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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 중립이라도 지키도록 하겠다."

 

이병순 KBS 사장이 지난 1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다. 여야 양쪽으로부터 KBS 공정성이 도마에 오르자 나름대로 내놓은 해법이다.

 

기계적 중립이라니…. 오죽하면 그런 답변을 내놓을까 싶다. 당장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임시변통의 답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사장 취임 이후 일련의 행보를 보자면 그것이 그의 평소 소신일 수 있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이 사장은 취임 직후 단행한 인사를 통해 KBS 보도와 프로그램 제작의 주요 역량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그는 KBS가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영향력과 신뢰도에서 1위를 차지해왔던 KBS 공신력의 기반을 송두리째 물갈이했다. 한국기자협회가 시상하는 '한국기자상'과 '이달의 기자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탐사보도팀을 해체했고, 이제는 주요 시사 프로그램까지 아예 없애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KBS 탐사보도팀이 해체된 후 뉴스가 달라졌다  

 

그가 말한 기계적 균형은 그래서 면피성 발언도 못 된다. 저널리즘 영역에서는 이미 용도 폐기된 '기계적 중립론'을 들고 나온 것부터가 그렇지만, 최대한 선의를 갖고 해석해도 그의 행보는 기계적 중립과 거리가 멀다.

 

기계적 중립이라도 지키려고 한다면 그는 기존 보도 시스템과 그 인적 자원, 그리고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 과정에서 기존의 인적 역량과 조직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보완하는 방안을 찾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사와 조직개편,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 기존 인적 역량과 자원, 시스템을 송두리째 해체하고 있다. 그것은 균형을 지향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는 최근 KBS 뉴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KBS 뉴스에서는 더 이상 뼈있는 보도를 찾아보기 어렵다.

 

단적으로 최근 급등락을 거듭한 환율 문제 등 현 정부의 금융위기 수습 능력에 대한 KBS 보도에서 정부에 비판적 지적이나 의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난 1주일 동안 내보낸 기사에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국회 기획재정위 국정감사 소식을 전하면서 민주당 의원들의 지적을 소개한 것이 거의 유일하다. 왜 환율이 급등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심도있게 분석한 기사도 거의 없었다.

 

대신 "달러 사재기를 하면 안 된다" "외환위기 때와 다르다"는 이 대통령의 발언 소식이 눈에 띄게 두드러질 정도다. "신뢰가 결국 문제"라는 기사에서도 왜 문제인지 실속있는 분석은 빠져있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해 달러를 풀게 하는 등 평소 '시장주의 원칙'과는 정반대로 가는 관치 행태에 대한 조망 같은 것은 아예 기대 난망이다.

 

KBS는 그동안 공직자 재산 검증 보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왔다. 노무현 정부 때는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 출범 때도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심층 취재해 결정타를 날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부분 보도국 탐사보도팀이 올린 성가다.

 

독자적인 취재 노하우는 물론 관련 데이터 베이스도 풍부하다. 공직자들의 쌀 직불금 부당 수령 문제에 대한 KBS 보도에서는 그러나 이전과 같은 기민한 심층 취재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KBS 보도태도는 '기계적 중립'과도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한 마디로 '탈정치'다. 정치적 논란이 되거나 민감한 정치적 현안은 아예 보도 자체를 회피하겠다는 자세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자체를 포기하겠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시시비비 따지기를 포기한 언론, 누가 볼까

 

KBS 이런 경향은 조만간 모든 프로그램으로 전파될 개연성이 커 보인다. 예고되고 있는 것처럼 <시사투나잇>이나 <미디어포커스> <쌈> 같은 시사 프로그램들은 그 존립 자체가 불투명하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공영방송으로서 중대한 직무유기다. 국민들의 시청료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KBS로서는 국민과 시청자들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없다. KBS의 이런 보도태도는 당장은 시청자들을 눈속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오래갈 수는 없다.

 

머지않아 시청자들과 청취자들은 KBS의 보도 프로그램과 시사 프로그램이 보나마나한 방송, 들으나 마나한 방송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KBS 출신 첫 KBS 사장이라고 자부한 이병순 사장이 지난 20여년 동안 온갖 정치적 굴곡과 안팎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KBS 구성원들이 어렵사리 쌓아온 공영방송으로서 KBS 신뢰성과 영향력을 단 한 순간에 송두리째 허물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KBS의 이런 변화에 박수를 칠 것인가?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신뢰를 잃은 방송이, 영향력을 상실한 방송이 권력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대가 바뀌고, 미디어 환경이 달라졌다.

 

이미 방송 미디어는 세상 천지에 수도 없이 널려있다. KBS가 내놓은 자리를 YTN이 대신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청와대가 이명박 대통령의 KBS 주례 라디오 연설방송을 중단할 때 쯤 되면, 이병순 사장은 권력 핵심부로부터 "왜 방송을 그렇게밖에 못 만드느냐"는 핀잔을 듣게 될지 모른다.

 

기계적 균형, 그것 '기계' 아니면 참 힘든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균형'이라도 잡자면 피말리는 줄타기일 터인데, 이병순 사장의 행보는 아예 줄타기에 나서볼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기계적 균형이라도 잡겠다는 그의 말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태그:#KBS, #이병순, #기계적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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