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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중의 장비묘 대전에 모셔져 있는 장비묘. 찰흙으로 만들어진 장비상은 황제의 모습으로 랑중 사람들에게 신선처럼 모셔지고 있다.
 랑중의 장비묘 대전에 모셔져 있는 장비묘. 찰흙으로 만들어진 장비상은 황제의 모습으로 랑중 사람들에게 신선처럼 모셔지고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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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양쯔강(長江) 변에, 몸은 여기 랑중(閬中)에 묻혀 있다니, 그는 죽어서도 참 편치 못하군요."

중국 쓰촨(四川)성 수도인 청두(成都)에서 동북쪽으로 360여㎞ 떨어진 랑중시에는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한 사람의 묘가 있다. 한때 도원결의를 맺었던 두 형제와 함께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용장(勇將). 장판교 위에서 애마를 타고 장팔사모를 비껴든 채 벽력같은 소리를 쳐 조조의 백만 대군을 오금 저리게 한 맹장(猛將). 유비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좋아하는 술을 마시다 부하들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된 호걸(豪傑). 바로 장비(張飛)의 묘이다.

랑중은 쓰촨 4대 강 중 하나인 자링강(嘉陵江) 중류에 위치해 있다. 옛 랑중성은 자링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천이 3면을 에돌아 보호 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 랑중은 기원 전 4세기에 현이 설립된 이래 줄곧 쓰촨성과 중국 중원지방을 이어주는 요지였다.

랑중은 자연 경치도 매우 아름다워 옛 문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1300여 년 전 안사의 난을 피해 이곳에 온 당대 시성 두보(杜甫)는 '삼면 성벽이 강물에 비치고, 주위의 산들이 밤 노을을 가두다'(三面江光抱城廓,四圍山勢鎖煙霞)라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랑중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랑중은 관광자원이 풍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300~400년의 역사를 지닌 민가가 널려있는 랑중고성은 산시(山西) 핑야오(平遙), 윈난(雲南) 리장(麗江), 안후이(安徽) 서센(歙縣) 등과 더불어 중국 4대 고성이다. '자링강 제1산'으로 불리는 진빙산(錦屏山)에는 유구한 역사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불교 명승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고성 내에는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전래된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종교시설이 공존하면서 다양한 종교문화를 꽃피웠다. 랑중 근교에는 고급스럽고 웅장한 톈궁위안(天宮院),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꼽히는 우룽묘(五龍廟) 등 수십여 곳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뜻 깊은 역사유적이 찾는 이를 감탄케 한다.

뭐니 해도 랑중을 대표하는 명소는 단연 장비묘다. 장비묘는 정식 명칭이 '장환후사'(張桓侯祠)로, 3세기 촉한(蜀漢) 말기 건립되어 170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환후'(桓侯)는 장비 사후 유비가 추증한 시호다. 장비묘는 장비를 가념(可念)한 대전, 장비의 아들 및 수하 문무관을 모신 적만루(敵萬樓), 묘소 및 묘 앞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비묘에서 만난 궈산산(27·여)은 "장비는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 인물 중 쓰촨 민중에게 가장 친근하다"며 "사후에도 머리와 몸이 각기 나뉘어 매장되어 후대인들을 애잔케 한다"고 말했다.

랑중고성 중앙에 세워져 있는 중톈러우(中天樓). 랑중은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다.
 랑중고성 중앙에 세워져 있는 중톈러우(中天樓). 랑중은 중국 4대 고성 중 하나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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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의 몸이 안장된 장비묘소. 묘소 바로 앞에 사당이 붙여져 있다.
 장비의 몸이 안장된 장비묘소. 묘소 바로 앞에 사당이 붙여져 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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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의 묘] 머리는 윈양에, 몸은 랑중에

10여 년 가까이 홀로 형주(荊州)를 지켜왔던 관우는 유비의 무리한 북벌 명령과 위나라와 오나라의 협공으로 219년 여몽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삼국지>는 관우가 죽었다는 소식에 청두의 유비가 너무 울어 눈물이 마르고 피가 나왔다고 묘사했다.

소설 <삼국지>는 유비, 관우, 장비가 장비의 집 뒷마당인 도원에서 의형제를 결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7척5치의 키로 귀가 어깨까지 처지고 양팔이 무릎까지 닿은 유비, 키가 9척에 두 자나 늘어뜨린 수염과 붉은 얼굴에 누에눈썹을 한 관우, 8척 키에 표범 눈, 턱수염을 가진 장비의 이야기는 지난 천 년간 아시아 민중의 심금을 울려왔다.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는 태어난 날은 달랐어도 훗날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죽기를 맹세했다. 관우의 급거 소식은 유비와 장비에게 도원의 결의를 떠오르게 했다.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바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제갈량은 갓 건국한 촉한의 상황을 염려하여 말렸다.

221년 정식으로 황제로 등극한 유비는 오나라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다. 위나라를 막기 위해 랑중에 주둔해 있던 장비도 군중에 영을 내려 출정에 나섰다. 장비는 군사에 3일 내로 백기와 백갑을 준비하여 상제 차림으로 오나라를 공격토록 했는데, 부하 장수인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이 나서서 말렸다.

"짧은 기일 내에 백기와 백갑을 마련할 수 없으니 출정일을 좀 늦추었으면 합니다."

이에 크게 노한 장비는 두 사람을 심하게 매질했다. 범강과 장달은 군영을 지키지 못할 것을 더욱 두려워하여, 숙소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장비를 살해했다.

당시 장비의 나이 쉰다섯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맹장의 허무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암살에 성공한 범강과 장달은 바로 장비의 머리를 베어 수하 수십 명을 이끌고 오나라로 도망쳤다. 수급 없는 장비의 시체는 랑중 백성들에 의해 수습되어 묘소로 조성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랑중의 장비묘, '장환후사'다.

재미있는 것은 양쯔강 상류 충칭(重慶)시 윈양(雲陽)현에 또 하나의 장비묘가 있다는 점이다. 정식 명칭이 '장환후묘'(張桓侯廟)인 윈양 장비묘는 촉한 말기 때 세워졌다. 윈양은 <삼국지>나 장비와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

윈양에 제2의 장비묘가 생긴 데에는 범강과 장달의 행적과 관련 있다. 범강과 장달이 오나라로 가던 중 손권이 유비에게 화친을 청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오나라로 갈 수 없고 촉나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에 처한 두 사람. 결국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머리를 양쯔강에 던져 버리고 도망친다.

장비가 위나라와의 전투 길에 만들었다는 소고기 육포. 랑중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유명하다.
 장비가 위나라와의 전투 길에 만들었다는 소고기 육포. 랑중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유명하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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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양쯔강 변에서 새로운 장소로 옮겨진 윈양의 장비묘.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본래 양쯔강 변에서 새로운 장소로 옮겨진 윈양의 장비묘.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됐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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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묘] 머리는 뤄양에, 몸은 당양에, 혼은 고향으로

전설에 따르면, 장비의 머리는 양쯔강 물살을 따라 흘러 내려오다 윈양의 한 어부에 의해 수습된다. 어부는 고기를 잡다 사람 머리를 건져 올려서 다시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하지만 그 수급은 떠내려가지 않고 자꾸 어부의 배 주변을 맴돌았다. 집에 돌아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어부는 깜박 잠에 들었는데,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거기장군 장비로, 살해당해 구천을 맴돌고 있소. 당신이 건진 수급은 내 머리요. 이대로 흘러 내려가면 오나라 땅인데, 내가 어찌 원수 땅까지 흘러갈 수 있겠소. 제발 내 머리를 건져 촉나라 땅에 묻어주시오."

어부는 잠에서 깨어나 황급히 양쯔강으로 가 장비의 머리를 다시 건져 올린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비 머리를 수습하여 비봉산(飛鳳山)에 묻고 작은 사당을 지으니, 이것이 양쯔강의 장비묘인 '장환후묘'다.

장환후묘는 2007년 완공된 싼샤(三峽)댐으로 인해 본래 자리에서 32㎞ 떨어진 곳으로 이전됐다. 원형 그대로 옮겨왔다고는 하지만, 본 모습이 상당 부분 훼손됐다. 장환후묘에는 묘당을 중심으로 장비가 유비, 관우와 함께 도원결의하는 찰흙상이 모셔진 결의루(結義樓), 묘 주변에 2년간 머물렀던 두보의 작은 입상, 명나라의 개국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의 친필 글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어서 몸은 랑중에, 머리는 윈양에 묻힌 장비와 같이 비구한 운명에 처했던 이가 있으니, 바로 관우(關羽)다.

소설 <삼국지>를 보면, 오나라 손권은 유비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죽음을 위나라 조조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다. 관우의 수급을 잘라 조조에게 보내어 책임을 전가하려 했던 것. 손권은 머리 없는 관우 시신을 후베이(湖北)성 당양(當陽)현에 정성스레 모셔 묻었다. 하지만 손권의 음모를 간파한 조조는 바로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봉하고, 향나무로 몸을 깎아 만들어 머리를 붙인 뒤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남쪽에 안장했다.

관우의 시신이 묻힌 당양의 관우묘는 수당대에 확충되어 16세기 명나라 때 황제묘와 동격인 '관릉'(關陵)으로 칭해진다. 뤄양의 관우묘에도 '관림'(關林)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중국에서 '림'(林) 자가 붙는 무덤은 오직 성인의 묘소이다. 즉, 후대인에 의해 성인으로 모셔진 공자의 묘인 공림(孔林)과 더불어 유일무이한 묘소인 셈이다.

관우의 고향인 산시(山西)성 제(解)현에는 추모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건립되어 있다.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관우를 기리며, "머리는 뤄양에 베개 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노래했다.

백제성에 재현된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들의 후사를 부탁하는 '유비고탁' 장면.
 백제성에 재현된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들의 후사를 부탁하는 '유비고탁' 장면.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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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묘]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고 쓰촨성 청두에

머리와 몸이 잘려나가 각기 다른 곳에 묻힌 장비, 관우와 달리 유비의 묘는 촉한의 수도였던 쓰촨성 청두에 있다.

<삼국지> 3대 전투 중 하나였던 이릉의 싸움에서 오나라 육손에 대패한 유비는 223년 싼샤 절경이 시작되는 취탕샤(瞿唐峽) 앞 백제성(白帝城)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아들들의 후사를 부탁하면서, "최선을 다해 받들되 부족하면 대신 대권을 맡으라"고 한 유비고탁(劉備孤託)은 고금 대대로 유명하다.

청두에 조성된 유비묘인 '한소열묘'(漢昭烈廟)는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높이 12m에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듯한 나무와 덩굴로 무성하다. 무덤에 손을 댄 도굴꾼이 줄지어 횡사하면서 17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황제릉으로 손꼽힌다.

[제갈량의 묘] 명성에 비해 소박... 주위에 54그루 백나무

청두의 무후사에 모셔진 제갈량상.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는 한때 중국 전역에 수백 개에 달했다.
 청두의 무후사에 모셔진 제갈량상.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는 한때 중국 전역에 수백 개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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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린 뒤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한 제갈량의 무덤은 소박하다. 산시(陝西)성 몐(勉)현 외곽 딩준산(定軍山)에 위치한 제갈량묘는 '무후묘'(武侯廟)라 불린다. 제갈량 사후 유선은 '무후'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유언으로 "딩준산에 묻되 담을 치지 말고, 석물을 쓰지 말며, 모든 제물도 없이 하라"고 엄명했다. 실제로 몐현의 제갈량묘는 명성에 비해 작고 단아하다. 묘를 조성하면서 주위에 54그루의 백(柏)나무를 심었는데, 제갈량이 54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중 22그루가 살아 있다.

검소하고 단아한 제갈량묘와 달리 제갈량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는 중국 전역에 널려 있다. 무후사는 제갈량 사후 29년 뒤인 263년 유선이 내린 조칙에 따라 쓰촨성 몐양(綿陽)에 처음 세워진 이래 한때 수백 개에 이르렀다.

수많은 무후사 가운데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은 단연 유비묘 옆에 있는 청두의 무후사다. 유비, 관우, 장비의 찰흙상이 있는 중전을 지나 정전에 모셔진 제갈량상은 제갈건을 쓰고 제갈선을 든 온후한 모습이다.

수당대에 청두는 '금관'(錦冠)성이라 불릴 만큼 비단 제조로 융성했는데, 제갈량이 뽕나무를 심어 비단 짜는 것을 장려한 데서 비롯됐다. 제갈량은 죽어서도 쓰촨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와 제갈량의 이야기는 후대인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강하다. 리징 장비묘관리위원회 부주임도 "소설 <삼국지>의 신화와 매력에다 민중이 꿈꾸는 영웅 신드롬이 유비, 관우, 장비와 제갈량를 더욱 신비화하고 미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다양하고 깊은 영감을 주며 사랑받고 있다. 관우의 부음을 듣고 반격을 서두르다 목이 잘린 장비. 제갈량의 만류에도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죽음을 맞은 유비. 승리 가능성이 1%도 안 되었으나 유비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북벌에 나섰다가 오장원에 묻힌 제갈량. 그들의 못다 이룬 꿈이 아쉬운 것은 기자만의 생각일까. 

랑중의 장비묘에 재현된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동상. 이들은 결국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랑중의 장비묘에 재현된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동상. 이들은 결국 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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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삼국지, #장비, #관우,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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