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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다. 과거 학교에서 '동학란'으로 기술된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했던 중년층 이상 사람들도 이제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확장된 시야로 동학혁명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민중사의 참으로 위대한 산봉우리다. 동학혁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사는 19세기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의미의 '민중사'를 가지게 되었다. 동학혁명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끝내 민중사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면서도 썰렁하기만 한 형태를 이어왔을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시대의 어둠을 깨치는 '개화(開化)'는 더욱 오래 미루어졌을 것이다.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사를 풍미하는 프랑스 대혁명, 멕시코 혁명 등과도 비견된다. 하지만 우리의 동학혁명은 매우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멕시코 혁명은 당시에 '성공'을 거둔 혁명이었지만, 동학혁명은 참혹한 실패로 끝난 '민란'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실패로 끝난 그 '민란'이 계속적으로 혁명의 기운을 유지한 채 동학정신의 확대재생산을 이룩해 가면서 훗날 '혁명'으로 승화되는 특이한 유형을 낳았다. 당시에는 실패로 귀결된 민중 항쟁이 훗날 혁명으로 승화되고 완성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도 장엄한 역사 실현인가!

 

 그래서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각별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다. 동학혁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사 전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배가된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실패로 끝난 당시의 '민란'이 훗날 '3·1 만세운동'을 낳고,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관점은 숙연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나는 우리 고장 태안이 114년 전 '동학혁명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에서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우리 고장이 알고 보니 '동학혁명의 고장'이었다는 사실은, 신선한 흥분 속에서 태안사람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굳건히 지니게 해주었다.

 

 나는 우리 고장의 토박이로서 소년 시절부터 '백화산 정기'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백화산 물을 먹은 태안 사람'의 '특징'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런 말들 가운데서 나는 '정기(精氣)'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알게 모르게 정기라는 말에서 긴장감도 갖고 애정 같은 것도 지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백화산 정기는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에 서 있는 '갑오동학농민군추모탑'과 관련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화산 정기는 바로 그 추모탑에서 발현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확신은 나로 하여금 동학정신에 대한 책무를 가지게 하였고, 동학혁명에 대한 긍지와 '동학혁명의 고장 태안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은, 지난 10월 31일∼11월 1일 이틀 동안 우리 고장에서 우리 고장 유사 이래 최초의 전국 행사, 최대 행사로 치러진 '동학농민혁명 제114주년 전국기념대회'의 갖가지 행사들에 적극 참여하게 만들었다.

 

 올해 처음 원북면 방갈리 <태안화력본부> 울안에서 10월 31일 낮에 거행된 '영토제(靈土祭)'라는 이름의 행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태안화력본부 울안은 1894년 9월 그믐날 밤의 북접(北接) 동학농민군 최초 기포지였다. 문장준 접주(接主)의 집이 있었던 그 자리의 흙을 한 항아리 가져다가 태안읍 백화산 추모탑의 흙과 '합토(合土)'를 하기 위한 제례 행사였다.

 

 그 행사를 위해 <동학농민혁명 태안군기념사업회> 배광모 회장과 관계자들은 여러 차례 태안화력본부를 방문, 책임자들과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태안화력본부로부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기포지(유적지)를 점유 당한 데서 오는 박탈감과 상실감, 뼈아픈 아쉬움을 반추해야 했다.

 

 1978년 백화산 교장(絞杖)바위 바로 아래에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을 건립한 원암 문원덕 선생은 다음 사업으로 원북면 방갈리의 최초 기포지에 표지비나 기념탑을 세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끝내 그 숙원 사업을 해결하지 못하고 1982년 73세로 타계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그 기포지 자리에 표지비나 기념탑이 건립되었더라면, 태안화력본부는 건설계획 단계부터 그 자리의 역사적 가치와 장중한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오늘의 태안화력본부 책임자들은 깊이 헤아려야 한다. 발전소 울안이든 바깥이든 적당한 자리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은 동학혁명의 고장 태안에 대한 사려 깊은 예의요 도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기념탑이나 추모탑은 전국 각지에 많이 건립되어 있다. 거의가 관(官)의 예산으로 세워진 탑들인데, 태안읍 백화산의 추모탑은 동학농민혁명군 유족과 후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여 건립한 유일한 탑이다. 태안을 더욱 명예롭게 하는 탑인 것이다.

 

 이 사실을 유념하여 태안화력본부가 자신이 점유한 땅 한 곳에 북접 농민군 최초 기포지 기념탑을 건립한다면, 국가 기간산업체, 즉 공기업에서 건립한 최초 유일의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될 것이다.

 

 태안을 더욱 명예롭게 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 사실을 태안화력본부 책임자들은 깊이 인식하고, 의롭고 의미 있는 일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13일치 ‘태안칼럼’ 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동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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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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