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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한반도는 평년 수준의 강수량과 기온이 유지되는 유순하고 온화한 날씨였지만 유독 주식시장에는 살을 찢는 칼바람이 불었다. 한주간 종합주가지수 하락률 20.5퍼센트는 우리 증시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일 뿐만 아니라, 정작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다우지수 -5.4퍼센트)을 제치고 같은 아시아권의 일본(-12퍼센트), 대만(-7.7퍼센트) 중국(-4.7퍼센트) 등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처참한 수치다.

 

최악의 주가 폭락, 누가 방아쇠를 당겼나?

 

전세계 증시의 동반 하락을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 시장 내면에 어떤 일이 있는지 좀더 면밀히 관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주가 움직임을 분 단위로 표시하는 분봉 그래프를 확인해보면 지난주 폭락의 결정적 분기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림 1]에 표시된 10월 22일 오전 11시를 막 넘기는 순간이다.

 

전주 초반만 해도 한국 증시는 월요일 종합주가지수 1149포인트를 저점으로 화요일 고점 1232를 기록하는 등 지수 1200대 재탈환을 조심스럽게 모색했고 수요일인 22일에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져 오전 11시경까지 1190 부근에서 등락중이었다. 그러나 오전 11시를 넘기면서 증시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해 불과 두 시간여 만에 전저점인 1149를 붕괴시키고 연중 최저가를 갱신하며 마감되었다. 다음날인 목요일 다시 종합주가지수는 80포인트 이상 빠졌고 금요일에는 결국 종합주가지수 1000을 붕괴시키고 938.75로 거래를 마쳐 지수 세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도대체 10월 22일 11시를 전후로 한 시각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낙타 등허리를 부러트린 결정적 모멘텀

 

이날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기획재정위의 종합 국정감사에 출석해 "대외여건 등을 합쳐보면 경우에 따라선 IMF 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당일 10시 56분부터 11시 17분 사이에 이데일리, 머니투데이 등의 속보를 통해 시장에 전해졌고 불과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끔찍한 주가 폭락이 시작되어 반등 한 번 없이 주후반 내내 증시에 패닉을 가져왔다.

 

혹자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주가의 속성을 잘 모르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은 언제나 매도세와 매수세가 팽팽하게 힘을 겨루는 곳이다. 수많은 호재와 악재들이 맞부딪히는 시장에서 어느 한쪽이 득세를 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하다. 강만수 장관의 이날 발언은 많은 나쁜 소식들 중 하나였지만 매도세가 압도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처럼 주가의 큰 방향을 좌우하는 결정적 계기를 모멘텀이라고 한다. 장전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주는 역할이다.

 

생각해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환위기 때와 다르니 걱정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보이던 한 나라의 경제 수장이 국회에 출석했다. 그런 장관이 입장을 백팔십도 뒤집어, 현 국면이 IMF보다 더 심각한 상황임을 고백했다. 추가 하락이냐 반등이냐를 모색하던 증권시장을 완전히 초토화하기에 이처럼 적절한 모멘텀이 또 있을 수 없다. 낙타의 등허리를 부러트리기 위해서는 지푸라기 하나면 된다. 이미 낙타의 등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충분한 짐을 실은 상태라면.

 

우리 국민은 1997년의 외환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경제 펀더멘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관료들의 호언장담을 믿고 있노라니 어느덧 국가 부도의 초입 단계에 들어가 증시가 바닥을 모르고 폭락하고 결국 굴욕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문을 두드리던 그 상황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시에도 핵심 책임 당사자였던 강만수 장관이 IMF 때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면 투자자들에게 어떤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키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지난 한 주 우리 유가증권 시장의 시가총액은 무려 122조 원이 날아갔다. 물론 이 책임이 전적으로 강 장관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 장관의 발언은 그렇지 않아도 빈사상태에 빠진 증시의 등허리를 부러트릴 지푸라기로, 국제증시 하락 속도를 추월하는 추가 폭락의 방아쇠로 딱 알맞은 것이었다.

 

국제 투기세력이 원하는 조건을 갖춘 나라

 

더 큰 문제는 이런 사태가 지난 한 주간의 우연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외국 언론들은 정말 심각한 뉴스들을 연속 타전했다. 10월 17일에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가 한국이 금융위기의 아시아 첫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여전하다는 부정적 기사를 내보냈고 23일에는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국제통화기금이 한국을 지원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이러한 보도에 그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반박하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만일 정부의 반박대로 이런 뉴스들이 명백한 오보라면, 월가와 더 시티를 대변하는 이들 연속된 보도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전술한 경제지들에 한국 관련 정보를 주로 흘리는 취재원들은 대개 국제 투자은행 등 세계적 규모의 초국적 투자기관, 헤지펀드 등의 전략가, 분석가들이다. 이들은 기자와의 인터뷰나 자체 기관의 보고서 등을 통해 기사 자료를 수시로 제공하고 언론 보도에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인가. 외환위기 이후 헐값에 한국 증시를 주워담아 수백조 원의 차익을 남기고 셀(sell) 코리아를 통해 이익실현을 하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다시 이들이 한국경제 위기론을 전파하고 있다. 아마도 그럴만한 빌미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좀 어렵다고 함부로 아무 나라나 헤집어 놓으면서 위기론을 던질 수는 없다. 일개 기업도 아니고 한 나라를 타깃으로 삼으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나라 전체로 체격이 좀 되어야 하고, 수익성 괜찮은 기업들이 존재하면서 단기적으로 외환 등 금융 사정이 어려운 나라가 좋은 대상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하지는 않다. 국민과 정부, 은행과 기업이 똘똘 뭉쳐 대항하면 투기자본도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시장과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정부 또는 경제팀이다. 그 나라의 경제 컨트롤 타워가 이미 국민의 눈밖에 난 양치기 소년이라면 투기세력이 원하는 충분조건이 성립한다.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대부분 국민에게 인기 없는 권위주의적 정부를 가졌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우리 만수, 남대문 열었네"

 

취임 초기부터 강 장관은 원화 약세 기조를 시사하는 발언을 시장에 계속 던졌다. 외환 투기세력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900원대의 환율은 이제 1400원대에 진입했다. 환율 상승이 심각해지자 뒤늦게 강 장관은 외환 보유고 수백 억 달러를 풀었지만 한번 뛰기 시작한 환율은 고삐가 잡히지 않고 아까운 외환만 낭비되었다.

 

지금 제2의 외환위기가 거론되는 판에 어떻게든 달러를 구해와야 할 판이다. 환율 잡는다고 방출한 달러를 1400원대에 다시 산다면, 앉아서 50% 이상의 손실을 본다. 환율 방어용 달러 방출액이 300억달러라면, 달러당 900원 기준으로 우리 돈 27조 원을 시장에 푼 뒤, 42조 원을 들여 되사는 셈이다. 그 차익이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잘못된 정책 때문에, 말 몇마디로 돈이 이렇게 밖으로 줄줄 새고 있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기는커녕 정책 실패와 신뢰 상실로 인해 천냥빚 아니 수십 조의 빚과 손실이 쌓여 나가는 나라 살림살이다.

 

외국 언론의 한국 흔들기, 환율 급등과 주가 폭락을 보면서 한 개인투자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제목은 요즘 다수 국민들이 강만수 장관을 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참고로, 지난 베이징 올림픽 당시 많이 듣던 광고 카피를 패러디한 것이다.

 

"우리 만수, 남대문 열었네"

 

한나라당은 제발 대통령을 좀 도와라

 

사태가 이쯤 되었으면 이제 한나라당이 나설 때가 아닌가 싶다. 집권당이 결자해지를 좀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정부 출범 초기부터 여론의 지탄을 받으며 퇴임 압력에 시달리던 강만수 장관이다. 촛불정국이 한창일 때는 여당인 한나라당 안에서조차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장관 교체 1순위로 그를 거론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대통령의 결단에 의한 강 장관 경질을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대통령이요, 정부다. 국민의 촛불 앞에 두 번 세 번 사과를 하고도 숙인 고개 들자마자 시위 참가자들을 하나씩 추적해, 유모차 엄마에게까지 집시법을 들이밀고 있지 않는가. 국민들이 그토록 해임을 요구해도 모르쇠하다 이제야 경제 실정의 책임을 물어 강 장관을 해임하자면 너무도 스타일 구길 것이다.

 

게다가 강 장관과 대통령의 관계가 보통 사이인가. 항간에 리만브러더스('리'명박-강'만'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환상의 짝꿍이다. 현 대통령에게 강만수 장관은 경제 스승이자 대선 747 공약의 실입안자가 아닌가. 대통령이 나서서 강 장관을 교체한다는 것은 누워 침뱉기요, 현정부 경제 정책의 백기투항이 된다는 점을 대통령 자신도 한나라당도 분명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한나라당이라도 대신 칼을 들어주어야 대통령이 못 이기는 척, 경제팀 교체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또한 후보 시절 종합지수 3000을 장담하다가 주가지수 747에 근접하게 된 대통령의 무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집권 여당의 의리가 아니겠는가.

 

금융 위기는 신용의 위기이며 신뢰의 위기이다. 현재의 위기상황이 제2의 IMF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해법이 다 필요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출발도 마무리도 경제 컨트롤 타워에 대한 신뢰라는 점이다. 신뢰를 잃은 양치기 소년이 양떼를 모는 한, 언제나 늑대의 밥이 되는 슬픈 우화를 모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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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http://www.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희용 기자는 새사연 이사입니다.


태그:#주가폭락, #금융위기, #신용위기, #투기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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