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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북부 악숨 주교좌성당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성모자상
▲ 에티오피아 악숨 성당 성모자상 에티오피아 북부 악숨 주교좌성당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성모자상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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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악숨(Axum)에는 수많은 기독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 지역에 기독교유적이 많은 것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대 악숨제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전성기(서기 1~4세기)에 악숨제국은 현재의 수단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홍해 건너의 예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이집트를 차지했던 로마제국과 경쟁했고 문화적으로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고유문자를 만들어낼 정도까지 발전했다.

자신들의 독특한 예수와 마리아상 가진 제3세계 나라들

유서 깊은 도시 악숨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중에 하나가 악숨 주교좌성당 안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검은 얼굴의 성모상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이콘(Icon)화가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블라디미르의 성 모자상'과 유사한 형식을 띤 이 거대한 그림에는 마리아와 아기예수는 물론이고 주변 인물들 모두 에티오피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이렇듯 검은 성모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비록 현재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라틴아메리카에는 인디오의 얼굴을 한 성모상이 꽤 많다. 그중 멕시코와 볼리비아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한데 멕시코의 성모상은 과달루페라고 불린다. 검은 머리와 갈색 얼굴을 한 이 성모는 스페인에게 정복당한 아스텍의 콰우틀라토아친이라는 원주민에게 나타나 테베야크 언덕에 성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테베야크 언덕은 아스텍 부족이 '모든 신들의 어머니'로 추앙해 온 '또난친(Tonantzin)'을 숭배한 곳이다. 콰우틀라토아친에게 모습을 드러낸 성모는 "내가 과달루페의 마리아, 또난친이다. 이 땅에 나를 기념하는 성당을 짓도록 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모두 3번에 걸쳐 나타난 성모의 기적에 근거해 테베야크 언덕에 성당이 세워졌고 오늘날 과달루페 성모는 멕시코인 전체에게는 정신적 지주로, 원주민들에게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명명한 '과달루페' 대신 '또난친'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수호성모로 숭배되고 있다.  

과달루페 성모를 직접 만났던 콰우틀라토아친은 나중에 세례를 받고 후안 디에고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1년 12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청에 의해 성인이 되었다. 후안 디에고에 대한 시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달루페 성당 주임신부를 지낸 기예르모 슐렘버그 멕시코 주교는 후안 디에고가 실존인물이 아닌 꾸며낸 인물이라며 성인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후안 디에고가 성모를 목격했다는 주장은 스페인 식민통치자들이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을 쉽게 전파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면서 실존 여부가 확실치 않은 후안 디에고에 대한 시성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슐렘버그 주교의 주장은 대다수의 멕시코인은 물론 스페인의 압제를 받아온 원주민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과달루페, 또는 또난친에 대한 신앙이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해방신학자들은 과달루페 성모를 최초의 해방신학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성모가 후안 디에고에게 인디오 여인으로 나타나 인디오 말로 메시지를 준 것은 당시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원주민들도 스페인 압제자들과 다름없는 고결한 인간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논란이 계속되기는 하지만 과달루페 성모는 주술과 여신숭배신앙이 강했던 인디오 원주민들이 백인 마리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 아니라 또난친으로 대체해 자신들의 방식으로 가톨릭신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볼리비아 북부 티티카카호수 인근 코파카바나 대성당 안에 있는 검은 성모상도 1592년 이 지역 원주민(어부라는 설이 있음)이 자신을 보호해준 것에 감사해 성모의 모습을 검은 나무에 새겼다고 한다. 이 검은 성모(Black Madonna)는 기적설화가 많아 스페인 식민치하에서 고통당했던 인디오들의 영적 어머니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도 볼리비아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거대한 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는 원주민 라파누이의 얼굴을 한 성모와 예수상이 있다. 19세기말 이 섬에 상륙했던 가톨릭 신부들이 선교에 어려움을 겪자 원주민 라파누이의 얼굴을 한 성모와 예수상을 만들어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스터 섬의 성모와 예수상들은 대부분 큰 눈에 황금색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라파누이들이 신성하게 여겼던 전통신 마케마케(Makemake·두 개의 큰 눈이나 새의 머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창조의 신)와 기독교 신앙을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카리브해나 아프리카에서도 자신들의 얼굴을 한 독특한 성화상을 만들어 받들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신, 구교를 망라하고 거의 모든 성화상의 마리아와 예수가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1950년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도 했지만 갓 쓴 양반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오히려 더 낯설기만 했다.

서구를 해방자로 받아들인 한국에서 예수와 마리아

멕시코 원주민 후안 디에고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과달루페의 성모상, 인디오의 얼굴을 하고 있다
▲ 과달루페의 성모상 멕시코 원주민 후안 디에고 나타났다고 전해지는 과달루페의 성모상, 인디오의 얼굴을 하고 있다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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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한국의 성당에 모셔져 있는 마리아는 가녀린 여성으로 우수에 찬 모습을 하고 있고 예수는 아주 잘 생긴 모델처럼 생겼다. 백년 이상 성당과 교회에 모셔졌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이러한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은 성서와도 큰 차이가 있다.

예수의 고향은 이스라엘 북부에서도 외진 나사렛으로 고고학자들은 그 당시 인구는 5백 명 미만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로 얘기하면 함경도 골짜기의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무방한 곳인데, 3년 전 기자가 다녀왔을 때도 나사렛에선 가난한 아랍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예수의 제자였던 나다니엘은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훌륭한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1장 46절)며 아예 예수를 무시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자란 예수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목수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당시는 가난한 마을에서 목수로만 살기에 힘들었기 때문에 농사나 목축을 병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에도 거친 일로 분류되는 직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잘 반영한 것이 2001년 영국의 BBC가 다큐멘터리 '하느님의 아들'을 제작하면서 복원한 예수상이다. 짙은 갈색 피부에 코는 뭉툭하며 부릅뜬 두 눈에 머리털은 짧은 고수머리를 하고 있다. 사막을 헤매는 베두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푸른 눈에 창백한 피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지적이고 우수에 찬 백인 예수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리아도 목수의 아내라고 했을 때 집안일은 물론 밭일 등으로 검게 그을린 평범한 시골 아낙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과 성서에 맞지 않음에도 한국에서는 별 저항 없이 백인의 얼굴을 한 예수와 마리아가 쉽게 뿌리박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개신교나 가톨릭이 아메리카나 기타 대륙처럼 침략적인 성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민중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구원자인 성격을 띠었을 수도 있다.

구한말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었을 때 고종이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미국 정부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나 러일전쟁 당시 평안도 사람들 중 일부가 전쟁을 피해 교회로 간 것은 이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인들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린 서양 선교사들을 양대인(洋大人)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 사대의식으로 오늘날까지 한국교회가 서구교회를 대하는 방식으로 굳어졌다.

백인 예수를 부적 같은 존재로 간주하는 한국교회

1950년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전의 일부 그림이다. 갓쓴 예수의 모습이 생경하다.
▲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예수전 1950년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예수전의 일부 그림이다. 갓쓴 예수의 모습이 생경하다.
ⓒ 백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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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근본주의 신앙과 백인우월주의로 무장한 미국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개신교 처지에서 양대인들의 얼굴을 한 예수의 모습은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외세의 힘에 의존하는 신앙이 싹텄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백인 예수는 부적 같은 존재로 한국교회를 장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15해방과 한국전쟁은 개신교를 등에 업은 백인 예수가 더욱 힘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교인들은 미국이 하느님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쳤다고 생각했고 공산당으로부터 밀려 내려온 북한의 개신교인들에게 미국은 해방자나 다름없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미국선교사들은 막대한 물량의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면서 선교활동에 나섰고 굶주렸던 당시 한국인들은 교회로 몰려갔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선교사들이나 미군들의 눈에 띄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고 귀국 후에는 신학교나 일선교회에서 미국과 미국 교회를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이자 십자군이라고 찬양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 시기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불렀던 빌리 그레함 같은 유명 부흥사가 한국을 다녀갔고(1951년), 그는 한국개신교 목사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5.16쿠데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군부독재와 협력하면서 성장했던 개신교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와 정권교체가 진행되자 용공반미사회가 되었다면서 극우세력과 연대해 서울시청 앞에서 대규모 친미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 내내 이러한 흐름은 계속되었고 한국교회는 이라크 침공과 북한 고립을 추진했던 부시 정권의 가장 가까운 동맹자 역할을 했다. 

지난 백여 년간 미국과 미국교회에 무의식까지 지배를 당한 한국개신교는 여전히 최소한의 자의식조차 없이 성장해왔다. 인간의 삶에서 성숙한 자의식이 없을 때를 유아기로 간주하듯이 한국 개신교는 몸은 비대한데 의식이 따라가지 않는 미숙아 상태에 있다.

가톨릭교회 역시 교회 상층부는 물론이고 일반 신자들도 실제의 마리아보다는 자신의 미래를 담보해줄 수 있도록 구원의 보좌에 앉아 있고 오늘날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백인의 얼굴을 한 마리아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백인 신학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에서 우리의 얼굴을 한 예수와 마리아는 요원할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의 얼굴을 한 예수와 마리아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취급당할 것이다. 한국의 교인들은 천국마저 미국인이나 백인들이 우선이고 황인종이나 다른 유색인들은 이등국민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톨릭을 비롯한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얼굴을 한 예수와 마리아를 찾아야 한다. 이 땅에는 팔레스타인의 예수와 마리아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몸을 던진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의 얼굴을 잊는 한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이미 파탄이 난 서구교회의 영원한 식민지로 백인 예수와 마리아를 섬기는 노예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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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백찬홍 기자는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독인 연대 운영위원, 제3시대 그리스도 연구소 상임연구위원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유영모,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이다.



태그:#백인, #예수, #마리아, #유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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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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