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스라엘 군인들이 2008년 12월 30일 이스라엘 남부의 가자지구 접경 부근 부대 집결지에서 탱크위에 서있다.
▲ 이스라엘의 대 가자 공격 이스라엘 군인들이 2008년 12월 30일 이스라엘 남부의 가자지구 접경 부근 부대 집결지에서 탱크위에 서있다.
ⓒ AP=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옛날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한창 전쟁을 할 때였다. 양 팀에서 '짱'들이 나와 단판으로 승부를 가르기로 했다. 이스라엘의 대표 선수는 용감한 목동 '다윗'이었고 블레셋의 대표 선수는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 '골리앗'이었다. 놋으로 된 갑옷을 입고 커다란 창과 방패로 중무장한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시냇가에서 주운 반들반들한 돌멩이 다섯 개만 들었을 뿐 비무장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골리앗이 "긍께 니가 시방 나를 개 취급하는 거여?" 하고 구시렁대자, 다윗은 "니는 칼이랑 창이랑 들고 나왔냐. 내는 니들이 씹어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왔는디" 하고 멋진 멘트와 함께 돌멩이 한 개를 날렸다. 돌멩이는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혔고, 골리앗은 코를 땅에 처박고 죽었다. 기세등등해진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단숨에 물리쳤다.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블레셋이라는 족속은 서서히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골리앗의 몇 대 손이 살아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렸다. 골리앗이 남긴 아들이 아들을 낳고, 또 그 아들이 아들 낳기를 거듭하더니, 조상 대대로 유리걸식하며 살아가던 팔레스타인의 '가자'라는 지역에 열 살 정도 된 소년이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던진 돌멩이 한 방에 골리앗 할아버지가 맞아 죽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조상 대대로 구전되었고 성경에도 나와 있기에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골리앗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를 갈면서 돌멩이 던지기를 연습했던 것처럼, 소년도 틈만 나면 다윗 그림을 그려놓고 돌멩이로 맞히는 연습을 하면서 보복할 날만을 기다렸다.

2008년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또 전쟁이 벌어졌다. 소년은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왔다고 이를 악물었다. 시냇가에 가서 돌멩이 한 개 집어들고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섰다. 골리앗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자기들한테 쪽도 못 쓰던 이스라엘 군대가 이번에는 탱크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하지만 소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는 탱크와 비행기를 몰고 나왔지만, 나는 니들이 씨를 말라버리려 하는 알라의 이름으로…." "슈우우우, 빵." 멘트도 안 끝났는데 탱크에서 날아온 대포알 한 방이 소년의 몸을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살 조각, 핏방울과 함께 골리앗 집안의 마지막 씨도 사라졌다.

이스라엘 탱크 앞에서 돌팔매질하는 작은 소년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에서 '다윗과 골리앗'을 떠올려봤다. 전혀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니다. 대한성서공회의 용어 사전에는 "'블레셋 사람들'(히브리말로 '펠리쉬팀')이라는 말을 따라서 '팔레스티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에 블레셋 출신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 블레셋의 장군이었던 골리앗의 후손도 있을 수 있다.

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은 뽑혀야 할 잡초들

2009년 새해 새 아침을 맞아 기지개를 채 켜기도 전에 지구촌 한 곳에서 터진 죽음의 화약 냄새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또야?" 할 정도로 쉬 끝이 나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이 재개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이산가족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세계가 시끄럽다.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질긴 악연이 끊기고 싸움이 끝나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지구촌 호적에서 지워지거나, 종교라는 것 자체가 증발하거나, 인류의 종말이 오기 전에는 절대 끝날 리가 없는 싸움이다. 왜냐하면 둘의 전쟁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지 얼마 안 된 때 개전했고, 지금도 가끔 휴전하면서 계속 열전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문을 닫고 저 세상의 문을 열 때라야 종전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잠시 보자. 구약성경을 보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의 손에 이끌려 거친 사막에서 4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다음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가나안 땅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인데, 당시 이미 여러 족속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상황이랑 별로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의 눈으로 볼 때 가나안의 여러 족속은 치워 버려야 할 쓰레기들이었다. 황대권 선생의 글에서 얻은 영감대로 표현하자면, "저희는 야생초예요. 제발 있는 그대로 살게 내버려두세요" 애원했지만, "시꺼, 니들은 잡초야" 하면서 군홧발로 짓밟고 뿌리째 깡그리 뽑아버려야 할 존재들이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부터 찜 해놓은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거기서 크고 강한 일곱 족속을 하나님이 쫓아내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여러분 손에 넘겨주면, 그들과 협상하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모조리 죽여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한 가지를 더 단단히 일렀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제일 싫어하니까, 가나안의 모든 신상을 없애버리고, 하나님 외에 절대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가나안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그곳 족속들을 작살냈다. 겁에 질린 여리고 성 사람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숨죽여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주변을 일주일 동안 빙빙 돌다가 마지막 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자 일제히 고함을 질러서 성을 무너뜨렸다. 그러고는 남자·여자·어른·아이, 온갖 가축들을 모조리 칼로 죽였다. 성에 불을 지르고, 금·은·동·철을 가져갔다.

모세의 용맹스런 젊은 후계자 여호수아는 한 술 더 떴다. 여호수아는 무너진 성 앞에서 "이 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성의 기초를 쌓으면 큰아들이 죽고, 성문을 세우면 막내아들이 죽을 것이다"고 경고했다. 아이 성의 경우는 하루에 1만2000명을 죽여서 전멸시켰다. 탱크를 앞세운 현대 이스라엘 군대의 전투력보다 훨씬 셌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해서 잡초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살육의 역사로 충만하다. 비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잔인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팔자 사나운 함의 후손들

그렇다고 가나안 사람들이 애초부터 딴나라당 사람들은 아니었다. 노아의 세 아들인 셈·함·야벳 중에 함의 네 아들 중 하나가 가나안이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노아의 손자가 잡초가 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어느 날 노아가 술에 취해서 아랫도리를 벗었다. 아버지의 거시기를 본 함이 그걸 두 형제들에게 말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거시기를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린 채 아랫도리를 가렸다. 노아는 자기 물건을 안 본 셈과 야벳을 축복했고, 자기 것을 본 함은 저주했다.

거기서부터 함의 인생길은 단단히 꼬였다. 함의 자식 중에 '구스'라고 있었다. 구스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말한다. 이걸 근거로 해서 셈과 야벳은 각각 황인종과 백인종의 조상이고 함은 흑인종의 조상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이 지금도 횡행한다.

근거 없이 과도하기만 한 상상력은 엄청난 재앙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저주받은 함의 후손인 흑인들을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취급했다. 노예로 부리면서 고문하고 강간하고 목매달아 죽여도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구스는 얼굴이 까맣다는 이유로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구스의 아들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에게 기어오르려다가 패가망신했다. 그 벌로 그때까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가 여러 개로 갈라졌다. 영어 때문에 시간 버리고 돈 날리고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들은 함의 손자를 원망할 일이다. 구스의 형제인 가나안의 자손들은 동성애 때문에 망했다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다. 함의 자식들이 동성애의 원조일지 모른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그때나 지금이나, 함의 후손인 가나안 원주민들은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하나님은 가나안의 쓰레기들을 싹 쓸어버리라고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초들을 완전히 뽑아서 박멸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렇게 되면 그건 잡초가 아니다. 잡초가 잡초다우려면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발휘해야 잡초다. 이런 잡초 같은 족속들이 팔레스타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하나님이 직접 키운 '장미' 이스라엘과 내팽개쳐진 '잡초' 팔레스타인의 족속들은 이래저래 영향을 주고받았다. 다윗의 왕위를 세습한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기 위해 화려한 성전을 지을 때 이방 나라에서 사람과 물자를 동원했다. 그러는 사이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도 들어왔고, 우상숭배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잡것들과 어울렸으니 하나님의 경고대로 저주를 피할 길이 없었다. 솔로몬이 죽은 다음 자식새끼들이 암투를 벌였다. 나라가 이스라엘과 유대, 둘로 쪼개졌다. 나중에 두 나라는 각각 다른 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죽도록 고생하고, 화려했던 성전은 박살났다.

예수마저 짓뭉갠 이스라엘

신약성경으로 넘어가자. 또 다른 정복자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매불망 다윗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의 전성기가 되돌아오기를 꿈꾸며 "아, 옛날이여"를 노래했다. 예수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라고 믿었다. 예수가 일갈했다. "꿈 깨!"

예수의 행적도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마땅치 않았다. 구약의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인들과 대화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셨다.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 만한 얘기들을 쏟아냈다. 하나님 아들 행세를 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정치적인 이유에서, 밥그릇적인 이유에서 예수는 죽어야 했다. 그래서 죽었다.

예수를 죽인 쪽은 유대인, 예수를 믿는 쪽은 기독교인으로 나뉜다. 기독교인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거기서 예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교 입장에서 기독교는 '귤 흉내 내는 낑깡'이다.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아나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 지금도 눈이 빠지게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때이며, 종말의 때다.

유대인만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선민'이고 이스라엘 땅만이 '성지'다.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 지금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는 것도 메시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설렘 때문에 저지르는 짓이다.

유대교 편드는 기독교 근본주의·문자주의·세대주의 진영

유대교와 기독교의 입장은 이처럼 분명히 갈린다. 그런데 유대교의 이런 견해에 동조하는 기독교 진영이 있다. 대체로 성경에는 오류가 전혀 없다고 믿는 문자주의자, 종말론적으로는 세대주의자,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하는 근본주의자들이다.

기독교 종말론에는 무(無)천년설·전(前)천년설·후(後)천년설 등이 있고, 전천년설 안에도 역사적 전천년설·세대적 전천년설 등이 있다. 세대적 전천년설을 믿는 세대주의자들은 예수가 일차로 재림해서 믿는 이들을 데려가고(휴거), 7년 대재앙이 이 땅에 일어나고, 예수가 다시 내려와 1,000년간 통치하고, 모든 게 싹 정리된 다음 천국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이들은 신약보다 구약의 문자를 더 사랑한다. 신약에서도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보다 요한계시록만 좋아한다. 구약성경의 에스겔, 다니엘서나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을 희한하게 엮어서 이론을 만들었다. 그걸 문자주의, 근본주의와 섞어 흔들면 '폭탄주'가 된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이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용서와 사랑보다는 분열과 전쟁, 관용과 공존보다는 차별과 증오를 선호한다.

지금 대부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잡종'(雜種)이 '잡종'(雜宗)을 믿고 있는 셈이다. 잡종들이 예루살렘 성지 위에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 그걸 박살내야 한다. 중동에 완전한 평화가 오려면 잡종들의 씨가 말라야 한다. 이것이 유대교, 기독교 세대주의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미국 근본주의, 세대주의 기독교의 최근 대표 주자로는 조지 부시의 영적 아버지 같은 팻 로버슨, 재작년 죽은 제리 폴웰, 매케인을 지지했던 존 허기 목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거물들이고, 모두 공화당을 지지한다.

이들은 대놓고 이스라엘을 적극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침공을 찬성한다. 예배 시간에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고, 돈을 모으고, 참전할 젊은이를 모집한다. 며칠 전에도 팻 로버슨이 "하나님은 팔레스타인을 공격한 자기 백성(이스라엘)을 지지할 것"이라고 떠들었다.

그럼 한국은 어떨까.

조용기 목사와 인터콥으로 대표되는 세대주의 종말론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별이 52개인 성조기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2개의 별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가 이스라엘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를 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별이 52개인 성조기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2개의 별 중에 하나가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가 이스라엘이라고 '믿거나 말거나' 같은 얘기를 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작년 여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부시 대통령을 환영하는 수많은 인파가 시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댔다. 그들이 흔들던 성조기에는 52개의 별이 그려 있었다. 대통령은 자기 나라 국기를 거꾸로 흔들고, 국민은 남의 나라 국기를 맘대로 그린다. 2개의 별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는 공방이 벌어졌다. "한 개는 한국, 다른 한 개는 이스라엘"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아마 그 성조기를 만든 사람은 믿음이 유난한 기독교인이었을 것 같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따질 때 한국이 미국 정도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펼칠 이유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종교적으로는 '오야붕'과 '꼬붕' 관계에 있기에 친이스라엘 경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한국에 처음 들어왔던 미국 선교사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초기 신학자들은 대부분 근본주의·문자주의·세대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길선주·손양원·주기철 목사 등 한국 초기 교회의 상징적 인물들도 대개 세대주의자들이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게 보통 신념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학문적 수준이 나아지면서, 지금은 그래도 다양한 견해들이 공존한다. 신학적으로는 세대주의의 기가 많이 꺾였다. 하지만 교회 현장을 가면 상황이 다르다. 이단으로 낙인찍힌 시한부 종말론과 세대주의 사이에 놓인 얇은 담장 위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

세대주의는 시한부 종말론과 달리 날짜만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을 뿐이지, 마지막 때에 예수가 재림해서 사람들을 하늘로 데려가고, 이 땅에는 7년 동안 대재앙이 일어나고, 불신자들은 지옥 불에 떨어지고, 예수가 신자들과 다시 내려와 이 땅을 1000년 동안 다스리고, 영원한 천국이 이뤄지고, 대충 이런 얘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그럴듯하게 한다.

전형적인 세대주의 종말론자인 조용기 목사는 70년대에 이렇게 주장했다. "구라파연맹(유럽연합)의 대통령(적그리스도)이 이스라엘과 7년 평화조약을 맺는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는 사람은 휴거가 안 되었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다. 그 7년 동안 이 세상에는 환란과 재난과 심판이 있다." "구라파(유럽)의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도와서 마호메트교의 사원을 헐고 그들의 성전을 짓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두고 보라."

조 목사에 의하면, 7년 평화조약 때 성경이 예언한 대재앙이 일어나는데, 재앙 전에 휴거가 벌어진다. 따라서 7년 평화조약이 체결됐다는 뉴스를 접한 사람은 휴거가 안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이 그가 당시 교계에서 이단으로 찍힌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혼이 나서인지 요즘은 이런 얘기를 안 한다.

지금도 조용기 목사 식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신봉하거나 유사한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천지에 널렸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선교에 유난히 열심이라는 점이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희생한 사랑에 겨워 그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차원에서의 선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스케줄, 종말의 시나리오에 모든 걸 맞춘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의 이미지보다 십자군의 이미지가 훨씬 짙은데, 정복적·폭력적·제국적 선교 방식으로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해 과격하게 선교하는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인터콥을 들 수 있다. 2003년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연 데 이어, 2004년과 2005년에는 인터콥이 주관한 가운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열었다.

2005년 대회 공동대표였던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가 행사 뒤 자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소한의 피해만 내고 지극히 평화적인 종료 상황에 들어간 가자 정착촌 철수는 2005 예루살렘 평화대행진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전인수다.

인터콥은 2006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대행진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정부의 반대가 심했고, 참가자들은 현지에서 강제 추방됐다. 최바울씨는 행사를 강행하면서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자들은 모두 무너져내릴 것이다"고 여호수아 흉내를 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분당샘물교회 단기봉사팀이 납치되고 피살되는 참극이 벌어졌을 때다. 최바울씨는 "2006년 평화대행진이 성사됐으면 강도와 탈레반 세력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그는 2008년에 예루살렘에서 평화대행진이 열렸다면 2009년 가자 지구에서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할 거다.

최바울씨는 작년 8월 미국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 강연하면서,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의식 있는 신학자들은 범상치 않은 일로 여겼다. 이스라엘은 이미 복귀했고, 이제 이방인인 세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할 차례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에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책을 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영감을 얻은 건 아니다. 이 영화는 1985년에 만들어졌지만,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이미 1940년대 중국에서 시작됐다.

어느 중국인이 예수를 믿고 환상을 본 다음에 이슬람의 중심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무슬림에게 선교하기로 했다. 그는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는, 중국 서쪽에서 예루살렘까지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그는 "모든 길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고 굳게 믿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 엄청나게 팔리면서도 동시에 이단 논쟁을 유발했던 책 <하늘에 속한 사람>의 저자 윈 형제(중국인)도 이 운동 가담자다.

한국 교회에서는 중국 서쪽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동네에 복음을 전하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실크로드를 생명로드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 동네에 있는 '스탄'들(아프가니스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파키스탄)에 복음이 침투되도록 하는 데 목숨을 걸었다. 아프가니스탄 참사 이후 겉으로는 잠시 소강상태지만, 한국 교회 입장에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스탄'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들이다.

서울을 가지소서, 예루살렘도 가지소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배출했을 뿐 아니라, 해마다 엄청난 기독교 신자들이 선교지를 방문하고 돈을 쏟아붓는다. 지금도 매년 열리는 예비 선교사 동원 집회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세대주의·문자주의·근본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자기가 그런지 아닌지는 자기도 모른다.

이들의 독특한 문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땅 밟기'라고 아는가. 어릴 때 흙 마당에서 놀던 '땅 따먹기'가 아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들어봤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자기 백성들에게 '땅 약속'을 많이 했다. '땅'이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구약성경을 읽으면 온통 '땅땅'거리는 느낌이 들 지경이다. 하나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밟는 곳은 어디든 그의 땅이 되도록 했다.

한국의 십자군들은 적지에 도착하면 땅 밟기를 한다. 땅을 밟으면서 기도한다. "주여, 이 땅을 내게 주소서." 부동산 투기를 하겠다는 건 아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일주일 동안 침묵하며 빙빙 돌다가 일곱째 날에 나팔 소리와 함께 고함을 지르게 하자 성이 와르르 무너졌잖은가.

한국 십자군들도 목표물을 정하면 빙빙 돌면서 기도한다. "주여, 이 땅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 때 서울시를 봉헌한 것도 바로 이 콘셉트다. 서울시를 봉헌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대한민국을 선물로 준 것은 아닐까.

종교 확신범에게는 치료약이 없다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임하기를 염원하는 국내 평화운동단체들이 연대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내 폭음 속에 감춰질 뿐이다.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임하기를 염원하는 국내 평화운동단체들이 연대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이내 폭음 속에 감춰질 뿐이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관련사진보기



들끓는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스라엘은 불구가 된 한국 기독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선민(選民) 사상에 빠져서 남을 잡초로 여긴다. 문자주의에 빠져서 예수가 가르친 정신의 참뜻에 눈을 감는다. 근본주의에 빠져서 '같음'과 '다름'을 '옳음'과 '틀림'으로 비틀고, 나와 '다른' 사람을 '틀린'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폭력도 불사한다.

유대인들은 '샬롬'(평화)이라고 인사하고, 아랍 무슬림들은 '앗 쌀라무 알라이쿰'(평화가 그대에게)이라고 인사한다. 기독교인들은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라고 인사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뿌리를 둔 세 종교의 인사가 듣기에는 좋은데 현실에서는 무력하다. 정치적 이득만을 노리는 싸움이라면 협상할 틈이라도 있을 텐데, 종교적 확신범들의 싸움이기에 약이 없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정말 답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주뉴스앤조이>(www.newsnjoy.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국교회, #이스라엘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