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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칫했던 동장군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지난 1월 9일 저녁. 한주동안 쌓였던 피로도 풀 겸 찜질방을 찾았다. 날씨 탓인지 저녁 시간임에도 찜질방 안은 적지 않은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열기를 즐기다 보니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눈을 떠보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 밖으로 나가보니 <너는 내 운명> 마지막 회를 보기 위해 휴게실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들이 보인다. 마지막 회 시청률 43.6%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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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렇게 되는구나. 나도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저걸 드라마라고 쓰고 있나? 시청자를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저게 뭐야."
"징글징글하게 꼬고 꼬더니만 이제야 끝나는구먼. 이제 저런 드라마 안 봐도 되니 속이 시원하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드라마'. 텔레비전 앞에서 눈과 귀를 모아 집중을 하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마지막까지 계속 말도 안 되는 통속적 스토리에 대한 비판을 쉬지 않는 드라마 마니아들. 그중 대부분은 나와 같은 아줌마들이지만 20대 딸들도, 드물지만 남편들의 모습도 보인다. 저들도 아줌마들처럼 자신도 모르게 중독된 것일까?

아줌마가 '막장 드라마' 배후조종했다고?

사실 나는 <너는 내 운명>류의 막장드라마 주 시청층이라는 40대 이상 주부이지만 세간에서 화제가 되기까지 한 번도 시청한 적이 없다. 지난 십수 년 일일드라마와 아침드라마,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기획드라마, 특집드라마, 주말드라마 등등을 시청해 온 끝에 <너는 내 운명>과 같은 통속드라마 정도라면 첫 회만 보고도 결말을 줄줄 이야기할 정도로 내공이 쌓여 더 이상의 호기심도 궁금증도 사라져 버린 때문이다.

드라마의 줄거리를 줄줄 꾀어내는 재주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안방극장을 달구었던 <여로><아씨>를 시작으로 1980년대 <보통사람들>, 1990년대 <사랑이 뭐 길래><몽실 언니>, 2000년대 <인어아가씨><열아홉 순정>까지 화제가 된 작품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시청해 온 80대 시어머니와 70대 친정엄마 그리고 60대 이모나 고모들에 비하면 나의 드라마 편력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이 아닐 수 없다.

오전 7시 50분이면 시작하는 아침 드라마로 하루를 시작해 11시 30분에 끝나는 저녁드라마로 하루를 맺는 드라마 고정 시청 층인 40, 50대 이상 아줌마들. 이들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드라마 전성시대가 과연 가능했을까라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막장 드라마를 비평하는 몇몇 블로거 혹은 기자들 글을 보면 엉뚱하게도 막가는 막장드라마의 원인을 아줌마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속극에 충성도가 높은 아줌마 시청층을 잡기 위해 드라마가 점점 막장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아줌마들이 존재하는 한 드라마의 막장화(?)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까지 내 놓고 있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그저 보여주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고 재미가 있든 없든, 작품성이 있든 없든, 연기자의 연기가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가지지 않고 작가들이 원하는 대로 속아주고, 웃어주고, 울어주며, 시청률까지 높여준 아줌마들의 책임이란 말인가?   

오죽 답이 없었으면 가만있는 아줌마에게 화살을 돌렸겠나 싶지만 그건 오히려 막장 드라마를 제작해 내는 방송사나 작가 연출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인체에 유해하고 사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데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에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방송과 방송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 공적기능조차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저런 며느리 볼까 걱정되는 정도지..."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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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논란을 가속화시킨 <너는 내 운명>이 화려한 시청률을 자랑하면서 막을 내렸지만 막장 드라마가 영영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들어 구은재(장서희분)의 복수가 시작된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이 막장드라마의 다음을 이어갈 기대주로 한창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라면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살아오신 양 졸다가도 눈을 뜨시는 시어머니와 자식 재미 남편 재미도 없는 세상에 드라마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친정엄마, 하루 종일 가게에 나와 힘들게 일을 하다가도 드라마를 보는 잠깐 동안은 그 속에 빠져 시름을 잊을 수 있다는 이모... 충성도 높은 드라마 시청자들 막나가는 요즘 드라마를 어떻게 볼까?

"뭐 재미있어서 보냐? 심심하니까 보는 거지. 보다보면 또 그런대로 볼 만하기도 하고... 옛날 연속극은 애들 보고 배울 점도 있고 그랬는데 요즘 연속극은 배울 건 없는 것 같아."

"그냥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대로 보는 거지. 아무거나 하나 재미 붙여 보다 보면 심심하지 않고 좋으니까. 하지만 너무 비비 꼬면 보는 사람도 화가 나.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연속극까지 비비 꽈대니까 말이야."

"남들은 저렇게도 사는구나 하는 거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무슨 취미가 있냐. 그저 연속극이나 보고 울고 웃고 하는 재미인데 요즘엔 연속극도 너무 악쓰고 내던지고 하니까 어떨 땐 보다가 더 스트레스를 받는 다니까. 저런 년 며느리로 들어올까, 저런 사돈 만날까 괜한 걱정도 하게 되고 말이야."

순수하게 드라마가 좋아서 드라마를 시청하는 아줌마들에게 막장 드라마의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정작 독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어도 좋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청자의 기호를 핑계 삼아 시청률 경쟁에만 치중하는 작가, 연출가, 방송사들이 드라마 전체의 질을 저하시키고 시청자의 정서마저 파괴시키는 막장드라마의 생산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미 방송의 공적기능을 상실한 이들의 자정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2009년에도 막장 드라마의 행진을 막을 수 없을 듯하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막장드라마 시장에서 한줄기 맑은 샘물같은 가족드라마를 기대한다는 것이 나 혼자만의 바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태그:#막장드라마, #너는 내 운명, #아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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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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