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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살 때 집 근처에 위치한 우에노 공원에 자주 갔다. 우에노의 국립서양미술관은 잔디와 로댕의 작품이 눈에 띠는 곳이다. 미술관 인근에 박물관, 동물원, 호수, 아주 인상적인 노천카페 등이 있어 가족과 산책을 하기에 좋을 곳이다.

미술관
▲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미술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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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마당에는 로댕의 작품을 따스한 햇빛과 함께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미술관의 본관 건물은 '르 코르뷔지에'라는 스위스 출신 건축가의 1959년도 작품이다.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그는 화가로서도 유명하다.

며칠 전 퇴근 길 서점에 갔다가 3년 전 번역되어 출간된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 기행>(도서출판 다빈치)을 한권 사왔다.

동방기행
▲ 동방기행 동방기행
ⓒ 도서출판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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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행>은 르 코르뷔지에가 예술가로, 건축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저서다. 그가 여행에서 보고 느낀 인상을 메모한 글들과, 직접 그린 풍부한 데생들을 수록되어 있다.

1911년 스위스 출신의 젊은 건축학도였던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르 코르뷔지에의 본명)는 친구와 함께 독일의 드레스덴을 출발하여 보헤미아와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거쳐 터키와 그리스를 횡단하는 6개월의 긴 여행을 떠났다. 스물네 살의 젊은이가 발견한 것은 이국적인 풍광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만큼 강렬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동방 기행>한 젊은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강렬한 여행의 기록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여정을 따라가며, 위대한 예술가의 감상적이고 예민한 젊은 시절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백여 년 전, 전쟁의 상처를 입기 이전의 유럽인들과 그들의 삶, 문화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황금을 깎아 만든 듯한 바야지트 사원의 첨탑과 돔 지붕이 더할 수 없는 위엄과 통일감을 보여주며 솟아 있었다. 불타는 도시 너머, 황금빛으로 자욱하게 깔린 연기 사이로 불에 달군 쇠처럼 뜨거워 보이는 흰 첨탑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직한 재료에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 쓰임새 있는 작품으로 변모시켜야 하는 건축가로서의 고결한 사명을 나는 이곳에 와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위대한 건축가들은 성모에게 바쳐진 이 땅에 수백 년 동안 계속된 악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로 만들어진 안식처와 죄 지은 영혼들을 악행에서 벗어나게 해줄 견고한 방을 만들어주었다. 그 절묘한 형태와 빛깔 그리고 신비한 비례로 말미암아 건축물들은 기도와 찬송이 하늘에 전해질 만큼의 제한된 빛만을 허용하고 있다."

"아그레네프 슬라비안스키의 음악을 통해 끝없는 스텝의 대초원을 유유히 흐르는 강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곳 네고틴의 음악은 내가 배 위에서 상상했던 신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었다. 도나우 강과 푸스타 대평원이 엎드려 조용히 경배의 키스를 보내는 바로 그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의 우리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비행기를 잡아타고 어느 나라든 여행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여행이 주는 심오한 의미와 기쁨은 점점 퇴색해 가는 느낌이다. 현재의 나를 잊기 위해서, 떠나기 전의 기다림과 설렘을 즐기기 위해서, 떠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여행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잊혀지는 여행이 된다면 그 여행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일상 또는 휴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특히 젊은 시절의 여행은 때로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변화시킬 만큼 강렬한 경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햇빛이 잘게 부서지고, 장방형 건물 위에 우윳빛 돔 지붕이 부푼 빵처럼 얹혀 있고, 하늘을 찌르는 첨탑들이 솟아 있는, 백악처럼 새하얀 도시’ 이스탄불과 도나우 강의 푸른 물에 몸을 담그고 유유히 낮잠을 즐기는 물소 떼, 모스크의 높은 첨탑에 올라 예배 시간을 소리쳐 알리는 무에진. 잔느레는 여행 중에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던져주는 인상을 강렬하고도 감동에 찬 필치로 묘사하고 수많은 스케치로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잔느레는 전율했으며, ‘백여 개의 청동 나팔이 폭포처럼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는 듯한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나는 왜 아크로폴리스가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신전으로서 다른 곳보다 더 완벽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널따란 돌 위에 우뚝 선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생각들을 버렸으며, 그 웅장함 앞에서 분노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파르테논이 부정할 수 없는 예술의 ‘최고봉’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테르곰이 이국적인 도시의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정방형 건물 위의 기둥들이 둥근 지붕을 받치고 서 있었다. 멀리서 보니 건물들 하나하나가 정말 작품이었다. 정방형의 외관은 리드미컬해 보였고 주변의 산들은 커다란 제단에 제물을 바치듯 도열해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
▲ 르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
ⓒ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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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젊은 날의 여행은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라는 건축학도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로 나아가는 첫 걸음 같은 것이었다. 그는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통해 자신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건축을 발견했으며, 건축가로서의 사명감을 일깨우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이 기행문은 후에 자신의 고향 신문에 연재되었으며, ‘동방 기행 Le Voyage d'Orient’이라는 제목으로 1914년에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출판이 무산되고 그의 서재에서 먼지를 맞으며 쌓여 있다가, 여행을 한 지 54년이 지난 1965년에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그의 스케치들을 보면서 르 코르뷔지에의 여정을 따라가는 상상속의 여행은 너무도 즐거우며, 언젠가 시간적인, 경제적인 조건들이 구비되기만 한다면 내 눈과 내 발로 직접 그 곳들을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동방 기행>의 저자 르 코르뷔지에(샤를 에두아르 잔느레)는 스위스계 프랑스 건축가이며 화가이다. 라쇼드퐁 장식 미술 학교에서 스승 샤를 레폴라트니에를 만나 미술사, 소묘, 아르 누보의 자연주의 미학을 배웠으며, 1907-11년에 중부 유럽과 지중해를 두루 여행하면서 자신만의 건축 언어를 발견했다.

그리고 파리로 이주하여 화가 겸 디자이너인 아메데 오장팡의 순수주의(일상의 사물이 지니는 순수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회화 미학)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형식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의 건축에서 당시 기능주의자들의 열망과 표현주의적인 강렬한 감각을 결합시켰고, 금욕주의와 조소적 형태를 추구하는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기법으로 거친 마감 콘크리트의 사용을 연구하였다.

스위스 지폐에 실린 르 코르뷔지에
▲ 르 코르뷔지에 스위스 지폐에 실린 르 코르뷔지에
ⓒ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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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건축 작품으로는 현재 르 코르뷔지에 재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라 로슈 저택, 페사크 주거 단지, 푸아시의 사부아 주택, 파리의 스위스 학생 기숙사, 마르세유의 아파트 위니테 다비타시옹, 롱샹의 노트르담뒤오 예배당, 리옹 근교의 생트마리드라투레트 수도원, 인도의 찬디가르 신도시 건설,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하버드대학교의 카펜터 시각예술센터 등이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 <성당은 언제 흰색이 되었는가>, <아테네 헌장>, <세 개의 인간 시설>, <모듈러> 등이 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1920년대 이후 잡지 '에스프리 누보'에 글을 기고할 때 이용한 필명이다. 

동방기행을 번역한 조정훈씨는 1970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보르도 3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수학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잔과의 대화>,<결혼의 적들-위기의 부부심리학> 등을 번역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 기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조정훈 옮김, 다빈치(2005)


태그:#르 코르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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