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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고양시 원당동의 공양왕릉에서 고양문화원의 주최로 공양왕고릉제가 거행되었습니다.

600년이나 방치되었던 능을 받들어 오늘날 능제를 드리는 것은 그것이 가정과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일 충과 효을 바로세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공양왕고릉제 600년이나 방치되었던 능을 받들어 오늘날 능제를 드리는 것은 그것이 가정과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일 충과 효을 바로세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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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국의 34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조선이 개국하자 원주로 피난을 갔다가 현 왕릉이 있는 자리에서 왕비(순비노씨)와 함께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는 슬픈 운명의 왕이었습니다.

공양왕이 원주에서 삼척으로 귀양 간 다음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설(異說)도 있습니다. 공양왕 4년(1392년) 7월,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공양왕을 폐하여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강원도 원주로 귀양 보내 감호(監護)하다가 태조3년(1394년) 3월에 삼척시 근덕면의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긴 다음 한 달 뒤인 4월에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는 설입니다. 그래서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고양에서 자진(自盡)하셨다는 설을 정설로 받아들여 1970년 원당동 왕릉골의 공양왕묘를 사적 191호로 지적하였습니다.

빨간 울타리 부분이 능역입니다. 사묘와 다름없이 왜소하고 재실도 없어 부녀회의 천막이 재실을 대신합니다.
▲ 공양왕릉 빨간 울타리 부분이 능역입니다. 사묘와 다름없이 왜소하고 재실도 없어 부녀회의 천막이 재실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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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이 즉위한 것은 1389년 음력 11월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실권을 장악한지 1년 반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위 2년 8개월 동안 왕으로서의 위광(威光)은 커녕 늘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위를 강탈당해야 했고 유배지에서 비운의 생을 마쳐야했습니다.

초헌관이 제수가 올바르게 차려져 있는지를 살핀 연후에 제례의 시작을 알립니다.
▲ 제수 차림 초헌관이 제수가 올바르게 차려져 있는지를 살핀 연후에 제례의 시작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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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의 고려왕조가 문이 닫히는 것을 감내해야했던 공양왕을 추모하는 위령제인 공양왕릉제는  정구상 고양시덕양구청장을 초헌관(初獻官)으로하여 봉행되었습니다. 고릉제는 고양문화원에서 앞장서서 600년을 방치해온 묘소에서 올리는 원혼을 기리는 위령의 제향입니다.

초헌관이 복주를 마시고 제사가 끝난 고기를 맛보는 음복례를 하고 있습니다.
▲ 음복례 초헌관이 복주를 마시고 제사가 끝난 고기를 맛보는 음복례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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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제는 먼저 보현정사의 보현스님께서 나비춤과 바라춤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대제의식인 영산제를  거행하고 이어서 추계대제를 봉행하고 음복과 오찬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좌로부터 초헌관을 맡으신 정구상 덕양구청장, 아헌관 최실경 고양시 국가유공자보훈협회장, 종헌관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영록 이사.
▲ 제관 좌로부터 초헌관을 맡으신 정구상 덕양구청장, 아헌관 최실경 고양시 국가유공자보훈협회장, 종헌관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영록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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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제를 마치고 개성왕씨 중앙종친회 왕영록 이사께서 참례자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역사를 소중히 하는 것은 충과 효를 바로 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일 충과 효을 바로세우는 일, 그것이 오늘날 능제를 봉행하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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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양왕고릉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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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았던 하늘이 제향이 진행되면서 점점 어두워지더니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고 능제를 마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참례자들이 설렁탕으로 점심을 마치고 능을 떠나자 천둥이 쳤습니다.

제게는 그 천둥과 비가 공양왕의 울음과 눈물이다 싶었습니다.

참례자들이 설렁탕을 나누는 것으로 공양왕고릉제는 막이 내렸습니다.
▲ 공양왕고릉제 참례자들 참례자들이 설렁탕을 나누는 것으로 공양왕고릉제는 막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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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 고릉제 제향의 순서와 삽살개의 전설

공양왕 고릉제 제향의 순서

-대축과 제집사가 제사를 지내기전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손을 씻는 의식을 합니다.
-초헌관(初獻官)이 알자(謁者)를 대동하고 제수가 올바르게 차려져 있는지를 살핍니다.
-초헌관께서 능제의 시작을 고합니다.
-신위전에 네 번 절을 올립니다.
-초헌관이 신위께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를 합니다. 선물로는 흰모시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 잔을 올리고 능제 봉행을 알리는 축문을 읽는 초헌례(初獻禮)를 합니다.
-두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를 합니다. 첫번째 올리는 술은 예제라고 해서 처음 뜨는 술을 올리고 두 번째 올리는 술은 앙제라고 하여 중간정도 익은 술을 올립니다.
-세번째 잔을 오리는 종헌례(終獻禮)를 합니다.
-초헌관이 대축을 대동하여 복주를 마시고 제사가 끝난 고기를 맛보는 음복례(飮福禮)를 합니다.
-헌관과 참례자 전원이 사배를 올립니다.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 망료례(望燎禮)를 끝으로 모든 의식이 끝나게 됩니다.

제사를 지내기전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손을 씻는 의식을 합니다.
▲ 제향차례 제사를 지내기전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손을 씻는 의식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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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

공양왕과 왕비 노씨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일파에 쫓겨서 도성인 개성을 빠져나와 이곳 고양시 까지 도망치게 되었다.

초행길에 날은 저물고 두려움과 허기로 절망하고 있던 차에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이 있어 가보니 작은 암자가 있었다. 하지만 암자의 스님은 이성계일파가 건국한 조선이란 왕조는 불교를 달가워하지 않으니 이곳은 안전한지역이 아니라면서 멀리 떨어진 누각에서 공양왕부부를 기거하게 했다.

스님은 날마다 밥을 날라다 공양왕부부를 수발했는데, 어느 날 왕과 왕비가 보이질 않았다. 스님은 왕씨 일행들과 함께 공양왕부부를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공양왕부부를 따르던 삽살개가 연못을 들여다보면서 계속 짖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가까이 가자 삽살개는 홀연히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이상히 여긴 일행들이 연못의 물을 퍼내고 바닥을 보니 옥새를 품은 왕과 왕비, 그리고 삽살개가 나란히 죽어있었다.

이리하여 고양시 원당동에 공양왕의 능이 생기게 되었으며 공양왕부부와 생사를 같이한 삽살개의 충성을 기리어 삽살개 형상을 왕의 무덤 앞에 새워놓았다고 한다.

왼쪽의 둥글게 팬 땅이 공양왕부부와 삽살개가 투신하였다는 전설의 연못입니다.
▲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이 있는 연못 왼쪽의 둥글게 팬 땅이 공양왕부부와 삽살개가 투신하였다는 전설의 연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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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 부부를 따르던 삽살개의 전설과 연관해 왕릉 앞의 석호가 삽살개라는 설도 있습니다.
▲ 공양왕릉앞의 석호 공양왕 부부를 따르던 삽살개의 전설과 연관해 왕릉 앞의 석호가 삽살개라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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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motif_1
에도 포스팅되었습니다.



태그:#공양왕고릉제, #고양문화원,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고양,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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