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언어(말)는 자연의 가시적인 형상들과 비교적 언설(秘敎的 言說)의 비밀스러운 적합관계들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 있다.”(미셸 푸코, 이광래 역, 말과 사물, 서울:민음사, 1987. 62 쪽)“언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약속도 없이 계속 번식할 수밖에 없다. 문학의 텍스트가 날마다 추적하는 것은 이 공허하지만 근본적인 공간의 행정이다.” (같은 책, 73쪽)

 

 박정희의 통치와 권위주의 문화가 득세했던 1970년대. 이때는 말이 죽어버린 시기이기도 했다. 정치권력이 사람들의 삶의 영역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억압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렸기 때문이다. 말이 제 역할을 못하고, 사물들의 형상을 제대로 그려내기 어려워 신음하고 있었다.

 

 이 야만적인 틀을 깨버리려던 문학인들은 ‘죽어버린’ 말들을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 가운데 고은이 있었다. 나는, 그가 ‘사랑’이라는 말을 수렁에서 구해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른바 70년대는 비정치적이고 감각적인 수필이나 에세이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고은 같은 시인들의 움직임은 말의 고통을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었다.    

 

 “그러므로 암수컷의 그것이든 민족의 사랑이든 세계사 전체에 대한 사랑이든 그것은 목숨을 건 사람들에게만 뜻이 되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고은, 사랑을 위하여, 서울:전예원, 17쪽)

 

“불교가 세속을 떠나서, 현실을 떠나서, 승려사회를 이루고 거기서 날마다 나무잎새나 산이나 바라보며 밤마다 물소리나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수행(修行)을 하는 승려사회로 닫혀 있을 때, 그런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불쌍한 중생, 고달픈 현실의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 더욱 큰일입니다.”(위의 책, 201쪽)

 

 나는 시를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성공한 시인인지, 그리고 그의 시가 문학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도 나는 잘 모른다. 그의 삶과 글이 거리가 멀지 않다는 걸, 그의 말과 그의 말이 기술하는 사물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나는 높이 산다.  내가 그의 시보다는 산문들에 더 매력을 느껴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몇 년 전 프랑스의 어떤 출판사가 세계의 지식인 20여명에게 지정해 풀이를 요청했다는 250여 개의 개념들을 고은은 「개념의 숲」에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그가 여전히 민족과 세계사 전체에 대해 애착하고 보듬고 사랑하려 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책을 보며, 우리 시대 역시 말이 사물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가 건져 올린 말들로 이뤄진 개념 풀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과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물들과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돌아볼 기회를 나는 가졌다. 

 

  「사랑을 위하여」가 나온 지 30년 이 흘렀다. 고은은 이제 무어라고 사랑을 이야기할까. “소유에의 장님. 헌신에의 장님. 이 두 장님만이 사랑을 완성한다.”(24쪽)

“이 가족의 의미가 21세기에는 사라져 간다. 한 번쯤 그래야 한다.”(14쪽)

 

 그의 사랑 이해는 ‘암수컷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너른 개념임을 다시 확인하여 주고 있다. 그는, 민족과 세계사를 애착하는 사람답게 서구 중심의 문명, 국가, 현대의 자본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매체와 인터넷을 강하게 비판하는 말들을 이 책에 실었다.

 

“서구중심사관은 이제 끝내야 한다.”(94 쪽)

“국가-국가는 얼마나 국가의 범죄와 탐욕을 쌓아가는가.”(88쪽)

 “화폐-화폐는 인간적이다. 증권은 비인간적이다.”(79쪽)

“세계의 모든 가치가 가격으로 환치되고 그 가치의 본질이 변질되는 경제 이데올로기는 지난 세기가 전쟁과 이념의 폭력으로 차 있던 야만의 시대라고 정의된 것 이상으로 더 야만의 연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232)

“민주주의는 어느 시기까지만 세계 공화국들의 형식일 것이다.(68쪽)

“전제주의-현대의 자본과 매체, 인터넷이 이미 전제주의를 표방한다.(72쪽)

 

이런 비판과는 달리 생태공동체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소수자에 대해서 고은은 몹시 애착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짐승들의 존엄./미생물들의 존엄과 함께/ 인간의 존엄이 성립된다.”(72쪽)

“역사는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그것이다.”(191쪽)

“자연은 인간의 상대 가치가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범주 안의 이분법에 해당한다는 논리야말로 근대의 미혹(迷惑)이다.”(192쪽)

 “마이너리티-소수민족의 비애가 있는 한 세계는 비애의 행성이다.”(78쪽)

“공산주의-인류의 꿈이다.(중략). 25세기 그 시대에는 단계적으로 실현되리라.”(57쪽)

 “사회주의-여전히 내일을 꿈꾼다.”(146쪽)

“아나키즘-여기 이데올로기가 있다! 생태공동체 이데올로기가.”(22쪽)

 “나의 세계관은 세계 각 지역의 언어 몇 천만 종種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관련된다.”(82 쪽)

‘종種-지구의 멸망은 종種의 멸망으로 진행된다.“(109 쪽)

 

그의 시론, 예술론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추(醜)에 대한 그의 관심, 고뇌라는 산고의 과정을 통해 낳게 되는 옥동자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그의 생각과 멀어지는 것일까. 그는 미의 개념에 醜의 얘기를 덧붙인다. 그의 문학에서 리얼리티와 현실은 결코 생략할 수 없는 개념이자 숙제다.

 

 “그러나 미에 대한 추醜에 미는 무력하다. 아, 슬픈 미!”(26쪽)

“리얼리티-비유에서 어서 돌아오라./허구에서 어서 돌아오라./ 영광스런 성역(聖域)에서 어서 돌아오라.// 여기 진흙탕에 묻힌 네 어미의 해골이 있다.”(134쪽)

“현실-모순과 갈등의 구조물. 이 구조물 이외에는 내가 살 곳이 없다.”(134)

 “시는 나에게 길을 걸어가는 자이게 한다.”(10쪽)

 

 그의 이성 비판은 이성과 그 가치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의 이성 비판은 그가 "근대를 재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는 결코 이성의 가치와 효용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찌하여 제 기능을 못하는가를 다만 지적하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중산층의 멋부리는 생각과 삶이 그의 비판의 대상이다.

 

“아, 20 세기 중산층적 이성이여! 가장 경멸할 대상이여! 오도 가도 못하는 그 중산층이야말로 유토피아의 적이다.”(133 쪽)

 

 고은에게 과학·기술 비판은 자못 흥미롭다. 이는 이성에 대한 그의 비판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다. 과학적이지 못한 현실 인식에서 문학이 현실 또는 사람들의 삶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화학적이기보다 물리적일 것” (105)

“나는 과학이 생태 환경의 생명을 해치는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은 오히려 더 필요하다. 과학의 과학 말이다.”(144쪽)

모든 인문(人文)들이여, 기술을 멸시하지 말라. 그대들이 기술을 멸시한 벌을 지금 받기 시작하지 않느냐. (170쪽)

 

 고은은 우리 시대, 이른바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좇아가는 가치와 삶의 방식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고 있다고 이 책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투기와 돈놀이의 매력에 빠져 부를 축적하고 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 시대 풍속을 그는 여기서 생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노동(175쪽)”이라고 썼을 것이다.

 

 우리 시대 하나의 경향처럼 흐르고 있는 ‘생명주의’에 ‘평등’이라는 방점을 덧붙여 놓은 것도(182 쪽) 고은다운 발상이다. 우리 시대 생명에 대한 관심이 생명들의 열악한 ‘현실’을 오히려 오도하고 덮어버리는 관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여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개념 풀이들은 우리에게 말이 그 생명을 찾도록 부추긴다. 그 말들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치부들을 헤집고 나아간다. 그의 생명력 있는 말들이 우리의 위장술을 여지없이 깨부수고 우리의 부끄러운 속살들이 드러나게 한다. 노동으로 땀을 흘리기보다는 자본의 흐름에 의지와 몸을 맡기고 적당히 즐기고 살아보려는 우리 시대 ‘자기중심’의 중산층 독자들에게 고은은 말을 걸어온다. 긴 여운을 남긴다. 나는 누구인가?

 

 “강가에 서 있을 때 강 건너 저쪽은 나의 대상이고, 강 건너 풍경에 의해서 나는 대상으로 전락轉落한다. 나는 대상이 되어가는 존재일 뿐이다.”(92 쪽)

 


개념의 숲

고은 지음, 신원문화사(2009)


태그:#생태공동체, #공산주의, #사회주의, #소수자, #서구중심주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나는, 말이 사물을 올바로 담아낼 때까지, 사물들을 올바로 이끌어 낼 때까지 말과 처절하게 대면하려 한다. 말과 싸워서, 세상과 싸워서, 자신과 싸워서 지지 않으려 한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