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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점심시간에 동료 의사들과 휴게실에 모여 꺼내는 화두는 단연 심사평가원에서 발표한 '동일성분 의약품 중복처방 금지 고시(告示)'에 대한 이야기이다. 10년 넘게 개원가를 떠돌던 의림(醫林)의 고수들이라 회의를 하기보다는 시간날 때 푸념조로 얘기하는 정도다. 그래도 이 고시 내용에 문제가 많고, 이로 인해 환자들과 실랑이를 벌인다는 얘기 하나씩은 입에 담는다.

이번 고시는 처방한 약을 다 복용하기도 전에 다시 처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어겼을 경우는 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병의원에 책임을 묻고, 환자 본인에게도 불이익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뜯어보면 중복 처방된 약을 환자 본인의 실수로 중복해서 복용하는 것을 걱정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줄 염려 때문에 이를 막겠다는 게 아니다. 실상은 중복처방으로 인한 국가부담을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후 삼삼오오 모인 우리들은 또 몰상식한 정책을 내놨다는 둥, 돈 좀 아끼려고 의사들 힘들게 만들 뿐 아니라 환자들도 피곤하게 됐다는 둥 불만을 나눈다. 그러다가 결국은 환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면서 설득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항상 그렇듯이 일선에 있는 의사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하는 자조 섞인 목소리만 내면서….

의약품 중복처방 금지란?

중복처방은 주로 개원가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약을 분실했다든지, 장기 처방 약의 경우 하루, 이틀 미리 왔거나, 길게 출장을 가게되면 중복해서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당뇨약을 처방하면 보통 15일에서 30일치 정도 주는데, 하루 약을 다 먹기 전에 이틀 먼저 와서 약을 받아가면 이틀치만큼 중복처방이 된다. 하루라도 복용을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환자들은 날짜를 엄히 지키는 편이다. 며칠 약을 먹는 급성질환 환자의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신경계 질환, 정신질환 등 대부분 만성 환자분들이 불편을 겪게 된다.

이제까지는 환자가 원하는 대로 처방을 해줬다. 또 환자가 약을 거르지 않고 잘 복용하도록,되도록이면 약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방문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는 칼같이 제 날짜를 맞춰서 오든지 며칠 약을 안 먹고 와야한다고 말해야 한다. 한 달치 약을 가져갔는데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심평원의 고시 내용을 보면, 2008년 10월 1일 처방분부터 심사를 해 180일(6개월) 기준으로 7일 이상 중복 처방을 한 경우 의사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7일이라면 충분한 시간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한달에 한 번 오는 만성질환자의 경우, 한달에 하루 이상 어긋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겹치는 날짜가 있으면 의사에게서 중복된 약제비를 환수하겠다는 뜻이다. 그럴 경우 의사들은 불만이 많겠지만 환수 당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날짜 맞춰가며 약을 처방하고, 미리 온 환자들에게는 제 날에 오라고 돌려보내야 하고, 며칠 분이라도 약을 분실했다면 환자에게 본인 부담이라고 말하면서 싸워야 하고, 외국 출장 가는 사람들에게는 약 다 먹고 나면 현지에서 다시 진료 받으라고 해야 한다.

물론 심평원이 예외 사항이라고 명시한 조항이 있다. 약이 부작용을 일으켰거나 변질된 경우, 질병 악화로 처방을 바꿀 경우, 항암 치료환자나 소아 환자가 심한 구토로 약을 일찍 소실할 경우, 정신과 질환 환자가 약을 초과해서 복용한 경우, 특별하게 약을 분실하는 경우(도둑, 화재, 치매)와 같은 때에는 예외로 둔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경우는 극히 일부분이고, 개원가에서는 만성질환자들에게서 생기는 날짜 문제가 대부분이다.

이런 중복처방 때문에 한해 보험 재정에서 빠져나가는 돈이 227억 원 정도라고 보건복지가족부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남에게 약을 준다든지 오용하거나, 의사가 함부로 처방해 낭비되는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다. 즉 어쩔 수 없이 중복처방하는 경우를 빼면 위의 이유로 낭비되는 재정은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무리하게 서로가 불편한 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 다른 데서 줄일 것도 많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해가 안 간다.

OECD에서 발표한 보건 관련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전체 보건관련 의료비 중에서 1년 약제비 비중이 2007년 기준으로 약 26%이지만, 국민 1인당 약제비는 OECD 국가 중에서 낮은 편이다. 보건의료비에서 약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은데 1인당 약제비는 낮다? 이 내용을 좀더 해석해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선진국일수록 보건의료비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약제비 비중이 낮은 것이고, 후진국일수록 총의료비 자체가 낮아서 상대적으로 약제비 비중은 높게 측정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경우 1인당 약을 덜 복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나 심평원은 약제비 비중이 높다는 것만 얘기하고, 1인당 소요 약제비 절대치가 낮다는 것은 잘 발표하지 않는다. 약제비를 낮춘다는 명목으로 숨기는 것일 수도 있다. 한방 보약이나 의료 소모품을 빼고 실제 양약 위주의 약제비만을 보면 그 비중은 실제 OECD 국가들에 비해 더 낮을 것이다.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해서, 혹은 중복 처방되어 문제를 바로잡고, 동시에 누수되는 재정을 줄이겠다는 것은 문제의식부터가 잘못이다. 그렇다면 결국 지난번처럼 기초수급 대상자들의 병의원 이용을 줄여서 재정 절감을 이루겠다며 진료 이용권을 제한시키는 조치처럼 편안하게 재정을 줄여보겠다는 안일한 정책으로 밖에 볼 수 없잖은가?

10월부터 적용... 요즘 환자들과 한바탕 전쟁 중

2008년 10월 1일 진료분부터 적용한다고 해 요즘 계속 환자들에게 유인물도 보여주고, 설명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분들에게 설명하는 게 여간 쉽지가 않다. 더욱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더 그렇다. 얼마 전 할머니와 긴 시간 얘기를 하다 지친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다 못해, 정부에 대한 불만이 차올라 속으로 욕을 하게 된다.

그 날도 저녁 시간에 환자들이 많아 밀릴 때였다. 늘 혈압약을 처방받고 가는 할머니가 들어오셨는데 평소에도 약을 가끔 잃어버려 미리 오시곤 했다. 그 전에는 조심하라고 간단히 말씀드린 후 그냥 처방해줄 수 있었다. 10월부터 1년에 14일이 지난 약부터는 본인 부담이다.

"할머니, 이젠 법이 바뀌어서 미리 오시면 안 됩니다. 약 잃어버리지 마랑(말고) 잘 간수하십써. 예?"
"무사(왜)? 잃어버리곡(잃어버리고) 어시민(없으면) 병원에서 다시 줘야되는 거 아니? 돈이야 냉(내서) 감시난(갈 테니까)."
"그게 아니고, 예. 약값이 너무 많이 든댄(든다고) 나라에서 더 처방허믄 안 된다고 공문 나왔수다."

유인물을 보여드려도 본 채도 안 하신다. 이렇게 옥신각신하기를 10여분. 할머니는 진료실을 나갔다가 같이 온 아들을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중년쯤 된 아드님에게 설명했더니 대충 알아들은 것 같은데 할머니는 그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었다. 이 병원에 자주 왔는데 이럴 수 있느냐는 둥, 돈 더 낼 테니 사정 봐달라는 둥 할머니는 숫제 사정을 하신다.

환자들이 밀렸는데 할머니는 일어나지도 않으셔서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할머니께 빌다시피 하며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겠노라고 겨우 달래 보냈다. 나가시는 할머니 표정에선 정부니, 심평원이니 관심이 없고, 병원이 너무한다는 원망만 서려있는 듯 했다.

이제 정말 10월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르신 설득 전담팀이라도 꾸려야 하나?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http;//www.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쓴 고병수 기자는 전문의이자 새사연 이사입니다.



태그:#중복처방금지, #의약품, #병원, #약제비, #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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