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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언제나 끊임없이 기억되면서 현재화된다. 그런 점에서 과거는 역사를 잉태하고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기억의 유한성 속에서 결코 지워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 교과서는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의 현재적 거울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꾸준히 우리 삶의 역사를 지배하는 거울이 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자유주의 우파들의 역사 교과서 개편 논의는, 단독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지정하자는 그간의 논의 속에 이미 잉태하고 있던 우파식 기억 투쟁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노골화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보인다.

 

사실 그런 징후는 이미 2004년도에 조선일보 계열사와 한나라당이 금성출판사의 역사 교과서에 대한 사상 공세를 펼칠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 2005년 1월에 출범한 <교과서 포럼>은 최근 소위 대안교과서를 엮어 낸 바 있다. <교과서 포럼> 공식 사이트의 공지사항에는, 금성교과서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를 편향과 왜곡이 심하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하다는 것, 그에 비해 북한현대사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관대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반국가적 통일운동으로서의 교재" 곧 좌편향이라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

 

<전체구성과 역사관의 문제점>이라는 <교과서 포럼> 공식사이트의 총론적인 성격의 글을 보면, 금성판 교과서 집필자들의 역사관이 반제국주의 제3세계 혁명론 곧 "1930년대에 성립한 중국공산당의 신민주주의혁명론"에 뿌리가 닿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계속하여 <교과서 포럼>의 공식 문건은, 이같은 역사관에 입각하여 금성사판 교과서는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미국과 일본에 종속된 사회로 파악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세력은 소수의 친미·친일 반민족세력이며, 건국 이후에도 그들에 의한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의 역사가 이어졌다는 것, 1960년대 이후 형식적으로 근대화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대외종속과 사회모순이 심화되었다는 서술로 금성판 역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지난 60년간 이룩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성취라는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는 역사적 발전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고 원통해 하고 있다.

 

중요한 부분이라 조금 더 인용하면 이렇다. "금성사판 교과서가 중시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6·10민주항쟁으로 그 맥이 이어지는 '민족·민주운동'이다. 이 이름을 통해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들의 역사관이 반제국주의 제3세계혁명론에 입각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 현대사는 1987년 6·10민주항쟁 이후 비로소 올바른 방향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이후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2000년의 6·15공동선언이 도출되는 등, 통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교과서는 민주화시대를 맞아 민족통일도 임박한 것처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보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가? 저들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역사적 의미는 결국 정체성 형성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로 보아 우파들의 역사서술 관점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하여 각 시대를 이끈 권력자 또는 정치 주류의 관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총체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일본 우파의 역사인식과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며(식민지 근대화론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들에게, 그리고 독재체제를 강고히 구축했던 인물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같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과서에 대한 이념공세를 펼치고 있는 소위 한국의 보수세력의 뿌리는 냉전반공주의에 있다. 그들은 영웅사관과 엘리트주의에 기대면서 독재를 옹호하고 대중의 희생 위에 이룩한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성과마저 공과를 균형있게 서술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역사왜곡을 시도하려는 중이다. 균형있는 서술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의 무엇을 위한 균형인가도 역시 중요한 것임을 기억하자.

 

다시금 반공이데올로기 색채와 정치적 수사를 매개로 해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고 현재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역사의 기억(친일 부역과 군사독재, 그리고 정격유착으로 인한 부정부패 등)을 삭제하고자 하는 우파들의 총공세야 말로, 그동안 이룩한 관제기억과의 기억투쟁에서 힘겹게 이룩한 민주주의적,민족주의적, 민중주의적 역사서술에 대한 일대 반격이요, 기억투쟁임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불길하다. 진보개혁 세력은 사분오열되어 있고, 대중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해의 차원에서만 표를 던진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다시금 어딘가로 회귀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이 무력감을 벗어던지고 다시금 세상에 대한 결기를 가다듬는 것이 필요하리라. 그래서, 나는 밤늦게 이 글을 쓴다,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태그:#교과서 이념 공세, #기억투쟁, #역사적 기억의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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