게 '위기 극복의 해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편, 정부도 이번 발표를 반색하는 분위기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금 모으기'보다 의미 있는 내셔널 브랜드가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만만한 게 신입사원... 그런다고 일자리가 생길까?

 

 

역시나, 친구와 내가 씁쓸한 기분을 느낀 것과 같이 취업을 앞 둔 20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 놓고 휴학 중인 정현용(27)씨는 "신입 월급 줄여서 일자리 만든다는 명분하에 비정규직 늘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일단 지금이야 어딜 가든 어려우니까 정규직·비정규직 따지지 않는다고 쳐도 그게 고착화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고, 나중에 경기가 풀려도 지금 만들어진 틀대로 갈 것 같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0학기 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5학년 김정환(가명·27)씨도 "기업 입장에서는 이렇게 임금 깎아놔도 들어오려는 사람은 많으니 결국 노조 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대졸 초임을 착취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정부와 전경련의 일자리 늘리는 방식을 놓고 "실질적 효과는 없는 일종의 협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윤주(가명·28)씨는 "대졸 초임을 삭감한다고 해서 실제로 일자리 나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불안과 위기감을 조성해서 인건비만 낮추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영호(가명·24)씨는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입사할 기회가 늘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임금 삭감한 돈으로 얼마나 채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 전시용으로 인턴 몇 명 채용하다 끝날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취업 재수생 이상종(가명·28)씨도 "만만한 게 신입사원이다, 일자리 나누기에 있어서 신입사원이 가장 약자인데 불황으로 인한 고통분담이 가장 약자인 신입사원에게 강요되고 있다"며 "학자금 대출 등으로 '빚쟁이 대졸자'가 점점 늘어가는 추세인데, 급여까지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깎이면 대다수의 20대들은 빚의 굴레에서 점점 헤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분노를 넘어선 취업 공포"... 소리도 지를 수 없는 20대

 

프랑스에서 지난 2006년 3월 발효된 최초고용계약제는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한 경우, 2년간의 수습기간 중에 사용자가 피고용자에게 해고 사유를 통보하지 않고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그러나 학생 및 노동자의 반대로 실행이 무산되고 결국 폐기되었다.

 

첫 임금이 많게는 28%까지 삭감될 위기인데도 왜 한국의 20대는 별다른 동요가 없을까. 조홍근(26)씨는 "분노보다는 일하지 못하게 될까봐 그 공포가 더 큰 것 같다"며 20대들을 '입양아'에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버림받기 싫으면 어떻게든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착한 아이가 돼야 하는 입양아가 지금 20대들의 모습 같다"는 것.

 

통계청이 지난 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대 취업자 수는 376만9000명으로 1984년 2월 367만9000명 이후 25년 만에 가장 적다. 실제 많은 20대 취업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번 전경련의 발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입사실패로 일단 행정인턴 면접을 준비 중이라는 이정화(25)씨는 "어쨌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거 아니냐"고 되물으며 "면접 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생기는 거고, 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취업재수생 김정국(28·가명)씨도 "졸업 하고 2년째 취직을 못하고 있다"며 "대졸 신입사원 연봉을 깎는 것은 당연히 불만이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그렇게라도 어디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는 20대가 최소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라도 열어주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2007년에 풀어야 할 첫 번째 숙제라고(144쪽), 마왕 앞에 선 아들의 시신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침착함과 인간에 대한 예의 두 가지라고(304쪽) 이야기 했다. 그러나 현재 정부와 재계에서 내놓는 방법들은 20대 취업자들이 숨 쉴 공간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20대의 분노는 하나로 뭉쳐지지 못한 채 각개전투의 방법만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스펙을 쌓아 "더 강해져야 한다"거나, 그래도 "자리가 하나라도 더 늘어날 테니 해 볼만 해졌다"는 생각, "일단 취업하고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 옮겨야지"하는 이직부터 생각하고 준비하는 취업. 과연 이 일자리 나누기를 위한다는 대졸 초임 삭감이 정부나 전경련의 바람처럼 '금 모으기'를 능가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까.


태그:#대졸초임삭감, #전경련, #잡셰어링, #일자리나누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